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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랫줄에 널어 둔 가죽자반
빨랫줄에 널어 둔 가죽자반 ⓒ 전희식
한번은 어머니가 마루에 나오시더니 부엌에 있는 나를 불렀다.

“저기 먹꼬? 가죽나무가? 옻나무가?”

마당 왼쪽 편에 수십 년 된 고염나무하고 배나무가 있다. 어머니는 그 가운데 까마득하게 키가 자라서 끝에 연한 갈색으로 피어나 있는 가죽나무 잎을 가리키셨다. 어두운 눈에 가죽나무와 옻나무가 잘 식별되지 않았을 거다. 나는 대뜸 어머니의 속내를 알아차렸다.

어릴 적에 먹던 가죽자반 생각이 났다. 어머니가 할아버지 상에 먼저 올리고 나면 우리형제들은 우리 차례가 올지 안 올지 손가락을 빨며 어머니의 다음 처분을 기다리던 기억이다. 그 귀한 설탕까지 살짝 묻혀 내 놓는 가죽자반은 바삭바삭 씹히는 소리조차 맛을 더했다.

“글쎄요. 저게 뭐죠?”

나는 능청을 떨며 긴 대나무 장대를 가져와서 끝에 낫을 묶었다. 어머니는 마루 끝으로 바짝 다가와 앉았다. 나뭇가지를 하나 꺾어 드릴테니 뭔지 봐 달라고 했다.

“암매. 가죽 일 끼라. 옻나무가 저리 안 크거등!”

나뭇가지를 매년 잘라내다 보니 나무가 위로만 자라서 나뭇잎이 정말 까마득했다. 낫이 매달린 장대를 치켜들고 가죽나무에 올라가려고 하자 어머니는 걱정이 되시는가보다.

“안 뿔거지도록 단다이 짬매라. 장대 끄트머리는 깍 검저!”

‘깍 검저’라는 말을 듣고 나는 어머니를 되돌아보았다. 벌써 10여 년 전이다. 큰 애가 초등학교 2학년 때던가? 우리 집에 다니러 오신 어머니가 동전 한 닢을 쥐어주면서 손녀에게 “깍 검저라”고 하셨나보다.

쪼르르 달려 온 아이가 “아빠 깍검저가 뭐예요? 할머니가 이거 100원짜리 동전을 깍검저래요” 해서 우리 부부가 한참을 웃었었다.

괜한 걱정 끼쳐드리겠다 싶어 에이(A)자 형 알루미늄 사다리를 갖다놓고 가죽나무를 꺾어 내렸다. 어머니에게 갖다드렸더니 얼굴이 활짝 펴지신 어머니는 가죽나무가 맞다고 탄성을 지르셨다.

그럴 줄 알았지만 역시 어머니는 당장 찹쌀 풀을 끓여 달라고 하셨다. 이미 오전에는 효소 담그고 건져 낸 매실을 까서 장아찌를 만들기로 되어있었는데 어머니 마음은 이미 가죽자반으로 가 있었다.

애처럼 변덕을 부릴 때는 어떻게 감당할 도리가 없다. 매실 다 까고 하자니까 이 매실 다 깔려면 몇 달 걸릴지 모른다고 짜증을 냈다. 다 우려 낸 매실 껍질이 무슨 반찬이 될 거냐고도 했다.

근 30리 길인 장계 농협에 가서 찹쌀가루를 사 왔다. 유기농으로만 음식을 만들려고 하지만 이날은 어쩔 수 없었다. 어머니 일거리를 만든다는 뜻이 더 컸다. 누구나 하고 싶은 일을 하면 힘든 줄 모르는 법.

오후 내내 어머니는 가죽 잎에 내가 끓여다 준 찹쌀 풀을 묻히고 서너 줄기씩 묶었다. 나더러 잘 마르게 빨랫줄에 갖다 걸라고 하셨다. 짚으로 묶어야 한다고 해서 아랫마을 몇 집을 다니면서 짚을 한 단 구해 왔었다.

양 손에 풀이 발려 오줌 누러 못 간다면서 앉은 채로 오줌을 누셨다. 옷을 벗으라고 해도 하던 일 다 하려면 오줌 몇 번 더 눠야 한다면서 끝내 옷을 안 벗었다. 걸레로 어머니 앉은자리 주변 마루만 닦았다.

밀려 있는 내가 할 일들을 돌아 볼 겨를이 없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한국농어민신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가죽자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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