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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집 <미정> 중 일러스트
단편집 <미정> 중 일러스트 ⓒ 변병준
엄마를 버리고 이모를 택한 아버지(<프린세스 안나>), 자신을 구하려다 죽어버린 첫사랑(<연두, 열일곱>). 피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그들은 무기력하다. 비타민제로 자살을 연습할 수는 있어도(<싸나이가 울다>) 삶을 연습할 수는 없다. 이미 잘 알고 있다. 이 지구가 내 작은 커터 칼에 쪼개져버릴(<신일맨션 202호>) 리가 없음을.

차갑게 둥둥 떠다니는 삼백안의 초상들, 철저히 파괴되고 고통 받는 그들이 종이 위로 툭 멍한 시선을 던진다. 무엇을 보는지,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이유는 지금 우리도 그렇기 때문이리라. 변병준은, 그가 그려낸 차가운 그곳은 여기와 꼭 닮은 잿빛을 하고 "아직은 희망을 말할 때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상처'를 그린다

변병준 작가
변병준 작가 ⓒ 홍지연
"(취향이) 소녀 쪽이어서 상처 이야기로 갈 수도 있고, 상처 쪽을 좋아하니까 소년 보다는 소녀 이야기에 더 다가가는 것일 수도 있고. 무엇이 시작인지는 모르겠는데 그 두 개가 서로 같이 가고 있어요."

작품 속 주인공이 거의가 소녀인 것에 대해 변병준은 이렇게 말한다. 한창 준비중인 단편 <동화>(冬火) 역시 소녀가 주인공. 이 '한겨울에 난 불'은 대구지하철참사를 소재로 윤인완 작가가 스토리를 썼다. <영챔프 플러스>에 실린 후, 단행본(<데자부2>)으로 묶여 나올 예정이다. 대략 1년만의 작품이다. 뜸했던 만큼 변 작가의 표정도 조금은 쑥스럽다.

앞 보다는 뒤를 돌아보는 성격 탓인지 변병준의 만화 속 인물들도 하나같이 과거에 얽매어 있다. 각자의 생채기들에 점령당한 인물들은 그 자체로 슬픔 혹은 비참함을 드러낸다. "다 읽고 났을 때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고 그저 캐릭터의 감정 하나가 남기를 바랍니다."

그는 왜 이렇게 상처에 대해 골몰하는 것일까.

"고난당하는 사람을 좋아해요. (사람이) 언제 감정이 격해지는가하면 고난 받을 때거든요. 여자친구가 전화로 헤어지자고 하는데 그 얘기를 꼭 만나서 듣고 싶은 느낌 아세요? 고통스러울 것을 알면서도 기어이 만나야 하죠."

속고 속이고 짓밟히고, 끝내 부서지는 인물들. 그는 허무하고 속절없는 구원에 기대기보다, 거짓된 희망에 속기 보다는 차라리 '만만치 않은' 세상살이에 고통스러워하는 인물들을 덤덤히 그린다. 그게 더 진짜 삶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청년'이나 '청춘'이라는 말보다 '소년', '소녀'라는 말을 더 좋아하는 것도 그 안에 담긴 무책임한 희망의 느낌이 싫어서일 게다.

지극히 현실적인 배경이지만 현실이 아닌 듯한 몽환적인 분위기. 변병준 그림의 큰 장점이다. 탁월한 터치로 구성한 화면은 인물은 물론 배경까지 천천히 훑게 하는 힘을 갖고 있다. 펜 대신 붓을 쓰기 시작하면서 그의 그림은 더욱 큰 매력을 발하게 됐다.

그는 무척 사진을 많이 찍는데 <달려라, 봉구야!>의 바닷가와 같은 풍부한 배경도 사실 그의 이런 수집광적인 면모에서 탄생했다. 사람이든 장소든 한두 번이 지나 익숙해지면 반드시 사진으로 남기고, 그 방대한 자료로 이야기를 시작한다고.

진짜로 잘하고 싶은 것은 스타일, 연출이다. 반복된 자기만의 패턴에 갇히지 않고 독자를 천천히 끌어당기는 '변병준식 스타일'이 갖고 싶은 것.

"이야기를 그림으로 표현하고 싶다는 것은 사실 연출하고 싶다는 거잖아요. 가급적이면 오랫동안 독자를 잡아두고 싶어요. 앞으로 쭉쭉 넘어가지 못하게 하는 만화, 정말 빨리 넘기는 만화보다는 천천히 계속해서 오래 볼 수 있는 작품을 그리고 싶어요."

"만화가 주는 엄숙함 알았다"

단편 <너의 노래>
단편 <너의 노래> ⓒ 변병준
만화가로 살겠다 마음을 굳힌 것은 군입대 전 조운학 화실에 7개월간 머무르면서였다. 그는 그곳에서 '별천지' 세상을 엿보고 말았다. 열악한 환경에 아랑곳 않고 수십 명의 사람들이 다닥다닥 책상 앞에 붙어 밤새 작업하던 모습을 결코 잊을 수 없단다.

"와, 진짜 멋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노동이 주는 엄숙함 같은 것을 느꼈어요. 그건 지금까지 제가 만화를 그리는 이유 같은 거예요."

이후 변병준은 1995년 <그해 여름날의 코미디>로 '투웬티세븐' 만화대상 신인만화대상을 받으며 데뷔, 장편 <달려라, 봉구야!>와 <프린세스 안나>, 단편집 <첫사랑>과 <미정> 등 지금까지 4권의 책을 냈다.

이 중 두 편의 장편은 프랑스에서도 출간됐는데, 사실 그에 쏠리는 유럽권의 관심이 비상하다. 프랑스 현지 한 매체는 그의 책을 소개하면서 "최초로 '작가적인' 진정한 만화가 불어로 번역됐다"고 평하기도 했다.

특히 지난해 3월부터는 한 프랑스 작가와 공동작품(<첫눈>)을 작업중에 있다. 모파상적 운명론을 담은 이 작품은 도시의 젊고 발랄한 여인이 부유하고 과묵한 시골 농장주에게 시집오면서 벌어지는 비극을 그린다.

"더 큰 이야기로 더 많이 다가서고 싶다"

<달려라, 봉구야!> 한국판(왼쪽)과 프랑스판
<달려라, 봉구야!> 한국판(왼쪽)과 프랑스판 ⓒ 변병준
10년이 넘는 시간, 크고 작은 상을 받으며 변병준은 자신의 이름을 알려가고 있다. 1997년 동아-엘지 국제만화페스티벌에서 장려상을, <프린세스 안나>로는 2000년 문화관광부가 수여하는 '오늘의 우리 만화상'을 받았다. '망가제국' 일본의 쇼카쿠칸 출판사가 선정하는 젊은작가 콩쿨 장려상(2001)도 빼놓을 수 없다.

그러나 아직 그의 이야기는 짤막하고 단순하다. 때문인지 그는 스스로 부끄러움을 감추지 못한다. 진솔함을 무기로 한 작가주의를 내세우는 가운데 자신의 이야기가 '사소설'처럼 돼버린 게 아닐까. 작은 이야기에 갇히기보다 큰 이야기를 써낼 수 있는 작가가 됐으면, 그리하여 더 많은 독자를 만났으면 한다는 마음 속 소망을 밝힌다.

"저도 그렇고, 사소설 비슷한 만화가 많아진 것 같아요. 특히 젊은 작가들이 작가주의를 표방하는 가운데…. 박건웅씨처럼 진짜 큰 이야기를 다루는 젊은 작가가 없다는 것. 물론 저의 지금 코드는 제가 좋아 시작한 거지만, 이제 조금은 벗어나고 싶어요. 더 많은 독자를 만나기 위해."

혹자는 상업주의와 작가주의에 한 발씩 담근 그에게서 오히려 새로운 가능성이 발견된다고 했다. 그의 무엇을 그리 높이 치고 있는지 저절로 느껴지는 대목이다.

"1년에 한 권 정도는 책을 내자는 목표를 세웠는데 지금 10년 됐는데 4권이 나왔으니까 앞으로 더 부지런히 해야죠. 정말 열심히 살려고요. 더 많은 독자와 만나기 위해 해야 할 일이 있잖아요. 꾸준히 한다거나 좀더 명확한 일을 한다거나…. 잘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앞으로 그렇게 하고 싶어요."

바쁜 마음을 지그시 누르며 그가 쾌활하게 말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 CT News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변병준#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프린세스 안나#달려라 봉구야#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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