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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궁이에 불을 때시는 어머니. 수 십년 만에 아궁이 불을 땐다. 뭔가 의미있는 노동을 한다는 자부심을 드리기 위해서 계획을 세웠던 일이다.
아궁이에 불을 때시는 어머니. 수 십년 만에 아궁이 불을 땐다. 뭔가 의미있는 노동을 한다는 자부심을 드리기 위해서 계획을 세웠던 일이다. ⓒ 전희식
똥 사건은 어머니는 물론 내게 커다란 충격을 줬지만 액땜이 된 것인지 그 후로는 그런 일이 안 생겼다. 유언까지 듣게 되었던 똥 사건 때는 겁이 나서 내 생활계획을 바꿔야 하나 하고 고민도 했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바꾸지 않기로 했다. 다만, 계획을 좀 더 세밀하게 다듬기로 했다.

어머니랑 지내기 위한 내 생활계획은 1년여의 준비를 거친 것이다. 제일 큰 준비는 어머니 몸 상태에 맞게 집을 뜯어고치는 것이었고 그 다음이 어떻게 살 것인가였다. 몸은 물론 정신도 온전치 못하신 어머니랑 잘 살기 위해서 노인병원에 가서 노인 돌보기 자원봉사도 했고 전문가나 책을 통해 늙음과 노인에 대한 공부도 했다.

생활계획은 새로 배우고 익힌 노인 돌보는 기술이나 지식에 농가생활과 명상이라는 내 방식을 결합하여 만들었다. 어머니의 존엄성과 존재감을 높이는 것을 목표로 했다. 집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 무력한 존재가 아니라 다른 사람 못지않게 어머니도 잘 할 수 있는 일을 하게 하는 것이었다.

어머니를 확실한 집안 어른으로 대하고 하는 일마다 일일이 알려드리고 허락을 받아 했다. 어떤 경우에도 말을 놓지 않고 존칭을 썼고 집을 드나들 때마다 큰절을 올렸다. 요양시설에서는 노인들이 종이접기나 점토놀이를 하지만 어머니는 소일거리가 아닌 생산적 노동을 하도록 했다. 처음 시도한 것이 청국장 만들기였다.

노동과정도 어머니가 주도하도록 했다. 내가 아는 것도 하나하나 어머니의 허락을 받아가면서 했다. 콩을 물에 얼마동안 불려야 하는지부터 다 뜬 청국장을 절구에 넣어 찧고 마늘 다지는 것이나 죽염 넣는 양도 다 어머니가 결정하도록 하였다. 이 계획은 매우 치밀했지만 여러 군데서 빗나갔다.

하룻밤 콩을 물에 불려서 어머니에게 보여 드렸더니 "됐다!"고 하시면서 '솥에 넣고 삶아라'가 아니라 '가자. 가서 삶자'였다. 이게 무슨 소린가 하고 어머니 얼굴을 쳐다보았다.

"삶아야 할 거 아이가? 콩이 끓으믄 실실 굼벵이 뒹둘득끼 장작을 불 안 끄질 망큼만 대 놓는기다."

그러면서 그것은 당신이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마치 늘 하던 일 하려는 것처럼 말했다. 뭔가 새로운 고비에 이르렀다는 직감이 왔다. 어머니 신발을 신겨 드리고 마루에서 부엌으로 가는 흙바닥에 가빠를 깔았다. 거침없이 어머니가 마루 아래로 내려앉았다. 땅에 몸을 끌면서 앉은 채 부엌으로 가다가 문턱에 걸렸다. 엉덩이가 반 뼘 남짓한 부엌 문턱을 못 넘고 걸린 것이다.

어머니는 필사적이었다. 한쪽 무릎을 문턱에 걸치고는 상체 무게를 앞쪽으로 왈칵 쏠리게 하면서 한 쪽 엉덩이를 문턱위에 올려놓는데 성공했다. 그렇게 문턱을 넘어갔다. 어머니는 모르고 있었지만 왼쪽 발 복숭씨가 까져서 피가 나고 있었다. 나는 모른 척했다.

아궁이 앞으로 가서 자리에 앉을 때만 겨드랑이를 껴서 도와드린 것 외에 아무것도 도와주지 않았다. 평생 구들장만 지고 살 줄 알았던 어머니에게 기적이었다. 들떠 있는 게 역력했다.

"인자 불 부치야지. 내가 불 사르까?"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한국농어민신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치매#어머니#똥 사건#존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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