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의 시대 80년대는 역사의 시대였다. 나는 역사강좌·역사기행·사회과학강좌·독자연찬회·독서토론회·단재상 등을 기획하고 진행하면서 모든 삶의 총체인 역사 또는 민족사에 대해 새롭게 눈뜨게 되었다. 그리고 또 다른 책을 기획하게 되었다. 그 가운데 가장 큰 프로그램이 <한국사> 작업이었다.
출판인에게 주어지는 두 과제가 있다고 나는 생각해오고 있다. 자기 민족의 빛나는 역사를 책으로 기획해내는 일이 그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 민족의 말과 글을 책으로 다듬어내는 일이다. 이 두 과제는 출판인의 사명이자 긍지일 것이다.
나는 1986년 한길사 10주년을 맞아 우리 민족사의 발전과정을 집대성하는 기획을 시작했다. 고대부터 현대까지의 한국사를 제대로 한 번 만들어보자! 진단학회와 국사편찬위원회 등이 기획한 큰 한국사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대부분이 근대 또는 일제시대 초반쯤에서 중단되었다. 이데올로기의 갈등과 국토와 민족의 분단으로 역사까지 분단되었다. 역사의 분단은 온전한 한국사 서술까지도 어렵게 만들었다. 국사편찬위원회와 같은 국가조직과 달리 자유롭게 기획할 수 있지 않겠는가.
자주독립 민족국가로 존재·발전하기 위해서는 우리 민족사의 전개과정을 총체적으로 담아내는 한국사가 진실로 요구되는 터이고 우리 출판사가 그걸 출판해낼 수 있다면 빛나는 우리의 긍지가 아닌가 말이다.
과연 제대로 된 큰 한국사를 우리가 해낼 수 있을까? 그래도 해보자! '새로운 한국사'를 만들자! 나는 스스로에게 마취를 걸고 한국사 작업에 나섰다. 주변의 한국사학자들과 예비대화를 하고 편집위원회를 구성했다.
173명이 집필한 <한국사>, 8년 만에 완성
우리의 <한국사>는 달라야 한다. 편집위원과 필진들의 구성부터 '새로운 연구자들'로 구성되는 것은 당연했다. 우리 국가사회의 민주화와 민족의 통일을 소망하는 연구자들로 구성되어야 했다. 이것이 내가 바라는 '한국사관'이고 그래야 의미 있을 것이었다.
위촉된 편집위원들은 강만길(고려대·한국사), 김남식(북한문제연구가), 김영하(성균관대·한국사), 김태영(경희대·한국사), 박종기(국민대·한국사), 박현채(조선대·경제학), 안병직(서울대·한국경제사), 정석종(영남대·한국사), 정찰렬(한양대·한국사), 조광(고려대·한국사), 최광식(고려대·한국사), 최장집(고려대·정치학) 교수 등 12명이었다.
총 12주제로 나뉘었고, 각 편집위원들이 필자를 구성해 전체 편집위원회에 보고해 최종 결정하게 했다. 각 팀은 별도 모임을 갖고 토론과 세미나를 진행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각 편에 실릴 내용을 정리해갔다.
우리 회사의 이 방 저 방에서 각 팀의 모임이 진행되었는데, 팀들이 너무 많아 일부 팀들은 커피숍이나 또 다른 연구실들에 모여 토론을 진행했다. 여기에 연표를 준비하는 팀이 가동되었으므로 총 13개의 팀이 '새로운 한국사'를 준비해갔다.
사실 우리 같은 작은 단행본 출판사가 이렇게 대규모의 작업을 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불가능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연표 작성까지 해서 173명의 필자가 참여하는 작업이었다. 필자들에게 이런저런 사정이 생겨, 때로는 필자가 교체되는 일도 있었다.
당초에 우리는 3년 정도 하면 책을 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기획 1년, 집필 1년, 제작 1년이면 가능하지 않을까 했다. 그러나 결국 8년이 걸려, 1994년 봄에야 <한국사>는 전27권으로 출간되었다. 본문 전24권에 연표 전2권, 색인 1권이었다. 전27권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제1권·제2권 … 원시사회에서 고대사회로
제3권·제4권 … 고대사회에서 중세사회로
제5권·제6권 … 중세사회의 성립
제7권·제8권 … 중세사회의 발전
제9권·제10권 … 중세사회의 해체
제11권·제12권 … 근대민족의 형성
제13권·제14권 … 식민지시기의 사회경제
제15권·제16권 … 민족해방운동의 전개
제17권·제18권 … 분단구조의 정착
제19권·제20권 … 자주·민주·통일을 향하여
제21권·제22권 … 북한의 정치와 사회
제23권·제24권 … 한국사의 이론과 방법
제25권·제26권 … 한국사 연표
제27권 … 찾아보기
우리는 <한국사>를 '최초로 만든 최대의 민찬한국사'라고 이름 붙였다. 발해사를 강조하는 등 고대사를 새롭게 해석했을 뿐 아니라 현대사를 중시하고 북한의 역사까지 수용함으로써 한국사의 인식지평을 변화시키는 하나의 큰 사건이었다.
디자이너 정병규씨가 책 전체를 디자인해 <한국사>는 책 내용뿐 아니라 새로운 전범을 보였다. 한국출판문화에 <한국사>는 하나의 이정표를 세웠다고 할 것이다. 강만길 교수는 편집위원과 필자들을 대표해 '간행사'를 썼다. <한국사>의 지향과 성격을 말하고 있다.
"역사란 현실의 변화에 따라 끊임없이 새로 씌어지게 마련이다. 더구나 1980년대 이후의 세계사적 격변과 함께 민족사적 현실도 크게 변화하고 있다. 이 변화는 한마디로 요약해서 세계사적으로는 냉전체제가 와해되고, 민족사적으로는 민주적 시민사회의 전개와 통일민족국가 수립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하겠다.
1980년대 이후의 이 같은 역사적 상황의 변화에 힘입어 우리 역사학계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역사학계에도 보수사학뿐 아니라 진보사학적 연구경향 및 업적이 나타나고 있다. 이와 더불어 차츰 분단시대적 역사인식이 극복되고 통일시대적 역사인식이 싹터가고 있다.
다시 말해, 8·15 이후 40여 년간의 분단국가주의에 한정되었던 민족사 인식에서 벗어나 통일민족주의적 역사인식으로 돌아섰다고 할 수 있으며, 그것을 바탕으로 연구작업의 현장에서도 획기적이라 할 만한 변화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우선 고대·중세사 전체를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으며, 우리 역사학계의 오랜 인습의 하나였던 근·현대사, 특히 현대사 연구 기피증이 극복되어가고 있다. 또한 종래 금기가 되다시피했던 일제 식민지 시기 민족해방운동전선에서의 좌익전선 활동에 대한 객관적 연구가 젊은 연구자들에 의해 정력적으로 추진되어 제 위치를 확보해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른바 8·15공간에 대한 객관성 있는 연구 업적이 양적·질적으로 축적되었고, 8·15 이후의 북한사가 객관적으로 연구되고 있다. 확실히 역사를 다시 써야 할 시점에 우리 사회가 서게 된 것이다.
이 같은 시대적 요구를 인식한 한길사가 몇몇 연구자들과 함께 신선하고도 내용이 충실한 거질의 한국통사를 기획했고, 오랜 진통 끝에 이제 전체 27권으로 된 <한국사>를 내어놓게 되었다. 민간출판사의 단독기획으로서는 우리 사학사상 그리고 출판사상 처음이라 할 수 있을 이 거질의 '민찬'(民纂) <한국사>를 기획하고 실행하는 과정에서 편집을 맡은 우리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점에 유의했다.
첫째, 전문연구자를 대상으로 하는 사서(史書)인 동시에 일반 지식인을 대상으로 하는 사서가 되게 하자는 생각이었다. 역사학이 전문가 중심의 영역에서 벗어나 대중화할 때 비로소 민족구성원 일반의 역사의식을 높일 수 있으며, 그것이야말로 역사학의 역할이 더 강조되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둘째, 1980년대 이후의 세계사적·민족사적 변화에 힘입어 생산된 연구업적들을 그 논지에 불합리성이 없는 한 제한 없이 수용한다는 생각을 우리는 갖고 있었다. 그 때문에 종래에는 통념상 이런 계획에 참여할 기회가 잘 주어지지 않았던 소장학자들도 대거 집필진에 가담시켰다. 이는 역사인식 및 서술의 노련성보다 그 신선성과 현재성 그리고 미래지향성에 무게를 둔다는 의도에서였다.
셋째, 전체적으로도 그러하지만, 특히 일제 식민지시기의 민족해방운동 과정과 8·15 이후 현대사 부분의 경우 가능한 한 분단체제적 역사인식의 틀을 벗어나 객관적인 시각의 서술이 되도록 노력하자는 생각이 있었다. 과욕인지 모르지만, 세기말의 역사변혁기에 서술되는 사서로서 통일민족국가 수립을 지향하는 역사인식, 21세기 민족사를 내다보는 역사인식을 담아내자는 의욕이 있었기 때문이다.
넷째, 그렇다고 해서 이 계획에 참가한 170여 명의 집필자들에게 편집자들의 어떤 의도를 요구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편집자들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집필진을 구성하는 데 한정되었을 뿐, 집필방향은 전혀 그들의 독자적 방법론과 역사인식에 의거한 것임을 분명히 밝힌다. 다만 그 위에서 통일된 일정한 방향성이 저절로 나타나기를 기대했을 뿐이다.
8년간의 진통과 긴 작업 끝에 책이 출간되는 시점에서 우리는 두려운 느낌도 갖게 된다. 우리들의 뜻과 노력이 얼마나 제대로 나타나고 있는지 모르겠다. 기획과 편집, 집필에 가담한 우리들은 우리의 역사, 우리의 역사학을 위하여 더욱 정진할 것을 다짐해본다.
8·15 이후의 남한지역사와 북한지역사가 '하나의 역사'로 서술되지 못하고 남한지역사 중심에 북한지역사가 '외사'(外史)처럼 덧붙여진 점이 아쉽다. 분단시대적 역사인식을 극복하자면서 이러한 방법론을 선택했다는 것 자체가 분단시대 역사인식의 표출처럼 된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현 단계로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는 자긍심을 갖게도 된다."
민족출판운동의 현재적 성과
나는 발간사를 썼다. 한 출판인으로서의 출판관·역사관을 담으려 했다.
"오늘 우리가 펴내는 <한국사>는 70년대 이후 우리 사회가 고통과 고뇌 속에서 실험·실천한 사상과 이론과 정서의 한 귀결이다. 이 시대 이 사회의 지적·문화적 대형체계로서 <한국사>는 축적된 우리들 출판역량의 한 결산이자 이 사회가 이룩해낸 민족출판운동의 현재적 성과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일군의 출판인들과 출판사들에게 자기 민족의 역사를 제대로 담아내는 책을 기획해내는 일은 당위일 것이다. 민족사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을 갖고 그에 관한 일련의 책들을 펴내고자 했던 한길사가 다시 학계의 저간의 성과뿐 아니라 현재적 역사의식을 종합하는 대형 <한국사>를 기획하는 일은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의 문제의식 내지 과제였다.
정치·사회적 권위주의를 극복하고 민족통일을 성취해내는 역사적·현실적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동시대의 출판인·출판사들과 더불어 제대로 된 <한국사>를 갖는 일은 우리들 출판의식의 중요한 한 줄기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1986년 봄에 <한국사>를 만들기로 결심을 굳히고 그것을 위해 구체적인 행동에 들어갔다. 과연 우리가 <한국사>를 제대로 만들어낼 수 있을까 하는 데 대한 부담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누군가에 의해서라도 '한국사'는 만들어져야 하며, 그것을 감히 우리 스스로가 감당해내겠다는 의지가 우리를 움직이도록 했다.
아직 그런 걸 만들어낼 수 있는 제반 여건이 성숙되지 못했다는 외부로부터의 회의도 없지 않았지만, 모든 조건이 갖추어지면 이미 그 의미가 약화된다는 사실이 우리의 자세를 가다듬게 만들었다. 역사란 언제나 새롭게 발전하고 그 해석도 언제나 새로워져야 한다는 명제가 우리의 <한국사> 작업을 자극했다.
우리가 <한국사>를 만들어야 한다는 당위성에는 몇 가지 좀더 구체적인 문제의식이 전제되어 있었다. 아울러 <한국사>를 가능하게 하는 이 시대의 사회적 조건 및 민족적 상황에 대해 우리는 일정한 인식을 갖고 있었고, 그것을 집대성하고 싶었던 것이다.
우리 민족이 일제식민지 통치시기로부터 해방된 지 반세기가 되었건만, 그 식민지시기를 비롯하여 자기 민족의 역사를 제대로 다룬 '민족사'가 왜 존재하지 않느냐 하는 의문을 우리는 갖게 된 것이다.
단일문화민족으로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견지해오면서 독창적인 문화와 사상을 창출해온 민족의 유구한 역사를 과학적으로 인식하고 체계적으로 서술해내는 '한국사'를 민족성원이 공유한다는 것은 참으로 절실한 역사적·문화적 삶을 담보하는 조건이라 할 것이다.
작은 규모의 통사가 없는 바도 아니고, 또 큰 한국사 작업이 없었던 것도 아니지만, 그것은 오늘의 분단시대와 그 이전의 식민지시기를 제대로 포괄하지 못하는 한계를 분명히 갖고 있는 것이다. 전근대는 물론이고 근대 이후 식민지시기와 분단시대를 살아온 우리 민족사 전체의 모습을 가감 없이 제대로 담는 큰 한국사를 이 시대의 민족성원은 절실하게 요구하고 있다 할 것이다.
1945년 일제식민지 통치로부터 해방되었지만 우리 민족은 자주적 통일 독립국가를 수립하지 못한 채 분단되었고, 다시 서로가 전쟁까지 치렀다. 그러나 남과 북은 같은 역사와 문화를 공유하는 하나의 민족이기에, 갈라져 살고 있는 이 민족을 하나로 인식하는 한국사를 만들어내는 일은 분단시대를 사는 지식인은 물론이고 민주주의와 민족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는 출판인들에게 당연히 주어지는 과제일 터이다.
이데올로기로 인한 민족의 분단 및 그 분단사의 전개가 현재로는 '하나의 한국사'를 체계화하는 데 일정한 한계가 되겠지만, 그래도 현단계에서나마 가능한 대로 하나의 한국사를 만들어내는 일은 민족통일을 조금이라도 앞당기는 민족출판의 실체적 내용의 일단이 되는 것이다.
식민지시기에 치열하게 전개된 엄연한 민족해방운동사도 남과 북에서 공히 왜곡되거나 폄하되는 역사서술이 자행되는 현실 속에서, 우리는 <한국사>를 통해 잘못된 역사서술을 바로잡고, 역사적 사실을 사실대로 서술하는 '하나의 우리 역사'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또 하나의 문제의식이다.
한 시대 한 사회의 인문사회과학적 인식은 물론 동시대인들의 정신적·물질적 삶의 운동을 종합하는 문화적 행위란 바로 민족사의 체계적 서술작업일 터이다. 4월혁명 이후, 특히 1970년대 이후 각성되고 실천된 학문적·사상적 연구성과를 <한국사>는 수렴해내게 되는 것이고, 다시 이것은 우리의 민족적 삶을 성찰하는 한 준거가 될 것이다. 다시 말해 주체적인 한국적 인문사회과학을 정립하는 토대를 우리의 <한국사>가 마련할 수 있다는 믿음을 우리는 갖고 있다.
이 같은 지향과 실체를 갖는 <한국사>는 우리의 단독적 역량에 의해서가 아니라 당연히 동시대인들의 연대적 공동작업에 의해서만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한 시대 한 사회의 출판문화란 저자·출판사·독자의 수평적 연대작업으로 창출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최근 힘찬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독자의 수용능력에 주목한다. <한국사>는 70년대 이후 등장하기 시작한 독자들의 축적되고 고양된 독서능력을 전제로 존재하고, 다른 한편으로 민족적인 학문과 사상 내지 한국적인 인문사회과학의 대중적 확산을 의미하는 것이다.
요컨대 <한국사>는 우리 시대의 두 공동선인 민주주의와 민족통일문제에 관해 진지한 관심을 갖고 있는 연구자들의 지속적인 공동참여에 의해 이루어졌다. 170여 명의 편집위원과 필자들이 서로의 관점과 연구결과를 주고받는 긴 토론과정이 집필시간보다 더 길었다. 방대한 주제와 연구영역, 다양한 지향과 연구방법으로 해서 역할분담과 상호토론을 거치지 않고는 <한국사> 작업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8년에 걸친 작업 끝에 이윽고 간행되는 <한국사>는 4월혁명 이후 30여 년간 풍부하게 축적된 한국학의 총역량을 종합하는 우리 시대의 공동작업이지만, 한길사는 그것을 조직하고 뒷받침하며 연출해내는 보람과 긍지를 민족출판운동이라는 차원에서 보듬어 안을 수 있게 되었다.
기획하고 집필하고, 집필된 원고를 놓고 토론하고 점검하는 긴 시간이 소요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편집실로 넘겨진 원고를 책이라는 문화적 형식으로 다듬어내는 일련의 작업은 우리에게 참으로 긴 인내를 요구했다. <한국사>를 기획해서 만들어내는 8년이라는 지난 세월은 편집위원이나 필자는 물론일 터이지만 출판사나 편집자들에게 참으로 가슴 벅찬 체험이었다.
이제 막 출간될 <한국사>지만, 우리는 <한국사>를 다시 만드는 작업에 임할 것이다. 역사란 이미 결정되어 있거나 정지된 것이 아니라 살아 움직인다는 사실을 우리는 믿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는 늘 새롭게 발견·해석된다. 역사란 역사적·사회적 실천에 의해서 기존의 이론과 학설이 수정·보완된다. 남과 북의 민족과 국토가 하나가 되면 '더 완전한 하나의 한국사'를 우리는 갖게 될 것이다.
이제 한국은 세계사의 거대한 변화 속에서 '국제화'의 닻을 올리고 있다.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한국이 국제사회에 깊숙이 편입되고 또 영향을 주고받게 되는 것은 필연적이다. 바로 그러한 시기에 민족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그 총체성을 규명하는 <한국사>를 출간하는 일의 시의성과 중대성에 우리는 감히 자부심과 사명감도 가져본다.
아름다운 '우리의 책' <한국사>를 만들어내기 위해 땀 흘린 편집자들과 미술가들, 제작자들이 또한 오늘의 기쁨과 긍지를 나눠 가져야 할 민족출판의 일꾼들이다. <한국사>라는 아름답고 진지한 민족출판을 위해 이들은 긴 인고의 작업을 출판문화의 무대 뒤켠에서 침묵으로 감당해주었다. <한국사>를 오늘 동시대와 동시대인들엔게 내놓는 우리는 참으로 즐겁다. 오늘같이 좋은 날을 위해 책 만드는 사람들은 존재해야 한다."
24장의 한국사 육성강의 CD 제작
<한국사>를 대중화시키는 과제가 우리에게 주어지고 있음은 물론이다. 나는 24명의 편집위원과 필자를 참여시킨 육성강의를 CD에 녹음했다. 이 24장의 CD만 들어도 한국사의 전모를 파악할 수 있게 했다. 책의 문화를 입체적으로 연출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컴퓨터로 콘텐츠를 볼 수 있게 하는 작업을 다시 진행했다. 우리는 <한국사>를 '장서 1호'라고 안내 팸플릿에서 말했는데, 컴퓨터 또는 인터넷 시대가 막 열릴 때 시도된 한국사의 또 다른 작업 CD롬을 우리는 '전자책 제1호'라고 이름 붙였다.
<한국사>는 각계로부터 격려와 성원을 받았다. 역사학계의 큰 사건이고, 역사 인식을 도약시키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격려했다. 민족문화의 빛나는 성과이자 민족이 하나 되는 역사적 근거라고도 했다. 민족의 재통일을 실현하고 21세기에 대응하는 지혜라고도 했다.
김진균 서울대 사회학 교수 : "우리는 우리 역사를 관념적으로 아니면 비과학적으로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단편적으로 혹은 연대사적으로 주입되어왔던 역사인식을 오랜 세월 동안 탈피할 수 없었다. 잘못된 사관, 비주체적인 문제의식 때문이라고 할 것이다. 한길사의 놀라운 기획인 <한국사>로 이제 우리는 우리 역사를 새롭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현실을 더 과학적으로 인식할 수 있으며 미래를 바로 전망할 수 있게 되었다.
변형윤 서울대 명예교수(경제학) : "8년에 걸친 오랜 작업 끝에 드디어 세상에 나온 <한국사>에 먼저 경이로운 마음부터 전한다. 큰일을 해낸 출판사의 문제의식과 노고를 치하한다. 정치사·왕조사를 중심으로 한 기존의 역사서들이 갖는 한계를 극복하고 보다 민족자주적인 관점에서 우리 역사를 형상화시킨 편집위원들과 집필자에게 또한 감사한다. 아무쪼록 <한국사>가 거듭 새롭게 태어나야 할 우리 역사의 새 지평을 여는 데 밑거름이 되길 바란다."
이우성 전 성균관대 대학원장(한국사) : "<한국사>의 출현은 우리 역사학계의 큰 사건이자 민족사를 탐구하는 독자들에게 주어진 값진 선물이며 출판계의 일대 경사라 할 것이다. 한길사의 <한국사>를 계기로 역사학계가 다시 한 번 도약할 것이고, 한국학 출판도 새로운 단계에 진입할 것이다. <한국사>는 연구자와 출판사와 독자 모두의 보람이다."
"한반도에 사람이 등장한 것은 구석기부터이다"는 첫 문장으로 시작되는 <한국사>는 언론들로부터 격찬을 받았다. 모든 언론들이 대서특필했다.
"민찬 한국사 나왔다. 사서(史書)의 금자탑이다." - <국민일보>
"한길사, 원고지 6만여 장 분에 획기적 내용 담다. 한자 덜 쓰고 쉽게 서술. 왜곡된 근현대사 수정" - <서울신문>
"우리 민족의 역사를 새로운 관점에서 서술한 27권짜리 <한국사>가 착수 8년 만에 나왔다. 근현대 민족운동사 및 현대사·북한사를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다. 한국사 연구의 총결산이다." - <동아일보>
"통일 민족주의적 역사 인식을 바탕으로 한 70년대 이후의 한국사 연구성과를 시대별·분야별로 총망라했다." - <매일신문>
"민간 편찬 최초 역사전집 통일지향 민족사학 특징" - <일간스포츠>
"다양한 분야 걸쳐 민중의 삶 조망, 사회과학자 대거참여 국사연구 새 지평" - <한국일보> "북한 역사 포함 민족사 집대성, 소장·진보학계 성과 수용, 근현대비중 높아 한국사 CD롬 제작, 교양·전문서 최초 전자책 될 듯" - <조선일보>
"정치사 탈피 경제·생활사 중심 서술. 북한사 객관적 시각으로 다뤄" - <중앙일보>
"새로 쓴 우리 역사 7년 만에 결실, 왕조위주 시대 구분 탈피, 40대 한글세대 학자 주축" - <한겨레신문>
"3세대필진, 민 중심의 역사인식" - <경향신문>
"고대사로부터 80년대까지 남북한 역사를 집대성" - <연합통신>
'한국사대학'과 고구려역사기행
1986년에 성북구 안암동에서 시작된 <한국사>는 한길사가 1990년 강남으로 사옥을 옮긴 후 4년이 지난 1994년에 완성되었다. 전27권을 쌓아두면 두께가 1m나 되었다.
한길사는 <한국사>의 역사적 간행을 기념하여 강남출판문화센터라는 제대로 된 공간에서 '한국사대학'을 펼쳤다. <한국사> 필자들이 직접 독자와 만나 강의하고 토론하는 것이었다.
1994년 6월 24일부터 10월 말까지 총 72강좌로, 월요일과 목요일은 고대·중세사반이, 화요일과 금요일에는 근·현대사반이 진행되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한양대 김용운 교수가 특강을 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나의 길 나의 사상>을 한길사에서 펴낸 저자인데, '내가 보는 한국사'를, <한국인과 일본인> 전 4부작을 한길사에서 펴낸 김용운 교수는 '다른 시각에서 보는 한국사'를 특강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특강하는 날 나의 방에 들러 나와 아내 박관순을 위해 '愛國愛民'이라는 휘호를 써주었다. 선생의 현실정치에 대한 견해가 곁들여진 특강은 언론에 널리 보도되었다.
<한국사> 출간을 기념하여 우리는 '고구려 역사기행'을 기획했다. 1994년 7월 16일부터 8월 28일까지 4차에 걸쳐 8박 9일 동안의 고구려 역사기행은 아마도 민간인들로 구성된 최초의 고구려 역사 탐험이었을 것이다. 나는 고구려 역사기행을 위해 4월 초순에 기행단이 갈 지역을 미리 답사하는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한국사>의 간행과 고구려역사기행으로 우리의 민족사 인식운동은 절정으로 가고 있었다. 역사는 참으로 아름다운 풍경이고, 지나간 역사는 오늘을 사는 사람들에게 아름다움을 넘어 참으로 위대한 교훈을 가슴에 안겨주는 것이었다. 한 출판인으로서 그런 기획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은 지금 생각해도 신기할 정도로 경이롭고 행복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