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옥 기자]
#장면1 : 맞벌이 하는 큰아들 부부의 아이를 2년째 맡아 키우고 있는 박아무개(64·서울 갈현동)씨는 최근 고민이 생겼다. 손자를 돌보기 시작한 이래 허리에 무리를 느껴왔는데 얼마 전 들른 병원에서 디스크 판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친구들은 때가 되면 여기저기 놀러 다니느라 바쁜데 자신은 육아 때문에 그러지 못하는 것도 스트레스다. 그러나 하루빨리 집을 장만하겠다며 밤낮없이 일하는 큰아들 내외를 보면 네 자식은 네가 키우란 말이 선뜻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장면2 : 최문자(61·경기도 파주시)씨는 시집간 큰딸에게 외손녀를 더 이상 책임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외손녀를 돌보는 일이 보람차긴 하지만, 아이를 맡겨놓고 시시콜콜 잔소리를 해대는 딸에게 서운함을 많이 느꼈기 때문이다. 또 막내아들이 큰딸과 마주칠 때마다 "늙은 부모 고생시키면서 왜 그리 말이 많냐"고 대거리를 해대는 바람에 자칫 형제 사이가 틀어질까 걱정됐다. 차라리 자신이 '나쁜 엄마'가 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황혼 육아' 때문에 정신적·육체적 스트레스를 호소하는 노인들이 늘고 있다.
요즘의 부모들은 손자·손녀를 돌보지 않는다고들 하지만, 영유아를 둔 젊은 맞벌이 부부의 수요만큼 보육시설이 갖춰져 있지 않아 여전히 혈연 육아에 의지하는 비율이 높기 때문이다.
실제로 노동부가 지난 2005년 5월 '일하는 엄마의 영아보육 실태'를 조사한 결과 직장인의 70.9%가 부모에게 아이를 맡기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보육시설(15.3%)이나 가사 대리인(9.4%)을 통한 양육과 비교할 때 압도적인 수치다.
부모에게 양육을 맡기는 가장 큰 이유는 '신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출산휴가 직후부터 친정 부모에게 아이를 맡기고 있는 김소영(32·서울 신당동)씨는 "그나마 환경이 나은 국공립 시설은 들어가기가 힘들고, 민간 시설에 대해선 좋지 않은 얘길 너무 많이 들었다"며 "죄송한 마음이 없진 않지만 그래도 부모님이 가장 믿음직하다"고 말했다.
비용이 절약된다는 점도 혈연 육아를 선호하는 이유 중 하나다. 여성가족부에 따르면 맞벌이 부부는 2000년 26.7%에서 2004년 33.1%, 2006년 43.9%로 크게 늘었다. 문제는 맞벌이라 할지라도 한 달에 100만원씩 하는 베이비시터를 쓰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부모에게 아이를 맡기는 경우 한 달 육아 비용은 48만2000원 수준인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자식들의 이 같은 입장을 고려한 부모들의 황혼 육아가 여러 가지 문제를 낳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가장 큰 것이 육체적 건강의 문제다. 서울의 한 디스크 전문병원에 따르면 하루 150여명의 노인 외래환자 중 50명 정도가 육아와 직·간접적으로 관계된 원인에 의해 디스크 진단을 받는다고 한다.
미국 하버드대 연구팀이 4년 동안 일주일에 9시간 이상 손자·손녀를 돌보는 60살 전후의 할머니 1만3392명의 심장병 발생률을 조사한 결과, 아이를 키우지 않은 할머니들에 비해 55% 이상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육아에서 받는 만성적 스트레스가 원인이었다.
전상일 한국환경건강연구소 대표는 웹진 <환경과 건강 가제트>에서 "노인들의 황혼 육아 피해를 줄이려면 이들의 건강 상태와 생활 습관에 맞춰 하루 일정 시간만 육아를 부탁하고, 그 외 시간엔 운동이나 취미생활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노인들의 혈연 육아가 한국 사회에서 불가피한 보육의 한 형태인 만큼 제도적인 지원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높다. 2세 미만 자녀를 둔 취업 여성을 위해 가장 필요한 보육정책을 묻는 노동부 설문(2005년)에서 전체 응답자의 69.8%는 "부모·가사 대리인에게 자녀를 맡겨도 보육비를 지원해야 한다"고 응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