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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호박죽
노란 호박죽 ⓒ 정현순
"나 밥 싫어. 호박죽 줘."
"밥상 차려놨는데 죽을 달라면 어떻게 해. 저녁이니깐 그냥 밥 먹어. 차리기 전에 얘기하던지."
"난 죽 줄줄 알았지."

남편은 마지못해 밥을 먹는다. 밥을 반쯤 먹고는 다시 죽을 찾는다. 난 하는 수 없이 호박죽을 한 그릇 갖다 주었다. 눈 깜짝 할 사이에 죽 그릇을 뚝딱 비워낸다.

어제(7일) 퇴근해서 돌아온 남편이 씻는 사이 난 저녁밥상을 차렸다. 씻고 나온 남편이 식탁을 보더니 죽을 찾는 것 아닌가. 그날 아침에도 죽을 먹고 나갔는데 저녁에 또 죽을 찾는 것이었다. 죽을 좋아한다고 하지만 그렇게까지 좋아할 줄을 정말 몰랐다.

현관 앞에 있는 늙은 호박을 볼 때마다 "아무래도 저 호박 썩어서 버리겠다"하기가 일쑤였다. 그나마 날씨가 선선했을 때는 나도 썩을 거란 걱정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날씨가 더워지면서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그러던 중, 며칠 전 남편이 밖에서 먹은 점심이 체해 밥을 잘 먹지 못했다.

처음엔 흰죽을 끓여주다가 남편이 걱정했던 호박이 생각나 이틀 전 호박죽을 쑤게 된 것이다. 남편은 호박죽을 쑤던 첫날 저녁때도 두 그릇이나 먹었다. 그 다음날 아침에도 호박죽, 그날 저녁 퇴근해서 또 호박죽을 달라고 한 것이다. 죽 종류는 다 좋아하는 편이지만 호박 죽만큼은 유난히 더 좋아한다는 것을 이번에 확실히 알게 되었다.

반으로 자른 호박의 모습
반으로 자른 호박의 모습 ⓒ 정현순
호박속을 파내고 잘라서 끓인다
호박속을 파내고 잘라서 끓인다 ⓒ 정현순
이번 호박죽은 늙은 호박과 단호박과의 만남이다. 늙은 호박과 단호박을 반으로 잘라서 속을 모두 파낸다. 그리곤 크게 잘라서 물을 붓고 호박을 끓여낸다. 너무 오랫동안 놔두었던 호박이어서 인지 30분 이상 끓이니깐 그제야 조금씩 흐물흐물 해지기 시작했다. 흐물흐물 하게 끓여진 호박을 덩어리 없이 꾹꾹 눌러준다. 단호박을 넣고 끓이니 색깔이 아주 노란 것이 맛있어 보였다.

찹쌀과 맵쌀을 갈아낸다
찹쌀과 맵쌀을 갈아낸다 ⓒ 정현순
호박이 끓으면 강낭콩을 넣고 곱게 간 찹쌀을 넣고 끓여준다
호박이 끓으면 강낭콩을 넣고 곱게 간 찹쌀을 넣고 끓여준다 ⓒ 정현순
물에 미리 담가놓은 찹쌀을 카터기에 잘 갈아준다. 난 일부러 곱게 갈지 않았다. 조금씩 씹히는 맛도 괜찮다는 생각에서다. 강낭콩도 물에 한 번 삶아준다. 잘 끓고 있는 호박에 콩과 간 찹쌀을 넣고 주걱으로 잘 지으면서 팔팔 끓여준다. 주걱으로 짓지 않으면 밑에 눌러 붙을 염려가 있다. 눌러 붙으면 죽에 탄 냄새가 나고 나중에 냄비를 씻기도 힘들다.

가운데가 팔팔 끓으면 소금과 설탕을 넣고 간을 맞추어준다. 식성이 모두 다르니깐 기본적인 간만 맞추고 먹을 때 각자 입맛에 맞추어 먹게 했다. 8일 아침을 먹을 때 난 남편에게 미리 "오늘 아침은 밥이야 죽이야?"하고 물어봤다. 혼자 '설마 오늘도 죽을 달라고 하지는 않겠지'하면서. 그러나 남편은 두말도 필요 없이 "호박죽 줘"한다.

난 제법 큰 그릇에 호박죽을 주었다. 그리곤 거실에서 신문을 보고 있는데 주방에서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난 주방으로 갔다. 남편이 호박죽을 더 덜고 있었다.
"세상에나 호박죽이 그렇게 좋아?"
"이번 호박죽은 더 맛있는 것 같은데."
"응 이번에는 단호박을 같이 넣고 했거든."
"어쩐지."

따끈한 호박죽 두그릇을 먹고 출근하는 남편의 어깨에 힘이 있어 보였다. 물어보나 마나 오늘 저녁에도 호박죽이겠지.
#호박죽#호박#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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