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 시대로 접어드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1987년 6월항쟁에 개신교·천주교·불교는 어느 세력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종교인들을 비롯한 민주화 세력의 피와 땀으로 우리 사회는 민주화의 길을 걸었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3대 종단은 6월항쟁 이후 보수화가 굳어지고 있는 형편이다.
민주 사회를 일구는 일에 공헌했지만 자기 내부는 오히려 보수화된 3대 종단이 걸어온 20년을 반성하기 위해 학자들이 모였다. 개혁을위한종교인네트워크가 6월 8일 만해NGO교육센터에서 6월항쟁 20주년 기념 토론회를 개최했다. 김진호 연구실장(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강인철 교수(한신대 종교문화학), 윤남진 정책위원(참여불교재가연대 부설 교단자정센터)이 각각 개신교와 천주교, 불교의 지난 20년간을 회고했다.
개신교 "위기 극복하는 과정이 더 불온하다"
김진호 실장은 "민주화 20년이 지난 지금 한국의 민주주의는 전반적으로 보수적으로 진행되고 있음에도 정책에 있어서나 인식에 있어서나 보수와 진보가 모호하게 얽혀 있다"고 진단했다. 이어 김 실장은 "보수 개신교의 '정치세력화'가 한국 사회를 보수주의적으로 공고화하는 데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김 실장은 한국 개신교가 교파 간 분열이 심각하지만 놀랍게 동질적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 동질성을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이 개신교에 새겨 넣은 '성령-성공-친미성(근본주의적 미국주의)-획일주의'라고 규정했다.
이렇게 코드화된 보수 기독교는 교인 수 격감과 사회적 신망 추락이라는 위기를 체험하고 있다. 여기에 민주 정부가 들어선 뒤 과거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일부 기독교 인사와 기관이 권력 자원의 일부를 불하받게 되면서, 양적인 비율상 절대다수를 점하고 있는 보수 기독교 영역은 상대적인 상실감을 체감했다고 김 실장은 지적했다.
김 실장은 "한국교회의 불온함은 기독교의 실패, 그 지체된 민주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위기를 넘어서는 성공적인 전략의 불온함에 있다고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김 실장이 지적한 세 위기에 대한 개신교의 대응 전략을 살펴보면, 교인 감소에 대해서는 '문화 목회' 전략을 썼고, 신망 추락에는 '축복의 신앙화', 권력 배제에 대해서는 '기독교 시청 앞 집회' 같은 교회의 정치세력화로 위기를 돌파했다.
그렇지만 문화 목회는 교회가 소비문화에 대한 비판적인 거리를 확보하지 못한 채 자본주의화가 되었고, 축복을 강조하는 신앙은 사회에서 실패한 사람들을 신앙에서도 실패한 사람으로 몰며, 정치세력화를 향한 교회의 원초적인 돌파 전략은 사회적 혐오감만 키웠을 뿐이다.
천주교 "보수 세력 주교회의 장악 뒤 사회운동 탄압"
6월항쟁을 이끌었지만 보수화된 것은 천주교도 마찬가지다. 강인철 교수는 한국 천주교가 사회 참여 절정기였던 1986~1987년 이후 급격히 보수화되었다고 주장했다.
강 교수는 1987년 이후 주교단 내에서 보수 세력이 헤게모니를 장악했다고 주장했다. 1987년 3월부터 1989년 10월까지 3년 반에 걸쳐 주교회의를 비롯한 교권 세력의 파상적인 공세와 그로 인한 갈등이 계속되었다는 것이다.
주교회의는 한국천주교평신도사도직협의회(평협)과 한국가톨릭농민회(가농)의 회칙 승인을 취소하고 전국본부의 잠정적 활동 정지를 명령했다. 대한가톨릭학생총연맹에 대해서는 '주교회의가 인정한 바 없는 단체'라고 강조했다. 주교회의가 이런 자생적인 단체들에 대해 사실상 해체 명령을 한 셈이다.
대표적인 가톨릭 청년 단체인 명동천주교회청년단체연합회(명청)는 "사제가 허락하지 않는 시위를 했다"는 이유로 명동성당 측은 활동 정지됐다. 정의구현사제단이 1989년 문규현 신부를 평양에 파견하고 평양 장충성당과 임직각에서 동시에 통일 염원 미사를 드리자, 주교회의를 정의구현사제단을 비난하는 성명도 발표한 바 있다.
강 교수는 이런 조치 외에도 주교회의가 진보적인 사회참여를 하는 그룹을 몰락에 가깝게 몰아갔던 과정을 열거했다. 강 교수는 "1990년대 들어서면서는 주교회의는 자신들의 보수적 통제 아래 들어오지 않는 사회운동 단체들에 대해 '천주교'나 '가톨릭'이라는 용어조차 쓰지 못하도록 압박했다"고 설명했다.
천주교 사회운동 단체들의 몰락에는 주교회의의 압박만 있었던 건 아니다. 단체들이 계속해서 운동을 이어갈 활동가를 충원하지 못한 것도 큰 요인이다. 강 교수에 따르면, 70년대까지는 천주교회가 굳이 나서지 않아도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합법적으로 사회운동을 할 수 있는 공간이 드물었기 때문에 운동을 하려던 사람들은 기독교 우산 안으로 들어왔다.
그렇지만 80년대를 거치면서 일반 사회운동이 빠르게 성장했고 기독교 안에 있던 활동가들도 사회로 빠져나갔다. 그렇지만 그 자리는 쉽게 충원되지 않았다. 게다가 80년대 말이 되면서 가톨릭 내부 사회운동 단체를 지원하던 외국의 후원금까지 끊겼다. 돈이 없어 사무국장과 간사를 해고하는 일도 벌어졌다.
불교 "내부 타락으로 사회 개혁 요구할 처지 못 돼"
한편, 불교는 1980~1990년대 내내 내부 개혁이라는 과제를 앉고 있었다. 1980년 전두환 정권이 불교 교단의 재산 축적과 축첩에 과한 비리를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송월주 총무원장과 주요 사찰 주지를 강제 연행하고 3000여 사찰을 수색한 일명 10·27 법난이 발생했다. 윤남진 위원은 이 사건을 계기로 불교 내부에 자주화운동이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윤 위원은 "국가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불교를 만들어야 할 뿐 아니라 정권의 침입에 빌미를 제공한 교단 내부의 비민주성을 개혁해야 한다는 게 핵심 과제였다"고 말했다. 윤 위원은 이러한 열망이 모아져 1987년 이후 불교 내부의 최대 집결 단체인 민족자주통일불교운동협의회가 만들어졌다고 주장했다.
1994년에는 서의현 총무원장의 3선 연임 움직임을 저지하면서 조계종의 종단개혁운동이 제도적인 민주화도 어느 정도 실현했다. 윤 위원은 구성원들에게 부분적이나마 참정권이 부여된 선거제도를 개혁조치의 최대 핵심으로 꼽았다. 더불어 사찰 주지 인사권이 교구본사로 이양되면서 주지의 전횡이 제재되었다.
윤 위원에 따르면, 총무원장이 선출직으로 바뀌고 종앙 조직이 전문성을 갖추면서 교역자들도 20명에서 80명 수준으로 늘어났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사회운동 세력들도 종단 제도권 내로 90% 이상 유입되었다. 그래서 전국불교운동연합 같은 단체는 활동 정지 상태에 이르렀다. 민주화운동을 했던 청년 대중이 종단과 밀착되어 의존적인 조직으로 전락했다.
게다가 어느 정도 개혁성을 담보했던 송월주 총무원장이 3선을 위해 출마를 선언한 1998년 종단 사태 이후에는 불교가 사회에 개혁적인 요구를 할 수 있는 처지를 상실하게 되었다고 윤 위원은 말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기독교 대안 언론 <뉴스앤조이>(www.newsnjoy.co.kr)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