자신이 언제 태어날지 아는 사람은 없다. 사는 동안 알면 좋은 것은 사랑할 때와 죽을 때이다. 안다는 것은 물끄러미 바라볼 수 있다는 뜻이다. 사랑에 탐닉하고 집착하는 것, 죽음을 두려워하고 멀리하는 것. 그 마음을 비우면 득도한다. 하나 사랑이 떠나고서야 뒤늦게 사랑을 깨닫고 죽는 순간까지도 죽음을 밀쳐내려고 애쓰는 존재가 사람이다.
나는 언제 출발하면 좋은지 막막했던 초보 여행자였다. 그냥 어느 날이었다. 그날은 오래 전부터 나의 내면 깊숙한 곳에 보관되어 있다가 떠나기 하루 전이나 당일에 갑자기 배달된 것처럼 불쑥 다가왔다. 다녀와 보니 여행자가 알면 다행인 것은 두 가지가 있었다. 여행을 좀 더 계속하는 게 좋을지, 그만 집으로 돌아갈 때가 된 것인지.
처음 여행을 시작한 날, 중간 중간 돌아온 날, 여행을 끝맺은 날. 그 모든 날이 공교롭게 다 흐렸다. 해를 볼 수 없었다. 활짝 갠 하늘, 눈부신 태양, 따듯한 공기, 싱그러운 바람은 드문드문 있었다. 떠난 날은 엄청난 황사가 천지를 덮었다. 4월부터 6월까지 65일 동안 곧잘 흐렸고 비는 잦았으며 항상 먼지바람이 불었다. 덕분에 여행자는 차분했다.
흐린 하늘 사이로 엷은 햇살 비추거나 여우볕 날 때, 혹은 복되게 온종일 햇볕 푸진 날에나 간신히 자신의 온전한 그림자를 만날 수 있었다. 아, 나에게 그림자가 있었네! 놀랄 만큼 아내와 나는 저를 따라다니는 그림자를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나로부터 떠나 나에게로 돌아오는 여행은 자신의 그림자 말고는 기댈 이가 따로 없었다.
그렇듯 그림자는 가끔씩 출현했지만 모습을 감춘 대부분의 시간 동안에도 내 안에 들어와 있었다. 그 사실을 갈수록 더욱 명징하게 느낄 수 있었다. 도시의 일상을 쳇바퀴 도는 동안에는 억누르고 지우려고만 들었던 내 모습들. 그것은 그림자가 되어 한시도 나를 떠난 적이 없었다. 한사코 부정하며 돌아보려고 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여행은 그 모든 내가 다 너라며 무수한 나를 내 앞에 내놓고 있었다. 약한 것, 싫은 것, 화난 것, 못난 것, 나쁜 것을 내 밖으로 몰아내고 마치 내 것이 아닌 양 없앨 수 없다는 것을 수긍했다. 그 모든 것은 없애서는 안 되는 나였다. 끝내 같이 살면서 보듬어야 할 또 다른 나였다. 흐린 날이면 나는 나의 그림자를 사뿐히 안고 걸었다.
너는 누구냐?
떠나서 고생하며 울고 웃다가 돌아오는 여행. 그것은 공동체의 신화가 사라진 시대에 누구나 손수 체험하고 소유할 수 있는 개인의 신화였다. 같은 자리에 돌아와 있지만 떠날 때의 나와 달라진 내가 도착해있는 것. 그 둘이 다시 하나로 뒤섞이며 혼미해지는 것. 그렇더라도 느낌은 몸에 남아 언제든 다시 떠나라고 꿈틀거리고 있었다.
신화의 세계에 살았던 인간의 여행은 자신의 내면 세계와 외부 세계가 분리될 수 없게 연결된 뫼비우스의 띠였다. 그는 기적을 믿었고 자신으로부터 떠날 수 있었다. 그의 여행은 마법과 공포와 희열과 고통으로 용솟음쳤다. 모든 가능성이 열려있었다. 무엇이든 될 수 있고 어디로든 갈 수 있었다. 여행을 다녀온 그는 전과 같을 수가 없었다.
집을 떠나는 것, 하던 일을 멈추는 것, 일상의 속도에서 벗어나는 것. 그렇게 문득 시작된 바바 여행은 잃어버린 뒤에도 잃어버린 줄 몰랐던 나를 만나는 여정이었다. 너무 많은 내가 있어서 혹은 너무 확고한 나만 있어서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나 같은 이에게 여행은 기적을 일으켜주었다. 너 자신이 원래 어떤 존재인가를 보여주었다.
자신을 믿지 못하는 불안,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무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망각. 나를 둘러싸고 있던 각질 같은 것들이 여행을 하는 동안 하나둘 떨어져 나갔다. 껍질을 벗고 나자 중년에 이른 내 생애에 그동안 기적이 너무 많았다. 나는 이제껏 수많은 기적들 속에서 살아 숨 쉬고 있었다. 나와 연결된 모든 것이 기적이었다.
무심코 밟고 지나간 풀, 발에 채인 돌멩이, 목덜미에 떨어지는 빗방울, 어슬렁거리며 지나가는 개, 생각지도 못한 곳에 있었던 의자, 내 등을 떠미는 강한 바람, 앞서가는 아내의 긴 그림자. 그때 그곳의 그 모든 것이 오래 전부터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찰나의 만남들이 한 치 오차도 없이 나를 정확하게 스치고 지나가는 것 같았다.
기적은 하루하루 너무 많았다. 살아있다는 것, 고통을 느낀다는 것, 수십 년 다른 길을 걸어온 아내와 내가 그날 그 자리에서 만난 것, 함께 여행하며 아옹다옹했던 것, 다시 홀로 걷는 것. 감탄할 줄 몰랐고 감사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만사가 내 생애에서는 두 번 다시는 없을 기적이라는 것을 여행은 생생히 느끼게 해주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사람들은 당장 여행을 떠나고 싶어 미치겠다고 말하면서도 그럴 수 없는 수많은 이유를 갖고 있었다. 나도 같았다. 하나 가져야 할 것은 여행을 떠나야 하는 단 하나의 이유였다. 아니 바로 그 이유를 몰라서, 그 질문을 던지지 않으면 견딜 수 없기에, 떠날 수밖에 없는 것 아니냐고 반문하는, 그런 상태를 더는 외면하지 않으면 족했다.
여행자는 질문을 던지는 자였다. 답을 구하거나 결론을 내리는 자가 아니라 질문을 던진 다음 오감을 열고 마음을 비워서 기다리는 자였다. 질문하고 기다리는 과정을 반복하는 여행은 하루도 같지 않게 나를 이끌어주었다. 여행을 통해 얻은 자신에 대한 깨달음은 단 한 번도 내가 예상하거나 상상했던 특별한 방식으로 오지 않았다.
식당에서 밥을 먹다가, 생수병 물이 똑 떨어졌을 때, 아내와 다투던 도중에, 길 위에서 모르는 이와 눈길 주고받으며 지나치는 사이에, 쉬어가는 나무 그늘에서, 생소한 잠자리의 이불 냄새를 맡으며 뒤척이다가, 아침 햇살 아래 기지개를 켜면서. 그 순간순간 마음 저 밖으로 내쳐두었던 이야기들이 다른 의미가 되어 내 안으로 슬쩍슬쩍 들어왔다.
그동안 나를 지탱했고 나를 나답게 해왔던 것들이 실은 내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나는 특별하다, 나는 남들이 못하는 것을 한다,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나는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다, 나는 친구가 많다, 나는 오래 기억될 것이다 등등. 그런 너는 네가 아니었다는 소리가 조금씩 천천히 분명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여행은 나를 작게 만들고 있었다. 65일 동안 육지의 바깥 길을 따라간 여행은 나를 아무 것도 아니게 만들었다. 겁나거나 싫지 않았다. 나는 남들이 다 하는 것을 하기에도 벅찼고, 나는 아무런 힘도 갖고 있지 않았으며, 나는 보잘 것 없었다. 나는 언제나 혼자였고 사라지면 바로 잊어질 것이다 하는 그런 중얼거림이 의외로 편안했다.
그 상태를 딱히 뭐라고 설명하거나 표현하기 어려웠다. 이를테면 바다 보는 여행이 거듭될수록 나는 점점 액체로 변하고 기체로 변하다가 비라도 내리면 망망대해에 물 한 방울로 떨어지는 것처럼 한없이 작아졌다. 나는 내가 아는 사람들이 알고 있는 바로 그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내가 모르는 수많은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홀가분했다.
"자기야, 여기 와봐!"
좋은 여행자는 매순간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냥 알게 되는 것 같았다. 한계를 실험하고 극한에 다다르며 남김없이 성취하는 것만이 훌륭한 여행은 아니었다. 좋은 여행자는 틱낫한 스님의 말처럼 자신의 발밑에 떨어진 행복부터 주워 담을 줄 아는 자였다. 목표나 계획을 떠난 여행은 더욱 그랬다. 아내는 여행 도중 수시로 멈추어 발밑을 보았다.
뭐해? 와봐! 뭔데? 어느새 아내는 쪼그려 앉아 무언가를 열심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나를 부를 때마다 나는 가지 않았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가끔 가보거나 잠시 뒤에 전해 들으면 별 것 아니었다. 민들레거나 이름 모를 풀꽃이었다. 불가사리거나 이름 모를 조개 껍데기였다. 그 자리마다 어김없이 야아- 하는 아내의 탄성이 흘러나왔다.
먼 바다와 길 끝을 보는 게 나의 여행이었다면 아래를 굽어보고 땅을 바라보는 것이 아내의 여행이었다. 아내는 발밑 세계를 잘 살폈다. 문득 서거나 허리 굽히거나 쪼그려 앉으면 그 순간 그 자리에서 묵상을 했다. 아내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잘 알았다. 개 만나면 쓰다듬어주고 놀만한 곳 나타나면 놀고 한잠 자고 가도 될 때면 벌렁 누웠다.
소소하고 시시하고 사사로운 것들로 여행은 풍요로웠다. 인적 없는 작은 바다가 나타나면 아내는 신발과 양말을 벗고 바닷물에 발을 적셨다. 아내와 동행했던 3차 바바 여행까지 나는 고작 서너 번 바다에 발을 담갔을 뿐 대부분은 바닷물에 들어간 아내를 지켜보기만 했다. 혼자 여행한 4차부터 나는 슬그머니 아내 흉내를 냈다.
아내가 탔을법한 그네를 만나면 앉아 엉덩이를 흔들어보았다. 아내가 배낭을 배게 삼아 누웠을법한 언덕에 오르면 조용히 누웠다. 아내가 좋아한 아담한 바다를 보면 신발과 양말을 벗었다. 눈 아래로, 몸 밑으로, 허리 아래로, 발밑으로, 발바닥 닿는 곳으로, 거기 있는 그 순간을 생각했다. 이 여행이 나에게 해주려던 것이 무엇인지 비로소 알 것 같았다.
아내는 말했었다. 자신은 칭찬받아야 하고 사랑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모습대로 자란 것 같다고. 그것이 자기가 아니라고 안 것은 대학 졸업 후 대기업에 들어간 다음이라고 했다. 아내는 회사를 그만 두었다. 동료도 가족도 친구도 납득할 수 없었던 아내의 여행은 그때부터 여성주의 신문사로 대안학교로 국제교류기구로 이어지다가 나에게 왔다.
나만큼이나 아내는 수많은 부류의 사람을 만났고 다양한 일을 겪어보았다. 나와 살아보겠다고 생각한 다음 아내가 결심한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자신의 몸이 말하는 것을 주의 깊게 듣겠다는 것. 아내는 요가를 시작했다. 다른 하나는 남에게 피해나 상처주지 않는 방법으로 살겠다는 것. 아내는 이해관계로 갈라서는 일은 하지 않으려고 했다.
처음에는 그것이 방어적이고 소극적인 처신이라고 생각했다. 틈만 나면 이 일 해보라고 저 일 어떠냐고 제안했지만 허사였다. 나는 자꾸 저지르려고 하는 사람이었고 아내는 가급적 저지르지 않으려는 사람이었다. 나는 보태려고 들었고 아내는 빼내려고 했다. 어느 날 아내가 내게 말했다. 남 힘들고 어지럽히지 않는 게 평화야.
결혼 서약서에는 아내의 바람대로 매일 아침 떠오르는 해를 보며 그날 하루의 삶에 감사하겠노라고, 매일 밤 별을 보면서 우리와 마음을 나눈 분들을 기억하겠노라고 쓰여 있었다. 우리는 결혼식에서 서약을 낭독했다. 아내는 그렇게 살려고 했다. 나는 온갖 일에 빠져 지냈다. 매일 아침 해가 떴는지 별빛은 비췄는지 알지 못했다.
결혼 후에 아내는 틱낫한 스님의 플럼 빌리지에서 만났던 이들과 모임을 가졌다. 음식 잘 먹고 마음 잘 쓰고 잠 잘 자는 모임이었다. 아내는 하루나 이틀씩 사찰에 갔다. 휴일에는 빌빌대는 나를 보다가 "넌 쉬는 게 좋겠다" 하고 혼자 갔다. 일주일 가량 단기 출가를 다녀온 그날 밤 나는 알았다. 아내의 여행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
내 한 몸부터 숨 잘 쉬는 거, 그 상태로 너 만나는 거, 누굴 만나든 그 기운이 전해지는 거, 그렇게 살자. 요가하자고 안 할게. 절에 가자고도 안 할 거야. 너는 너대로 숨 잘 쉬면서 살아. 부부라도 서로 구속하는 건 안 좋아. 서로 다치지 말고 살자. 그날 밤 이야기는 아내의 온아한 표정과 음성 덕분에 시종 따듯했으나 동시에 서늘하기도 했었다.
"또 배고파?"
아내와 동행하는 동안 밥상은 늘 푸짐했다. 혼자 여행할 때면 컵라면이나 설렁탕이 전부였다. 아내가 없었다면 바바 여행은 음식과 무관했을 뻔 했다. 아내는 무슨 음식이든 씩씩하고 정성껏 먹었고 나는 허기만 감추면 그만이었다. 아내는 내가 남긴 음식도 깨끗이 해치웠다. 그런 아내는 식사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건만 시시때때로 배고프다고 노래했다.
나 배고파-. 아내는 아프거나 힘들어서 못 걷겠다고 말한 적은 일절 없었으나 배고파서 못 가겠다며 농 섞인 투정은 자주 했다. 밥 줘라! 밥 줘라! 하고 내 등에 대고 외치기도 했다. 한 번은 식당을 만나지 못해 내처 가다가 어느 순간 해안도로 난간에 널려있던 미역을 양손에 쥐고 맛있게 빨아먹으며 걷는 아내를 보고 한참 웃었었다.
자주 배고픈 아내 덕에 우리는 이틀 건너 밤바다 회나 고기를 먹었고 술을 마셨다. 다투거나 몸 고되거나 기분 추레한 날이면 보상이 필요했다. 나는 깨작깨작 먹었으나 아내와 같이 먹는 것은 다 좋았다. 푸지게 먹고 술에 취하면서 자신과 가족과 관심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그랬었구나, 정말 좋았겠다, 많이 슬펐구나, 지금도 미워?
아내와 함께한 3차 바바 여행까지 그 37일 동안의 식사 때문에 우리는 진짜 식구가 될 수 있었다. 정작 결혼해 한 집에 살면서는 따로 밥 먹는 일이 잦았다. 여행길 밥상 자리가 나았다. 마주앉아 넉넉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술잔을 기울이며 오래 이야기 나누는 것. 그런 자리가 부부의 연을 맺은 우리 사이에 앞으로 얼마나 더 남아있을까 싶었다.
혼자 여행할 때 식당에서 밥 사먹고 편의점에서 요기할 때면, 혼자 사는 동안 늘 그랬는데도, 꽤나 허전했다. 연애만 해도 족한데 굳이 한 집에 사는 것은 아내 말대로 날마다 같이 밥 먹자는 뜻이었다. 내 앞에서 맛있게 밥 먹고 달떠서 술 마시던 아내의 얼굴이 참 예뻤다. 같이 밥 먹었던 그 밤마다 나도 아내 앞에서 예뻤을 것이다.
그런 날이면 대화는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밤늦도록 아내와 나는 그날그날의 연인이 되었다. 피로연을 마치고 한 방으로 들어가는 남녀처럼 낯선 잠자리에 함께 들었다. 가끔은 몸이 달아올라서 창문을 열어두었다. 그 하룻밤이 너와 나의 전부인양 서로를 바라보았다. 눈빛이 영글고 창문 너머로 바람 불어오면 우리는 사랑이 고팠다.
여행은 지나간 일에서 자유로운 것이다. 아직 오지 않은 운명을 궁금해 하지 않는 것이다. 그 순간 그 자리 그 풍경 그 존재를 만나는 일에만 충실하면 여행은 충만했다. 오직 현재에 몰입하면서 흔적 남기지 않고 여기에서 여기로 가볍게 이동하는 것. 그 여행은 마음의 독을 쉬이 빼내고 금세 치유와 회복의 새살이 돋아나게 했다.
목회의 길을 가느라 어머니를 모시고 살 수 없었던 형에게 가졌던 잠깐의 원망. 어머니에게 거만하게 굴었던 두 매형에 대한 은근한 원망. 형제자매 중 경제적으로 가장 넉넉하면서도 자식들 일류 만드느라 가장 쪼들리는 것처럼 아등바등 살아가는 큰 누나의 삶에 대한 비난. 어머니에게 못되게 굴었던 이모에 대한 분노 등. 미워하는 갖은 마음이 떠올랐다.
그런 감정들이야 나이를 먹으면서 점차 둔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까먹어서 아예 없었던 것처럼 이제는 상기할 일도 없다고 여겼는데, 여행을 하는 동안 이상하게도 하나하나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무엇 때문에 기억나는지 몰랐다. 그보다는 그처럼 오래된 감정들이 지금까지 생생하게 느껴진다는 것이 놀라웠다. 내가 정말 그랬었나 싶었다.
계기랄 것도 없었다. 해안도로를 따라 바다와 나무와 산과 바람을 느끼며 자연과 벗하는 여행이 하루하루 계속될 뿐이었다. 그 나날은 그저 그 순간과 그 자리에만 전념하며 무상무심으로 터벅터벅 걷는 여행이었다. 마음 수행도 아니고 국토 순례도 아니며 극기 훈련도 아닌 그냥 여행이었다. 그런데 속에서 꾸물꾸물 저절로 나오는 것들이 있었다.
한 번 마음의 그릇에 담아 두었던 독한 것들은 언젠가는 삐죽삐죽 나오기 마련인 것 같았다. 어쩌지 못해 묵과하거나 무시했던 것, 참기만 하다가 꿀꺽 안으로 삼켜버렸던 것, 그럴 만 했다고 적당히 정당화하면서 봉인하고 말았던 것, 사는 게 다 뻔뻔한 것이라고 치부하며 방치해두었던 것들이 마치 비좁아서 더는 못 있겠다는 듯 빠져나왔다.
화해라고 말하기엔 민망했다. 용서라는 말은 더 맞지 않았다. 그것들은 내 속에 있기엔 부적절한 이물질이었다는 듯 나에게서 나와 바람처럼 먼지처럼 흩어졌다. 나는 목이 말랐고 더 자주 물을 마셨다. 내 속이 조금씩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점점 더 자유로웠다. 바다를 떠나 서울에 왔을 때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다 해도 나는 좋았다.
다 거짓말 같아
1차 바바 여행을 마치고 집에 왔을 때 TV 뉴스는 4명의 청년이 동반 자살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정동진 어느 여인숙이었다. 아내와 하룻밤 묵었던 그곳에 그들은 불과 닷새 뒤에 도착한 것이다. 그들은 그곳에서 생애 마지막 밤을 보내고 한날한시에 다 같이 삶의 여정을 마무리했다. 사연은 알지 못하나 좀 더 여행을 계속했더라면 싶었다.
5차를 끝으로 바바 여행을 마치자 얼마 뒤 장마와 태풍이 왔고 바닷가 곳곳이 큰 난리가 났다. 아내와 나는 우리가 가보았던 그때 그곳을 뉴스에서 보았다. 해안도로는 침수되고 가옥은 파손되었으며 파도는 미친 듯이 울부짖고 있었다. 그해에도 성금 모금과 복구 작업이 시작되었다. 도시 사람들은 또다시 바다로 한여름 짧은 휴가를 떠났다.
그처럼 여행은 서울 집으로 와서 맞이한 7월 어느 날부터 갑자기 비현실이 되었다. 1차 바바 여행을 마치고 집에서 본 뉴스처럼 바닷가를 거닐다가 중간 중간 서울로 돌아올 때마다 현실과 비현실을 넘나들고 있었다. 여행을 망설이던 3월 어느 날로 복귀했다가, 달력에서 도려낸 것처럼 4월부터 6월까지를 건너뛰고서, 느닷없이 7월이었다.
나는 여행 중에 찍은 2000컷 정도의 사진 중에서 1000장 가량을 인화했다. 사진들은 내 방을 가로지르며 치렁치렁 걸어둔 다섯 가닥의 줄에 어지럽게 널려있었다. 때나 장소, 사연에 대한 기록이나 메모 따위가 일절 없는 사진들을 보니 어찌 수습해야 할 지 몰랐다. 사진들은 어쨌거나 그때 그곳에 당신이 있었다는 것만을 주장하고 있었다.
꽤 한참을 그렇게 놔두었다. 어느 날 아내가 방에 들어와 사진을 보다 혼잣말을 했다. 다 거짓말 같아, 아주 오래 전 옛날 같아. 사진들로 혼잡한 방은 티베트 경문을 적어둔 오색 천깃발 룽다(lungda) 같기도 했다. 히말라야 사람들은 산언덕과 산간 마을에 룽다를 걸어두고 바람에 닭아 없어질 때까지 놔둔다고 했다. 나는 사진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사람은 필요한 것을 찾기 위해 온 세상을 돌아다니지만 결국 집에 돌아와서 그것을 찾아낸다고 어느 소설가는 말했다. 여행은 자신이 누구인지, 얼마나 특별한 존재인지, 얼마나 아무 것도 아닌지, 그 모든 질문을 결국은 집까지 가지고 돌아와서 얼마간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이었다. 집으로 귀환했으나 당분간 여행은 좀 더 계속되고 있었다.
늘 달고 살았던 자신의 그림자를 용인하기 위해, 자신의 발밑에 나뒹구는 복을 주워 담기 위해, 누군가를 향한 마음의 독을 빼내기 위해, 여지저기 돌아다니다가, 집으로, 자신으로 복귀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제 자리로 돌아왔다. 여행은 성장 코스나 성공 스토리는 아니었다. 그것은 성찰의 시나리오고 성숙의 기적이었다.
한동안 방 안에 내걸렸던 1000여장의 사진들은 수차례 자리 바꿈을 반복했다. 해서 한편엔 바다 사진들이 모여들고, 저기에는 길 사진들이, 그 위로는 사람들이, 그 옆에는 개들이, 그렇게 여행과 집 사진들도 위치를 잡았다. 더불어 나의 여행 이야기도 갈피를 잡아나갔다. 생략되고 강조되면서 기억의 저장고에 서로 다른 이름표를 달고 배치되었다.
그 모든 일은 집에서 내 방에서 이루어졌다. 그새 짧은 가을이 지나갔고 겨울 같지 않은 겨울이 왔다. 아내는 전과 다르지 않게 요가를 했고 불교 공부를 했으며 플럼 빌리지의 친구들을 만났다. 나 역시 전과 다를 바 없이 일에 빠져서 아침 해가 뜨는지 밤 하늘 별은 빛나는지 모르고 살았다. 여전히 아내와 나는 집에서 같이 밥 먹는 일이 적었다.
하나 우리는 더이상 여행을 떠나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아무 때고 여행 도중의 그날 그곳 그 순간 그 느낌으로 불쑥 돌아가곤 했다. 각색된 기억이고 때로는 전혀 다른 이야기와 뒤섞여 편집되기도 했겠지만, 그 때문에 아내와 종종 설전을 벌이기도 하고, 그것은 내 몸과 아내의 몸에 따로 또 같이 새겨진 문신처럼 남아 있었다.
방 안 가득했던 사진들을 청소하는 날. 가위로 줄을 잘라내고 사진을 한 장 한 장 손으로 떼어 냈다. 차곡차곡 개켜서 쌓아두는데 아내가 사진 한 장을 집어 들었다. 야, 이거 정말 맛있었지? 아내가 내민 사진에는 아담한 밥상이 있었다. 순간 나도 모르게 군침이 돌았다. 내침 김에 우리는 정리해놓은 사진 더미 속에서 몇 장의 사진을 더 빼냈다.
초보 여행자들이 뽑은 베스트 음식 4
1. 쑥빵, 옥수수빵, 커피빵. 색깔별로 한 개씩 먹었다. 갓김치 얹어 먹었다. 동동주 한 사발 들이켰고 식혜 한 컵 마셨다. 색색의 빵 때문에 맛만 보려다가 아예 배부른 식사를 하고 말았다. 정말 맛이었다. 돌산도 정상에 올랐다가 내려오는 길에 만난 노점. 처음엔 먹을까 말까 꽤 망설였다.
2. 막국수와 시골 두부와 동동주 한 사발이 소담하고 정갈하게 차려진 점심 밥상. 재료의 맛을 누르지 않는 겸손한 간 때문에 우리는 감격하며 싹싹 먹었다. 화마가 휩쓸고 지나간 산들은 시커먼 재로 변해 있었는데 식당은 그 언덕에 있었다. '범바우 막국수' 집, 양양에 있다.
3. 라면 한 그릇과 밥 한 공기와 무김치 그리고 나물 한 접시. 간단히 요기할 생각으로 그렇게 주문했더니 아주머니는 2인분으로 적을 텐데 하면서도 금세 상을 내줬다. 절벽 아래로 바다를 내려다보는 평상에 앉아 기막힌 아침 식사를 했다. 다랭이 마을에 있는 '해안의 집'이다.
4. 국 한 그릇과 김밥 한 접시.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식당을 찾다가 여기까지 온 김에 굳이 그 집을 찾아가서 먹겠다고 한참을 수소문해 들어간 식당. 통영에 있는 '삼대 충무할매김밥'.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나왔다. 마침내 원조의 맛을 보는 순간 입은 심심하기만 했다. 그래서 더 좋았다.
덧붙이는 글 | 이 연재글은 6월 말 도서출판 샨티에서 <아내와 걸었다, 바바!> 제목으로 출간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