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카피 호텔에 짐을 푼 뒤 서둘러 택시를 타고 지난 1994년의 대학살 현장으로 달려갔다. 르완다에는 대표적인 대학살 추모기념관이 세 군데 있다. 지난 2004년 새로 지은 키갈리 주변의 기소지(Gisozi)라는 지역에 있는 키갈리 기념관과 키갈리에서 남쪽으로 한 시간 거리의 은타라마(Ntarama) 기념관, 니아마타(Nyamata) 기념관 등이다.
나는 지난 94년 대학살 이후 현장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은타라마 기념관을 찾았다. 당시의 현장 모습을 직접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키갈리에서 은타라마까지 가는 도로는 시아니카에서 수도 키갈리로 오는 포장도로와는 달리 비포장도로의 흙길이었다. 도로를 포장하기 위해 트럭들이 흙을 실어 나르고 불도저가 도로를 다지고 있었다.
한 시간 정도 달리다 좁은 길로 들어서자 은타라마 기념관이 나타났다. 시골마을의 작은 교회가 바로 대학살의 현장이다. 믿어지지 않았다. 이렇게 작고 조용한 성당에서 수천 명이 죽어갔다는 사실이.
옛날 가톨릭 성당이었던 교회 건물 입구에는 어린이 예닐곱 명이 앉아서 놀다가 외국 여행객이 들어서자 손을 흔들며 반가워했다. 어린이들은 자신들이 태어나기 20여 년 전의 참사를 알 리가 없다. 가끔 찾아오는 외국 여행객이 신기할 따름이다.
성당 설교 연단 위에는 해골과 나무십자가가...
기념관 입구 작은 사무실에 있던 젊은 여직원이 나와 홀로 온 나를 안내했다. 분홍색 띠로 된 줄이 기념관 입구를 둘러치고 있었다. 아마도 추모의 상징인 것 같았다. 붉은 벽돌로 된 교회 안에 들어서자 차마 눈 뜨고 볼 수가 없었다. 여기저기 널브러진 수많은 해골들이 당시의 처참했던 상황을 말해주고 있었다. 신부가 설교를 하던 연단 위에는 해골과 나무 십자가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성당 벽으로는 나무 선반 위에 해골을 가지런히 모아 놓고 있었다. 해골 옆에는 누군가 갖다 놓은 몇 다발의 꽃묶음이 놓여 있었다. 꽃들이 말라있는 것으로 보아 꽤 오래된 것 같다.
두개골 중에는 날카로운 칼로 잘리거나 깨어진 해골도 많이 띄었다. 중남미 원주민들이 벌채에 쓰는 칼인 마세테(Machete)라는 중국산 칼로 무참히 살해했다는 것을 두개골은 말해주고 있었다.
손바닥만한 작은 두개골도 있는데, 그 당시 죽은 어린이의 것이다. 당시 다수족인 후투족 민병대는 여자나 어린이 할 것 없이 소수족인 투치족을 살해했다. 안내를 맡은 여직원은 "이 교회에서 살해된 사람만 모두 5000여 명에 이른다"고 설명했다.
성당 뒤편 건물은 더욱 참혹한 현장을 증언하고 있었다. 사람들을 몰아넣고 불을 질러 죽인 방화의 현장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해골들이 마치 동물의 뼈를 모아놓은 듯 수북이 쌓여 있었다. 물통과 바구니, 접시 등 식기들도 그대로 있었고 옷가지와 가방, 신발과 검은 양말은 돌아오지 않는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왜 교회에서 죽었는지가 궁금했다. 안내원에게 물었다.
"이 사람들이 다 교회에서 미사를 보다 죽은 사람들인가?"
"아니다. 후투족에 쫓겨서 교회로 도망 왔다가 몰살당한 주민들이다."
접시 등 식기는 투치족 주민들이 후투족에 쫓겨 그릇만을 들고 교회로 황급히 몰려 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마지막 생명의 피난처를 갈구했던 교회도 그들을 구원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당시의 아비규환과 살려달라는 울부짖음이 내 귀를 때린다. 설교 연단에 놓여 있는 나무 십자가와 해골의 의미는 무엇일까. 예수의 순교를 의미하는 것인가, 아니면 종교도 구원하지 못한 현대 인류의 참상을 보여주는 것인가.
은타라마 대학살 현장은 제암리를 닮았다
은타라마 교회의 대학살 현장을 보자 일제가 3·1운동 당시 저지른 제암리 학살사건이 떠올랐다. 그리고 예전 배낭여행으로 찾아갔던 캄보디아의 킬링필드 현장도 되살아났다. 일제는 3·1 독립운동이 일어난 지역이라는 이유로 1919년 4월 경기도 화성시 제암리 마을주민들을 제암리 교회로 몰아넣은 뒤 학살했다. 이때 죽은 사람이 30여명.
일제는 자신들의 만행을 숨기기 위해 방화까지 저질렀다. 최근 당시 일본군의 조선주둔군 사령관이었던 우쓰노미야 다로 대장의 일기를 통해 "사실을 인정할 경우 일본에 불리한 만큼 저항 때문에 사살한 것으로 꾸미기로 했다"며 조작·왜곡한 사실이 드러나 우리를 더 분노케 하기도 했다.
르완다 은타라마와 조선 제암리. 아무런 죄가 없는 무고한 주민들을 교회라는 신성한 종교시설에서 학살한 뒤 이를 숨기기 위해 방화까지 한 수법이 너무나 닮았다. 일본인의 조선인에 대한 제국주의적 인종차별이 르완다에서는 다수족인 후투족의 소수족 투치족에 대한 인종차별로 나타났을 뿐이다.
르완다 대학살에 버금가는 참상이 동남아시아에서 벌어진 캄보디아의 킬링필드다.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의 중심가 툴슬렝(Tuol Sleng) 수용소와 영화 <킬링필드>의 배경이 된 교외의 초응엑(Coeung Ek) 학살 추모기념관에 가보면 이유 없이 숨져간 해골들이 통곡하고 있는 비참한 모습을 볼 수 있다. 킬링필드는 인종차별이 아니라 잘못된 극단적 사고가 불러온 냉전시대 막바지의 이념적 비극이었다.
르완다에서는 이곳 은타라마 교회를 비롯, 전국적으로 지난 1994년 4월부터 100여 일 동안 다수족인 후투족에 의해 무려 100만 명의 소수족인 투치족과 투치족을 감싼 온건 후투족이 살해되었다. 전체 르완다 인구 740만 명의 13% 정도가 죽은 것이다.
르완다 대학살은 그 규모나 잔혹성에서 나치의 유대인 학살 이후 최악의 인종 학살로 꼽힌다. 나치가 1939년부터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유대인 600만 명을 살해했고, 캄보디아에서는 1975년부터 크메르 루즈의 폴 포트 정권에 의해 200만 명이 숨졌으며, 유럽판 킬링필드라 불리는 보스니아 내전에서는 지난 1992년부터 1995년 사이에 세르비아계 극우민족주의자와 정교회신자들에 의해 20여만 명의 보스니아 내 이슬람계 및 크로아티아계가 학살되었다.
르완다 대학살의 직접적 촉발은 1994년 4월 당시 후투족 출신의 대통령인 주베날 하비아리마나(Juvenal Habyarimana) 대통령이 타고오던 전용 경비행기가 미사일 공격을 받아 추락해 사망하면서이다. 이 비행기에 같이 타고 있던 인근 부룬디의 역시 같은 후투족 출신 대통령인 시프리엔 은타리아미라(Cyprien Ntaryamira)도 죽었다. 하비아리마나 대통령은 지난 1973년 쿠데타로 집권한 뒤 일당독재 체제를 구축하면서 투치 차별정책을 펼쳐온 독재자였다.
그 후 후투 정부군과 후투 민병대인 인터아함웨(Interahamwe)가 수도 키갈리에서부터 시작해 전국의 투치족과 온건파 후투족을 무차별 학살하기 시작했다. 이 학살은 현 르완다 대통령인 투치족 출신의 폴 카가메(Paul Kagame)가 이끄는 반군단체인 르완다애국전선(RPF)이 1994년 7월 후투 정권을 몰아내면서 종식시킬 수 있었다.
서구 언론이 숨기는 르완다 대학살 진실들
우리는 이 르완다 대학살에서 서구인들이 숨기고 싶어하는 놀라운 제국주의의 검은 그림자를 보게 된다. 이른바 미국의 AP나 프랑스의 AFP, 영국의 REUTERS, 그리고 미국의 CNN 방송이나 영국의 BBC 방송들이 굳이 드러내지 않으려는 사실 말이다.
서구 언론들은 현실에서 벌어지는 르완다 대학살을 대대적으로 보도했지만, 그것은 단지 '미개한' 아프리카 부족 간의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그려질 뿐, 그 밑에 깔려 있는 제국주의 유령은 보지 못하고 있었다.
르완다 대학살의 뿌리는 바로 벨기에 제국주의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이다. 벨기에는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패배한 독일로부터 르완다와 부룬디를 넘겨받아 위임 식민통치를 해왔다.
독일은 1895년부터 르완다와 부룬디, 탄자니아를 묶어 독일령 동아프리카로 통치해왔으나 1차 세계대전 패배 이후 탄자니아는 영국에, 르완다와 부룬디는 벨기에에 넘겨줘야 했다. 콩고민주공화국과 함께 르완다, 부룬디 등이 프랑스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는 것은 프랑스어권인 벨기에의 식민통치를 받았기 때문.
벨기에는 식민통치기간 다수파인 후투족 대신 소수파인 투치족을 적극 우대하고 주민등록증에 인종을 기입하도록 하는 등의 인종분리 정책과 중화주의에 기반을 둔 중국식 제국주의 통치방식인 '오랑캐는 오랑캐로 다스린다'는 이이제이(以夷制夷) 식민통치 전략을 사용했다.
그러던 벨기에는 소수파인 투치족이 1950년대부터 독립 움직임을 보이자 그동안의 투치족 우대 정책을 버리고 후투족 우대 정책으로 바꾸면서 두 부족 간의 갈등을 더욱 증폭시켰다. 르완다는 남한면적의 1/4밖에 안 되는 작은 나라인데다 인구도 740만 밖에 되지 않는다. 후투족이 85%로 압도적이고, 투치족은 15%이고, 피그미족인 바트와족이 1% 정도이다.
르완다뿐 아니라 세네갈의 인종폭동과 앙골라 내전, 소말리아 분쟁, 부룬디의 내전 등 아프리카 분쟁의 주요 원인은 민족적 종교적 상황을 무시하고 서구 제국주의가 멋대로 국경을 분할하고 이이제이 정책을 펼친 탓이다.
중동의 팔레스타인 문제의 경우도 팔레스타인 국가는 인정하지 않으면서 이스라엘 국가만을 멋대로 인정한 영국의 제국주의가 근본원인이다. 제국주의의 유산으로 아프리카와 중동(서아시아)은 지금도 커다란 홍역을 앓고 있다.
르완다에 팔짱을 낀 유엔
두 번째 놀라운 사실은 르완다에서 대학살이 이뤄지는 동안 르완다에 있던 유엔(UN) 평화유지군이 사실상 팔짱만 끼고 방관했다는 것이다. 지난 1993년 2500명의 유엔 평화유지군(UNAMIR)을 르완다에 파견했던 유엔은 1994년 4월 초 후투족의 투치족에 대한 대량학살이 자행되자 이를 막기는커녕 오히려 바로 270명만을 형식적으로 남기고 병력을 철수해 버렸다.
걸핏하면 자유니 민주주의니 인권이니 정의니 하면서 제3세계의 내정까지 간섭하려 드는 미국과 영국, 프랑스 등 이른바 서구 선진국들이 최악의 인권침해 앞에서 눈길을 돌린 것은 어떤 이유 때문일까. 석유도 다이아몬드도 나오지 않고, 이미 냉전이 해체되어 이념적 전초기지의 역할도 하지 못하는 머나먼 아프리카의 작고 가난한 르완다의 이권 없는 전쟁에 굳이 개입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지난 1990년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하자 다국적군이라는 이름으로 쿠웨이트를 구하기 위해, 아니 쿠웨이트가 가지고 있는 석유를 지키기 위해 쏜살같이 달려갔던 그들 아닌가.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과 레바논 등 중국국가들에 대해 자행하는 국가적 테러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하면서 이슬람 일부 과격파들의 이스라엘에 대한 테러에 대해서는 '테러와의 전쟁'으로 응수하는 그들이다.
학살 방조자가 막은 자를 심판하는 프랑스의 적반하장
더 놀라운 사실은 최근 프랑스 사법부가 현 르완다 대통령과 집권층에 대해 벌이는 재판이다. 프랑스 사법부는 2006년 11월 대학살의 직접적 계기가 된 하비아리마나 대통령의 비행기 추락에 책임이 있다며 현 르완다 정권의 육군참모총장 등 주요 인사들에 대한 체포영장을 발부했다.
하비아리마나 대통령의 전용기를 몰다 함께 숨진 비행기 기장과 부기장, 정비사 등이 프랑스인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프랑스는 벨기에를 대신해 르완다에 주둔하면서 하비아리마나 독재자를 지지하고, 르완다 대학살 당시에는 학살에 참여하던 후투 정부군을 적극 지원해 학살에 책임이 있는 당사자이다.
프랑스 내부에서도 르완다 대학살에 대한 프랑스군의 책임문제에 대한 진상요구가 불거졌으나 '국가기밀'이라는 이유로 묵살되었다. 만약 프랑스인이 100만 명 희생되었다면 반인도적 범죄인 대량학살 행위에 대해 국가기밀이라는 터무니없는 이유로 진상규명을 피해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백인이든 흑인이든, 유럽이든 아프리카든 인권보다 우선하는 가치는 없는 것이다.
아프리카단결기구(OAU) 르완다 대학살 진상조사위원회(위원장 케투밀레 마시레 전 보츠와나 대통령)는 이미 지난 2000년 7월 "지난 94년 르완다 대학살에는 사태를 미리 막을 수 있었음에도 행동에 나서지 않은 미국과 프랑스, 유엔 등에 책임이 있다"고 규정하고 국제사회, 특히 르완다 대학살에 책임이 있는 국가들에 대해 유사한 사태의 재발을 막기 위한 노력과 학살 희생자에 대한 보상을 촉구했다.
프랑스인들의 눈에는 독재자의 전용기를 몰던 프랑스인 3명의 인권이 르완다인 100만 명의 인권보다 더 소중했던 것인가. 프랑스의 속셈은 다른 데 있는 것이다. 반인도적 대학살에 대한 프랑스의 책임문제를 단순히 비행기 테러라는 사건으로 성격을 돌림으로써 현 카가메 르완다 정권을 테러 정권으로 낙인찍으려는 속셈이다.
부시 미 대통령을 비롯한 서방의 극우주의자들이 벌이는 테러와의 전쟁에 집어넣으면 누구라도 악의 축으로 단죄할 수 있으니까. 냉전시대에는 자신들의 이념에 따르지 않는 나라나 인물을 공산주의자로 낙인찍었고, 냉전 해체 이후에는 테러리스트라는 주홍글씨를 새기는 것보다 더 좋은 공격수단은 없기 때문이다.
대량학살을 방조했던 프랑스가 대량학살을 막았던 현 르완다 정권을 심판하겠다는 역사의 아이러니가 벌어지고 있다. 물론 카가메 대통령은 개입 자체를 부인하고 있다. 르완다는 이 사건을 계기로 프랑스와의 외교관계를 단절했다.
영화 <호텔 르완다>는 사실이다
분명한 것은 대학살을 막은 것은 인권과 평화를 부르짖던 유엔도, 미국도, 영국도, 프랑스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현 르완다 대통령인 카가메가 이끌던 투치족과 온건 후투족 등으로 이뤄진 르완다애국전선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현 르완다 정권은 "투치도 없고 후투도 없고, 오직 르완다인만 있을 뿐이다"는 국민통합의 기치를 통해 아픈 과거를 빠르게 치유해 가고 있다.
우간다의 요웨리 무세베니 대통령과 함께 르완다의 카가메 대통령은 아직 완전한 민주주의를 실시하지는 못하지만, 다당제 실시 등으로 인종 간의 대량학살을 끝내고 국민통합과 경제발전을 성공적으로 추진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르완다 대학살의 참상과 유엔, 서구 유럽의 위선에 대해서는 지난 2004년 제작된 미국영화 <호텔 르완다>가 아주 사실적으로 그려 내고 있다. '아프리카판 쉰들러리스트'로 불리는 이 영화는 대학살 기간 중 1268명의 투치족과 후투족 난민들을 구한 호텔 지배인 폴 루세사바기나의 영웅적인 실제 이야기를 다룬 것이다.
후투족 출신인 폴 루세사바기나(Paul Rusesabagina)는 자신의 호텔인 키갈리의 밀 콜린스 호텔(Hôtel Des Mille Collines)에 이들을 숨겨줘 목숨을 건졌다. '천의 언덕'이라는 뜻의 프랑스어인 밀 콜린스 호텔은 지금도 독립광장 옆에 있는 고급호텔이다.
탄자니아 아루샤에서 보았던 충격적 성직자 재판
르완다 대학살에 가려진 또 다른 부끄러운 사실은 일부 가톨릭 신부와 수녀, 기독교 목회자들이 대량학살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다는 것이다. 르완다는 벨기에의 식민지 영향으로 가톨릭이 65%이고 기독교가 9%, 이슬람이 9%인 사실상 가톨릭 국가인 셈이다. 평소 특정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도 막다른 상황에서 성직자에게 의지하는 것은 종교의 보편적 사랑 때문이다.
나는 르완다를 거쳐 탄자니아 아루샤(Arusha)에 있는 르완다국제형사재판소(ICTR)를 방문했을 때 가톨릭 신부가 투치족 대량학살에 가담한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한 그리스도 재림교회 목사는 대량학살 혐의로 이미 10년형을 선고받아 복역 중이었다.
르완다 자체 법정에서는 병원에 근무하던 가톨릭 수녀에게 투치족을 분리해 후투족 민병대에게 넘겨줘 살해하도록 한 혐의로 30년형을 선고하기도 했다. 벨기에 법정도 지난 2001년 수도원에 숨어 있던 투치족을 내쫓아 7000명을 살해하도록 방조한 혐의로 두 명의 수녀에게 15년형을 선고했다.
바티칸 교황청은 가톨릭 성직자들의 대량학살 개입에 대한 진상조사나 사과를 한 적이 없다. 인간에 대한 사랑과 구원을 외치는 교황청의 이런 행태는 프랑스 정부의 위선과 별로 다를 바가 없다.
르완다 대학살 뒤에는 이처럼 제국주의의 유산과 서방 선진국들의 부끄러움, 일부 성직자의 위선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인간성을 상실한 채 제국주의의 악령이 되었던 소설 <어둠의 속(The Heart of Darkness)>의 주인공 커츠가 찾던 상아조차도 없는 르완다에 그들이 관심을 가질 리 없었던 것이다.
이름 없이 빈 공간으로 남겨진 하얀 돌 판
서구 언론들이 서구의 시각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지 모른다. 서구의 시각으로 세계와 역사를 바라보는 교육을 받았을 테니까. 우리가 아프리카의 역사, 주민, 지도자와 기아의 원인에 대한 잘못된 시각은 대부분 서구 언론의 왜곡된 보도 때문이다. 르완다 학살에서 보듯 서구 언론은 피상적 학살 장면은 보도하지만, 그 뿌리에 대해서는 애써 눈을 감는다.
문화주권뿐 아니라 뉴스를 보도하는 정보 주권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 수 있다. 우리는 오랫동안 우리의 주체적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지 못하고 서구 언론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본 것이다. 아시아에 살면서 아시아 시각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유럽 시각으로 아프리카를 보았으니 허상을 보아온 셈이다.
학살의 증언장으로 변한 은타라마 성당에서 나오니 바로 옆에 하얀 돌 판이 세워져 있다. 사망자의 이름을 새겨놓은 비석 같은 돌이다. '칸다마(Kandama)'라는 이름 등이 빼곡히 적혀 있는데, 아직도 빈 공간이 많이 남아 있었다. 여직원은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사람들이 더 많다"고 말했다.
은타라마에서 5km 떨어진 니아마타 기념관 역시 과거에 가톨릭 성당으로 사용되던 교회였다. 은타라마와 니아마타에서 투치족들이 집단 학살을 당한 것은 이 지역이 투치족들이 집단으로 살던 마을이기 때문이다. 나는 기념관을 떠나기 전 입구의 사무실에 놓여 있는 방문록에 서명하고 적은 돈을 기부했다.
커다란 나무가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시골마을의 작은 교회에서 이런 끔직한 일이 일어났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기념관을 나오자 은타라마는 작은 언덕과 푸른 나무들이 파랗게 자라는 평온한 농촌마을로 되돌아 와 있었다.
은타라마 기념관에서 돌아온 나는 오카피 호텔의 침대에서 잠시 쉬었다. 은타라마 기념관의 유골들이 떠오르면서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키갈리를 떠나 탄자니아 루수모로 가다
다음날 아침 나는 일찍 탄자니아를 향해 떠났다. 벌써 따가운 햇살이 키갈리의 언덕 위에 비추고 있었다. 200프랑을 주고 오토바이 보다보다를 타고 탄자니아의 국경도시인 루수모로 가는 버스 정류장으로 갔다.
국민통합광장 아래로 독립광장(Place de l'Indépendance)이 따로 있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7월 1일은 르완다가 지난 1962년 벨기에로부터 독립한 날이다. 그러나 도로에는 국기도 보이지 않고 차분했다.
키갈리를 떠난 봉고버스가 카욘자와 키분고 지역을 지나 탄자니아 국경 근처에 다다르자 도로가에 세워진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UNHCR) 간판이 보였다. 대학살 때 탄자니아와 부룬디, 콩고민주공화국, 우간다 등 국경지대를 둘러싸고 수많은 난민촌이 만들어진 것이다.
봉고 차량은 키갈리를 떠난 지 3시간 15분 정도 걸려 낮 12시 15분께 국경마을 루수모에 도착했다. 르완다의 출국 수속은 매우 친절하고 빨랐다. 르완다에서의 일정은 1박2일의 짧은 일정이었지만 편안하고 안전하면서도 기분 좋은 여행이었다. 르완다는 수도 키갈리와 농촌지역의 차이도 다른 아프리카보다 훨씬 적었다.
시체가 흘러가던 루수모 폭포에 무지개가 피었다
르완다 국경을 지나 탄자니아 국경으로 넘어가는 데 계곡으로 강이 흐르고 30m 길이 정도의 다리가 놓여 있었다. 나의 기분을 아는 듯 작은 무지개가 활짝 웃으며 바위 위에 떠 있었다. 작은 폭포에서 떨어지는 강물이 부딪히는 바위 위에 무지개가 걸려 있었다.
작은 폭포는 루수모 폭포이고, 다리 밑을 흐르는 강은 카게라(Kagera) 강이다. 부룬디에서 시작해 탄자니아와 르완다의 국경을 가르는 카게라 강은 북쪽으로 흘러가다 다시 동쪽으로 방향을 바꾸면서 탄자니아와 우간다의 국경을 나누면서 빅토리아 호수로 흘러들어간다. 백나일강의 가장 먼 수원중의 하나이다.
지금은 푸른 나무들이 우거지고 아름다운 무지개가 여행객을 맞이하는 루수모 폭포의 다리 밑으로 지난 94년 대학살 때는 수많은 시체가 떠내려갔다. 지금 내가 건너고 있는 이 루수모 폭포 다리로는 수십만 명의 난민들이 피난을 갔다.
금세기 최단기간 최대 탈출로 기록되는 난민들은 루수모 건너 탄자니아의 은가라(Ngara)와 베나코(Benaco) 지역의 난민촌으로 가는 행렬이었다. 며칠 사이 다리를 건넌 난민의 숫자는 무려 50만 명. 살아서 다리 위를 건너는 자는 대량학살을 주도했던 후투족이었고, 시체가 되어 다리 밑 강으로 흘러가는 자는 투치족이었다.
카게라 강에 버려진 무고한 시체들은 강줄기를 따라 르완다와 탄자니아, 탄자니아와 우간다의 국경을 따라서 빅토리아 호수로 흘러들어갔다. 한동안 핏빛의 붉은 강물로 변한 아름다운 카게라 강과 빅토리아 호수는 인류의 비극을 안고 오랫동안 침묵의 강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