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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도

6월 7일 오후 2시, 서울 서대문 독립공원 독립관 강당에서는 여천홍범도 장군 기념사업회(이사장 이종찬)가 주최한 제87주년 봉오동전투 전승기념식이 열렸다.

이 날 기념식장에는 이봉춘 서울지방보훈청장, 남만우 광복회 사무총장, 김자동 임시정부기념사업회장, 함세웅 안중근기념사업회장, 우원상 대종교 선도사, 이기형(전 몽양 여운형 선생 비서) 시인, 김창 심산(김창숙 선생)아카데미 상임고문, 차영조 효사모(효창원을 사랑하는 모임) 대표, 신민부를 창설한 김혁 장군 손자 김진도 선생, 조만제 삼균(조소앙 선생)학회장, 홍만의 남양홍씨 종친회장, 특히 멀리 밀양에서 올라온 밀양문화원 손정태 이사와 약산 김원봉 선생 동생 김학봉 여사 등이 참석했다.

이 날 참석한 내빈 대부분은 일제 강점하 조국광복의 제단에 몸과 목숨을 바친 선열들의 유족이나 후손 분들로,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 길이 빛나는 최초의 대규모 대일 독립전 승첩 봉오동 전투를 기렸으며, 포수에서 독립군 사령관으로 이름을 떨친 불세출의 영웅 홍범도 장군의 영정에 머리 숙였다.

▲ 제87주년 봉오동전투 전승기념식장 내빈
ⓒ 박도


작은 목적을 양보하는 미덕

이날 기념식에서 이종찬 이사장은 기념사를 통해 "우리 젊은이들이 남미의 체게바라는 잘 알아도, 봉오동 청산리 전투의 영웅 홍범도 장군은 잘 모른다"며 "우리에게는 일제강점하 치욕의 역사만 있는 게 아니라, 자랑스러운 영광된 역사가 있다"고 역설했다.

함세웅 신부는 "큰 목적을 위하여 작은 목적을 양보하는 미덕이야말로 순국선열에게 바치는 가장 아름다운 선물"이라고 독립유관 단체와 남북정부에게 바라는 간절한 소망을 호소했다.

기념식에 이어 동북아 역사재단 연구위원 장세윤 박사의 "봉오동전투의 역사적 의의"라는 제목의 학술강연이 있었다. 장 박사는 홍범도 장군이 무식하다는 전래의 주장을 뒤집는 주장으로 주목을 끌었는데 그 근거로 유인석 의병장과 편지를 주고받은 점, 홍범도 장군의 서신, 창의대장 홍범도 장군 이름으로 발급된 사령장의 필체로 보아 상당한 학식을 닦았다는 견해를 밝혔다.

기념식에 이은 다과회에서는 독립운동가 유족과 후손들의 화기애애한 만남이 이어졌다. 이날 주인공은 약산 김원봉 막내여동생으로 임시정부 군무부장이었던 오라버니가 여태 서훈을 받지 못했다고 눈물을 흘리자 참석한 모든 이들이 관계 요로에 진정할 것을 약속하기도 하였다. '유류상종'이라 이 날 모인 참석자들의 조상은 대부분 만주대륙에서, 상해 와 북경 등지에서 일제에 맞서 신명을 바친 피로 맺은 동지들이 아닌가. 서로 반갑게 얼싸안는 이들의 얼굴에는 뭔가 아직도 응어리진 한을 풀지 못한 안타까움이 엿보였다.

홍범도 장군은 누구인가

▲ 홍범도 장군(1912년 연해주 하바로프스크에서)
ⓒ 홍범도기념사업회
홍범도는 1868년 8월 27일(음력), 평양시 서문안 문렬사 부근 가난한 농사꾼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태어난 지 이레 만에 그의 어머니를 잃고 아홉 살 되던 해 아버지를 여의었다. 일찍 부모를 여읜 홍범도는 머슴살이, 병정, 막일꾼 등 닥치는 대로했다. 그는 공장에서 막일꾼 생활 중에 부도덕한 공장주가 품삯을 일곱 달이나 주지 않자, 그를 응징하고서는 그 길로 금강산으로 들어갔다.

그는 외금강 신계사 주지 스님 앞에서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홍범도는 수도 생활 중에 여승 옥녀와 정이 들어 뱃속에 아이까지 가지게 되었다. 그들은 옥녀의 고향인 북청으로 가고자 봇짐을 지고 금강산을 떠났다. 하지만, 원산 교외에서 불한당에게 변을 당해 홍범도는 옥녀와 생이별을 하고 방랑객이 되었다.

그는 불평등한 세상에서 남에게 천대와 멸시를 받지 않고 살아가자면, 남보다 뛰어난 재주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그는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서 사냥꾼생활로 생업을 삼으면서 사격술과 검술을 닦았다. 뒷날 일본군들이 홍범도란 이름을 듣기만 해도 간담이 오싹했던 백발백중 사격술과 신묘한 검술은 그때 익힌 솜씨였다. 홍범도의 사상과 인생길에 큰 파문을 일으킨 것은 1894년의 갑오 동학 농민전쟁과 이듬해 명성황후 시해사건이었다.

특히 일제 낭인들이 남의 왕궁을 마음대로 포위해서 명성 황후를 난도질하여 그 시신마저 장작더미에 던져 태워버렸다는 얘기를 듣고 난 홍범도는 울분이 하늘을 찔렀다. 일제 침략자들이야말로 천하에 제일가는 야수 무리로 우리 민족의 철천지원수라는 것을 똑똑히 알았다. 그는 그때부터 항일 투지가 불탔다.

1895년 10월, 홍범도는 강원도 단발령에서 만난 포수 김수협과 뜻이 맞아 항일 의병을 일으킬 것을 맹세한 뒤, 곧 무장한 일본군 여러 명을 통쾌하게 처치했다. 이를 시작으로 홍범도의 맹렬한 항일 무장투쟁이 펼쳐졌다.

일제 강압에 따라 정미 7조약이 체결된 뒤인 1907년 11월, 홍범도와 차도선은 의병대를 만들어 함경남도 후치령에서 일제 북청수비대를 습격하여 첫 개가를 올렸다. 그 뒤를 이어 홍범도 의병대는 함경남도 삼수갑산에서 일제 군경과 수십 차례나 처절한 격전을 벌여서 모두 승리로 이끌었다.

경술국치 이듬해인 1911년 봄, 홍범도는 정예부대를 인솔하여 다시 국내에 들어와서 함경북도 경원에서 일본군 수비대를 습격하여 개가를 올렸다. 또 1919년 10월에는 두만강변에서 일본군경 초소를 공략하여 70여 명을 살상하기도 했다.

홍범도 의병부대는 신출귀몰하는 전술로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했는데, 지금까지도 홍범도 장군은 우리나라 게릴라전의 비조(鼻祖)로 불리고 있다. 일제 강점기에 우리나라 독립 전쟁 효시(嚆矢)로 일컫는 1920년 6월의 봉오동전투는 홍범도 장군 지휘 아래에 이루어졌다.

홍범도 장군이 돌아가신 지 40년 후, 크즐 오르다 홍범도 묘지에는 장군의 반신 동상이 세워지고 생전에 살았던 곳은 '홍범도 거리'로 명명되었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홍범도 장군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봉오동 전투

▲ 홍범도 장군
ⓒ 홍범도기념사업회
1920년 6월 7일, 항일 명장 홍범도(洪範圖)를 사령으로 한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督軍府 :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안무의 대한국민군, 최진동의 군무도독부가 연합부대를 결성한 군단임) 부대가, 우리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하여 두만강을 넘어온 일본군 제19사단 야스가와(安川) 소좌가 거느린 부대를 참패시킨 우리나라 독립전쟁의 최초 전투다.

이 봉오동전투는 사흘 전인 1920년 6월 4일에 있었던, 화룡현 삼둔자(三屯子) 전투에서 비롯되었다. 그날 새벽 30명가량의 독립군 소부대는 국내 진공작전으로 삼둔자를 출발하여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 종성 강양동으로 가서 일제 헌병 순찰소대를 격파하고 돌아왔다.

그러자 일본군 2개 중대는 이를 보복하려고 독립군 추격에 나섰다. 이들은 두만강을 건너 삼둔자에 이르렀으나, 독립군을 발견치 못하자 그 분풀이로 애꿎은 우리 동포들을 무차별 살육했다. 이 소식을 들은 독립군은 삼둔자 서남쪽 산기슭에 잠복하고 있다가 돌아가는 일본군을 섬멸하였다.

이에 함경북도 종성군 나남에 주둔했던 일본군 제19사단은 독이 바짝 올랐다. 그들은 삼둔자 전투 참패를 설욕하고, 우리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해'월강 추격대대'(越江追擊大隊)를 편성했다.

이들 추격대대는 보병 2개 중대와 기관총소대, 헌병경찰대를 합친 혼성대대로 야스가와 소좌 인솔로 1920년 6월 6일 밤 9시부터 두만강을 건너 이튿날 새벽 3시 30분에 독립군의 근거지인 봉오동으로 쳐들어 왔다. 이런 낌새를 미리 알아 차렸던 홍범도 장군은 교전에 앞서 주민들을 산중으로 미리 대피시켜 마을을 비우게 했다. 그러고는 봉오동 상촌 험준한 사방 고지에 독립군 각 중대를 매복시켜 놓은 다음, 월강 추격대대를 이곳으로 유인하여 포위망 속에 가둬두고 일망타진한다는 작전을 세웠다.

홍범도 장군은 독립군 1개 분대를 월강 추격대대가 쳐들어오는 길목에 내보내 봉오동 골짜기로 유인케 했다. 그날 아침 8시 30분 무렵에 월강 추격대 첨병이 이 유인에 말려들어 봉오동 들머리에 이르렀다. 여기까지 온 일본군 추격대 첨병은 독립군 분대를 놓치고는 봉오동 하촌을 정찰한 결과, 독립군이 지레 겁을 먹고 죄다 북으로 도주한 것으로 여겼다.

그들은 추격대 본대를 불러서 하촌 마을을 뒤지면서 미처 대피하지 못한 노약자를 살육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들 월강 추격대는 봉오동 하촌을 실컷 유린한 다음, 오전 11시 30분에 다시 대오를 정돈하여 중촌, 상촌을 향하여 진군했다.

▲ 봉오동전적지로 지금은 저수지로 변했다. 저수지 상류가 하촌이다.
ⓒ 박도

그날 오후 1시 무렵에는 일본군 전위부대가 사방 고지로 둘러싸인 상촌 남쪽 300미터 지점까지 진출하여 완전히 독립군 포위망 속에 걸려들었다. 하지만 홍범도 장군은 곧장 사격 명령을 내리지 않고 주력부대를 묵묵히 기다린 다음 주력부대가 독립군 포위망 속으로 깊숙이 들어오자 그제야 일제 공격을 알리는 신호탄을 발사했다.

이에 삼면 고지에 매복하고 있었던 독립군들이 일제히 불을 뿜었다. 뜻밖에 기습 공격을 받은 일본군은 필사적으로 돌격해 왔다. 하지만 유리한 지형을 미리 차지한 독립군의 맹렬한 집중 사격과 수류탄 투척으로 일본군 월강추격대는 대참패를 당했다. 통쾌한 대승전이었다.그동안 일제에게 당한 치욕을 단 한 순간에 씻은 쾌거였다.

봉오동전투 전상자 피해는 독립군 일본군 양측의 주장이 엇갈린다. 비교적 객관적 자료인 당시 중국〈상해시보〉에 따르면, 독립군이 일본군 월강 추격대를 150여 명이나 사살하여 크게 이겼다고 보도했다(우리 독립군 피해 30여 명 전사).

아울러 우리나라 독립전쟁사에 가장 빛나는 1920년 10월의 청산리대첩 역시 홍범도 장군과 김좌진 장군이 주체로 쟁취한 것이다. 홍범도 장군은 일제와의 생사 결전에서 부인과 두 아들까지 잃고 혈혈단신으로 남으면서도 항일 구국 투지만은 평생토록 굽히지 않았다.

홍범도 장군은 일제에게는 '날아다니는 장군(飛將軍)'으로 저들의 간담을 서늘케 했고, 우리 겨레에게는 독립운동의 전설적인 영웅, '총알로 바늘귀도 뚫는 장군''축지법을 구사하는 신출귀몰한 명장''백두산 호랑이'등의 별칭으로 추앙 받았다.

▲ 봉오동 전적기념비
ⓒ 박도

장군의 거룩한 발자취는 조국의 산과 계곡에, 압록강 두만강 굽이굽이에, 백두산 밀림과 드넓은 만주 벌판에, 러시아 연해주와 시베리아 황야에까지 남겼다. 장군은 조국 광복을 이태 앞둔 1943년 10월 25일, 소련 카자흐스탄의 크즐 오르다에서 75세를 일기로 파란 많았던 항일 구국 생애를 마감하였다.

봉오동전투는 우리 독립군과 일본군 양측 모두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우리 독립군 측에서는 나라를 빼앗긴 10년 만에 숙원인 독립전쟁 제1회전을 통쾌한 승리로 이끌어 독립군의 사기를 크게 떨쳤다. 아울러 우리 독립군 부대간의 군사통일을 추진하였을 뿐 아니라, 병력 보충과 군비 확충에 총력을 기울일 수 있었다.

반면 일제는 그동안 얕잡아 보았던 우리 독립군의 전투력을 새롭게 평가하여 독립군을 근원적으로 토벌하기 위해 '간도지방 불령선인 초토계획(不逞鮮人剿討計劃)'을 서둘러 만들었다.

이 봉오동전투는 민족 수난을 극복하려는 한국 독립군에게 큰 광명을 주었고, 홍범도 장군은 일본군에게 무서운 대상으로 인식되어 그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떠는 독립군의 명장이 되었다.

덧붙이는 글 | * 이 기사는 장세윤 지음 <봉오동 청산리 전투의 영웅 홍범도(역사공간)>와 박도 지음 <항일유적답사기(눈빛)>에서 뽑아 썼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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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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