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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이 대부분 그렇듯 나도 감자탕을 매우 즐긴다. 큼직한 뚝배기에 넘치도록 담긴 얼큰한 국물과 그 안에서 요염하게 누워 있는 뼈다귀, 그리고 눈부시게 하얀 속살을 수줍은 듯 감추는 감자는 생각만 해도 군침이 돈다. 차갑고 투명한 소주를 단숨에 들이켠 다음 국물을 한 숟가락 그득히 삼키는 것이 성찬의 출발이다. 푹 삶겨져 흐늘거리는 줄거리들의 질감을 입 안 가득 만끽하다 보면 아래로 부어 내렸던 술이 얼근하게 오르기 시작한다.

소주잔이 거침없이 오가고 대화의 톤이 높아지기 시작하는데, 살점이 제법 튼실한 뼈다귀를 집는 것은 바로 그 타이밍이다. 직장이나 기타 선후배 관계가 확실한 사람들의 술자리라면 뼈다귀를 집어드는 순서가 분명히 정해져 있다.

신참이나 짬밥이 덜 되는 청년들이 감히 뼈다귀를 집어들 엄두를 내지 못하고 눈치를 보는 것에는 슬며시 웃음이 나온다. 마치 집단적 사냥을 마친 육식 맹수의 무리가 서열에 따라 고기를 뜯는 장면이 연상된다. 서로 대등한 수평적 관계의 사람들이라면 그 뼈다귀를 서로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접전이 벌어지는데, 그것 역시 야생세계의 처절한 약육강식과 그리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감자탕의 백미는 역시 감자일 수밖에 없다. 국물과 뼈다귀가 거의 사라질 무렵, 자신이 등장할 차례를 다소곳이 기다리는 감자를 작은 접시에 덜어낸다. 아무런 저항 없는 감자를 수저로 슬쩍 누르면 속까지 푹 익은 살결이 여지없이 자태를 드러내니 오호, 바로 네가 양귀비의 화신이 아니던가? 입 안에 넣자마자 슬슬 녹아들고 차진 살결이 관능적으로 감겨드니, 돼지등뼈가 주재료임에도 감자탕이라고 명명된 이유가 명백하게 드러나는 순간이다.

그러나 나는 감자탕의 감자를 먹지 않는다. 감자탕의 감자뿐 아니라, 거의 대부분의 감자요리를 아예 쳐다보지도 않는다. 술을 즐기는 데 비해 안주를 많이 먹지 않는 습관이 배었기도 하지만 특히 감자는 먹지 않는다.

나의 아내도 감자탕을 끓여낼 때는 절대로 감자를 넣지 않는데, 내가 먹을 음식에는 감자가 포함되지 않는 것은 최전방의 군인들이 명령 없이 철책을 넘으면 안 된다는 것만큼이나 확고부동한 철칙으로 굳어진 지 오래다.

63년생으로 70년대 초중반까지 유년기를 보낸 나에게 감자는 맛있는 음식이 아니었다. 생존에 필요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먹어야 했던 것에 불과했다. 특히 도시락으로 싸간 감자를 먹는 것은 정말이지 고문의 수준이었다. 당시야 혼식을 장려하여 감자를 싸오는 학생도 그리 드물지 않았지만, 나는 그것이 정말 싫었다.

특히 겨울에 식어 빠진 감자를 억지로 베어 물때 차갑고 물컹하게 전달되는 질감은 어떻게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불쾌하기만 했다. 결국 도시락으로 감자를 싸간 날은 그것조차 싸오지 못하는 다른 아이들에게 주어버리고 나는 밥을 굶었다. 조개탄을 때는 난로에 층층이 쌓여 구수한 냄새를 풍기는 도시락들의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봐야만 했던 어린 것의 심정이 어땠을 것인가? 아아, 더 이상 말하지 않으련다.

그 무렵의 우리 동네에도 대폿집이 있었다. 대폿집의 안과 밖을 구분 짓는 미닫이에는 이리저리 금 간 유리가 처량하게 붙어 있고 어른들은 언제나 왁자하게 떠들면서 술을 마셨다. 우리 아버지를 포함하는 그분들이 마시는 술을 담아낸 것은 박물관에 어울릴 것 같은 다 찌그러진 누런 알루미늄 주전자였다. 그 주전자는 끊임없이 술이 나타나는 장치가 된 것만 같았다. 예쁜 아줌마가 한 켠에 묻어둔 항아리에서 퍼 담아 내는 것이었지만 늘 아버지를 모시러 거기에 가야했던 내 눈에는 그렇게 비쳤다.

내가 아버지를 모시러 가면 어린 여동생들이 줄줄이 따라나섰다. 그 대폿집의 안주는 냄새만 맡아도 정신이 번쩍 들 것 같은 시어빠진 깍두기와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도는 감자탕 국물이었다. 우리들이 나타나면 예쁜 주인 아줌마가 호들갑을 떨면서 반겨주었다. 나와 여동생들은 구석 자리에 앉아 그 맛있는 감자탕 국물을 한 그릇씩 얻어먹을 수 있었다.

물론 뼈다귀와 감자는 들어 있지 않았지만 그것은 오히려 내가 바라던 바였다. 그렇게 실컷 얻어먹고 나면 어머니가 맡기신 의무를 이행할 차례였다. 그러나 아버지와 예쁜 대폿집 아줌마가 즐겁게 어울리는 것을 방해하면 안 된다는 것은 불문율이었다.

우리들이 감자탕 국물을 얻어먹을 수 있던 것은 어디까지나 그 아줌마가 우리 아버지를 좋아했기 때문이었지, 결코 우리들이 예뻐서가 아니라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가끔 아버지와 어머니가 언성을 높이며 다투시는 것도 그 예쁜 대폿집 아줌마에게 원인이 있었지만, 어쨌든 우리들에게는 매우 고마운 존재였다. 여동생들이 저 아줌마와 함께 살면 이렇게 맛있는 걸 매일 같이 먹을 수 있지 않겠느냐며 속삭일 정도였으니까,

아버지가 이제 겨우 뛰어다니기 시작하던 막내를 안고 일어서면 아버지를 줄줄이 따라나섰다. 아줌마는 문간을 넘어 배웅을 했고 가끔 우리들에게 꼬깃꼬깃한 십 원짜리 지폐를 슬쩍 집어주기도 했다. 귀갓길에 흥얼대는 아버지의 노래는 언제나 듣기 좋았다. 비록 통속적인 유행가에 한정되었지만 아버지의 노래 실력은 대단한 수준이었다.

국물로 배를 채운 우리들이 아버지를 쳐다보면 언제나 대폿집의 분위기를 틀어잡고는 노래를 부르셨다. 그 아줌마는 그윽하게 눈을 감고 아버지의 노래를 감상했는데, 바로 그것이 아줌마가 아버지를 좋아하게 된 결정적 요인인 것 같았다. 아버지의 세 번째 노래가 끝날 무렵 아버지를 모셔오라는 의무는 끝이 났다.

나는 다시 감자탕의 감자를 건져낸다. 그럴 때마다 식당의 예쁘장한 그녀는 적지 않게 속이 상해하는 눈치다. 내가 자주 다니는 감자탕 집에서 일하는 '아줌마'인 그녀는 나와 제법 친하다. 얼큰하게 술에 취하면 그 아줌마가 예전에 아버지를 좋아했던 대폿집의 예쁜 아줌마처럼 보였다. 가끔 그 아줌마를 옆에 앉히고 노래를 부르곤 한다. 놀부의 아내처럼 탐욕스러워 보이는 주인여자는 그만 일어나 주었으면 하는 눈치를 주지만, 그럴 때마다 소주 한 병을 더 시키는 것으로 응수하곤 했다.

아버지의 레퍼토리였던 '황성 옛터'와 '비 내리는 고모령'은 내가 듣기에도 그럴싸했다. 그녀는 대폿집의 아줌마처럼 그윽하게 눈을 감고 들어주는 대신 함께 콧노래를 불러주곤 했다. 노래가 끝난 다음 과장된 모습으로 박수를 쳐대는 그녀에게 만 원짜리 한 장을 내밀 때, 구석에서 이쪽을 흘끔거리며 국물을 삼키는 아이들이 보이는 것 같다. 술자리가 끝나기를 기다렸던 어린 아이들이 줄줄이 따라나올 것만 같은 느낌에 몇 번씩이나 뒤를 돌아본다.

#감자탕#아버지#소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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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권 출판을 목표로 하는 재야사학자 겸 작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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