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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6년 고려의 민족통일은 신라처럼 살기를 거부하는 당시 한민족의 의지 표현이었다. 고구려 계승을 표방한 왕건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이고 재물이 모였다는 사실은, 왕건의 정치적 구호가 당시 사람들의 가슴에 강렬한 필(feel)을 꽂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백제·고구려 멸망 후 한민족은 발해와 신라에 의해 영도되었다. 발해는 고구려 식으로 살았고, 신라는 신라 식으로 살았다. 신라 식이라는 것은 자주성을 포기한, 외세의존적 삶을 말한다.
신라의 지배영역에서 후백제(892년)가 나오고 후고구려(901년)가 나왔다는 사실은, 신라 식 삶에 대한 당시 인민의 평가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다. 당나라에 의존하는 신라 식 삶이 신라의 번영에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했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지 않았다면, 신라의 사회 주도층이 사람들과 물자를 동원하여 후백제나 후고구려 편에 섰을 리가 있을까.
그리고 당시 사람들이 고구려 계승자인 고려 편에 한데 모였다는 점은, 결국 신라 식 삶보다는 고구려 식 삶이 더 옳았다는 그들의 반성을 반영하는 것이다. 당당하게 사는 것이 위험부담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결국엔 그 길만이 내 것을 확실히 지키는 방법이라는 사실을 뒤늦게야 깨달은 것이다.
"그냥 삶이 고단해서 신라를 반대한 것이겠지, 설마 대당(對唐) 의존적 삶이 싫어서 그랬겠는가?"라고 질문할지 모른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이 신라를 버리고 고구려 계승자를 선택한 것은 고구려와 신라 사이에 뭔가 다른 점이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고구려와 신라의 차이점을 든다면 외세에 대한 태도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두 나라 사이에서 어떤 경제적·사회적 차이점을 찾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당시 사람들의 기억 속에는 고구려는 당나라에 맞선 나라이고 신라는 당나라에 의존하는 나라라는 점이 가장 인상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10세기 초의 한민족이 신라를 버리고 고구려를 선택한 사실은, 신라의 외세의존적 태도에 대해 상당한 거부감이 형성되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에는 이 문제를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신라처럼 살면 안 된다는 쪽과 신라처럼 사는 것이 현명하다는 쪽이 대립하고 있다.
그러나 대답은 매우 명확하다. 왜냐하면 신라 식 삶을 직접 살아본 사람들이 892년에는 후백제를 중심으로 뭉치고 901년에는 후고구려를 중심으로 뭉쳤으며, 936년에는 드디어 왕건의 고려를 중심으로 한데 뭉치게 되었기 때문이다.
고구려의 또 다른 계승자인 발해의 유민들까지 고려를 중심으로 뭉쳤다는 것은, 당시의 한민족이 고구려 식 삶에 거족적 지지를 보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처럼 신라 식 삶을 직접 살아본 사람들이 신라처럼 살기를 거부하고 고구려처럼 살기를 희망했는데, 오늘날의 우리가 어느 쪽이 옳으냐를 놓고서 왈가왈부하는 것은 별다른 의미가 없을 것이다. 명확한 '판례' 앞에서는 그 어느 학설도 힘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다.
10세기 초의 한민족이 어떤 낭만적인 기분에 빠져서 신라 식 삶을 거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떤 허황된 의식에 사로잡혀서 그런 중대한 결단을 내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분명한 현실적 이유에서 그런 선택을 내렸을 것이다. 신라 식 삶이 당장에는 '배부른 돼지'가 되는 것 같지만 결국에는 '배고픈 돼지'로 전락해버릴 수밖에 없다는 점을 피부로 체험했기에 그런 선택을 내린 것이다.
오늘날의 대미 사대주의 세력은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기보다는 '배부른 돼지'가 될 것을 권한다. 그들은 미국에 의존하는 길이 바로 배부른 돼지가 되는 길이라고 말한다. 심지어 그들은 독립된 주권을 유지하느니 차라리 미국의 51번째 주가 되는 게 더 낫다고까지 말한다. 그러나 이보다 더 어리석은 판단은 없을 것이다.
강대국이 약소국을 자기편으로 만들려는 것은 결코 약소국을 배부르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양 다리, 세 다리 걸치는 플레이보이가 미녀에게 반지를 사주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미국이 한국을 종속시키는 목적은 한국에서 더 많은 것을 얻어내기 위함이지 결코 한국에 더 많은 것을 주기 위함이 아니다.
플레이보이보다 더 못한 미국에게 그런 낭만적인 기대를 했다면, 한국은 정말로 '남자 보는 눈'이 없는 나라일 것이다. 계속해서 대미의존적 자세를 유지한다면, 한국은 잃으면 잃었지 얻을 것은 아무 것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대미의존적 삶은 배부른 돼지의 삶이 아니라 결국에는 배고픈 돼지의 삶이 될 수밖에 없다. 진정 배부른 돼지가 되기를 원한다면, 미국이 쳐놓은 울타리를 과감히 뛰어넘어 산속으로 들어가 멧돼지가 되는 편이 훨씬 더 나을 것이다.
집돼지가 되느니 차라리 멧돼지가 되겠다는 것이 936년 한민족의 의지 표현이었다. 신라처럼 살기를 거부한 것은 배고픈 집돼지의 삶이 몸서리치도록 싫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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