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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웅담의 시작, 도봉산
ⓒ 이희동
현충일에 나선 산행

현충일 정오께 산을 오른다며 집을 나섰다. 낮 12시, 등산을 하기에는 결코 만만치 않은 시각이었지만 휴일 아침 수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줄을 서서 산을 오르느니, 조금 급하겠지만 차라리 호젓하게 산을 타는 편이 낫다는 판단에서 택한 시간이었다.

물론 그와 같은 결정에는 산을 오르는 나의 발걸음에 대한 과신이 전제되었음이 사실이다. 들어가는 나이와 달리 한결같은 나의 마음. 어른들은 이를 철없다고 했던가.

오늘 향하는 곳은 사패산. 이전에는 사패산에 대해 사패터널 찬반과 함께 도봉산의 한 자락으로서 알고 있는 것이 고작이었지만, 언젠가 TV에서 접한 사패산은 생각 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태극오종주'라 해서 불암산, 수락산, 사패산, 도봉산, 북한산이 거론되고 있었고, 비록 화면을 통해서였지만 사패산에서 바라본 삼각산의 모습이 너무도 아름다웠기에 언젠가 한 번 가야겠다고 마음먹은 터였다.

지하철을 타고 북으로, 북으로 향했다. 보통 이런 화창한 날이면 정말 타기 싫은 전철이지만 그래도 1호선은 시내 지하 구간을 제외하고서는 봐 줄만 하다. 어쨌든 햇살이 들고 창밖으로는 산과 강이 보이지 않는가. 비록 강남과는 다른 강북 모습에 조금은 처연해지는 것이 사실이지만 어쨌든 소요산행 전철 1호선은 매력적인 여행임이 분명했다.

▲ 북쪽으로 갈수록 더 많이 걸려있는 태극기
ⓒ 이희동
특히 1시간쯤 지나 등장한 도봉산의 모습은 나의 기억을 8년 전 이맘때로 몰고 갔다. 논산 훈련소에서 나와 어디로 실려 가는지도 모르는 채 기차에 몸을 실을 수밖에 없었던 나.

의정부는 서부 전선을, 춘천은 동부 전선을 의미했던 당시, 갑자기 창밖으로 턱 하니 모습을 드러낸 도봉산은 내게 하나의 환희였다. 어쨌든 집에서 가까운 서부 전선으로 배정받았다는 안도감이 도봉산에 투영된 결과였다.

북으로 올라갈수록 눈에 띄는 건 다름 아닌 태극기였다. 현충일 집 앞에 걸려 있는 태극기 보는 것이 무슨 대수겠는가만은 요즘 같이 '애국'을 강요할 수 없는 시대, 북으로 향하면 향할수록 더욱 많아지는 태극기의 행렬은 나의 심사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평균소득이 떨어질수록 국가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이 강해진다는 뜻일까? 혹 그것은 우리 사회의 계급적 불일치, 즉 극빈층이 오히려 부유층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정당을 지지하는 것과 관련 있지 않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덧 의정부 회룡역이었다. 회룡(回龍). 지명에 '龍' 자가 들어간 걸로 봐서는 어째 이성계가 자꾸 연상되었다. 웬만한 이가 아니고서는 용이라는 단어가 쉽게 쓰일 수 없을뿐더러, 북한산과 도봉산에 그의 발자취가 적지 않기 때문이었다. 뭐, 회룡사에 가면 그 궁금증은 곧 풀리겠거니.

사패산 오르는 길

회룡사역에 내려 김밥 한 줄에, 양갱, 초코바를 배낭에 사 넣은 채 든든한 마음으로 산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하나의 징크스겠지만 그래도 산을 오를 때면 항상 양갱과 초코바에 손이 가게 된다. 가끔 오이를 사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수분섭취는 물로 때울 수 있다는 생각에 먼저 챙기는 것은 역시 달짝지근한 것들이다.

회룡역에서 사패산 가는 길은 전형적인 의정부 주변 등산로였다. 변변한 안내판 하나 없이 저기 보이는 산을 향해 마냥 발걸음을 옮겨야 하는 등산객들. 하지만 그 중간에는 그 어떤 설명도 필요 없는 진솔한 삶의 모습들이 펼쳐지고 있었다.

▲ 회룡역과 그 주변 골목길
ⓒ 이희동
어렸을 때나 볼 수 있었던 그 좁디좁은 옛날 골목들. 그곳에는 다른 관광지처럼 호화스런 음식점이나 삐끼들 대신 가지런히 널린 빨래들과 개구쟁이들의 얄궂은 웃음소리, 그리고 종종 대문을 열어놓아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우리네의 일상이 자리하고 있었다.

마을 어귀를 벗어나자 곧 수려한 바위산이 나타났고 눈앞으로는 맑은 시냇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곳에서 아이들이 누가 보든 아랑곳하지 않고 바짓가랑이를 둥둥 걷어붙인 채 환한 웃음으로 물장구를 치고 있었다. 다시 한 번 느끼지만 아이들을 흙에서 키워야 한다는 말은 전적으로 옳다.

▲ 물놀이에 정신없는 아이들
ⓒ 이희동
전 인구의 절반이 수도권에서, 전 인구의 82%가 도심에서 사는 우리의 현실. 물론 나도 그 중의 하나지만 과연 그곳에서 자란 아이들은 어떤 감수성을 갖게 될 것이며, 또한 그들이 만들어내는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현재 농촌에서 주거하거나 그곳을 고향으로 삼는 세대가 떠나고, 도심에서 자란 이들이 중장년이 된다면 과연 지금의 땅들은 어떻게 무엇으로 바뀌어 있을까.

시내를 따라 허름하게 지어진 주택가를 지나니 오두막 비슷한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국립공원 안내소였다. 안내원은 이미 예고된 바와 같이 국립공원 통행료를 받는 대신 등산용 지도를 나눠주며 이것저것 설명을 해주고 있었다. 국가의 통제 대신 나름 친절한 서비스를 받고 있자니 이렇게 어색할 수가.

안내소를 거쳐 머리 위로 굉음을 내지르는 서울외곽순환도로를 지나고 나니 산길의 시작이었다. 그래도 이제 여름이라고 골짜기마다 적지 않은 이들이 북적대고 있었지만, 휴일의 늦은 시각에 점점 흐려진 날씨 탓인지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은 편은 아니었다. 난 곧 혼자가 되었고 그렇게 익숙한 모습으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이윽고 회룡사. 도착하자마자 안내판을 찾아 가 그 앞에 섰다. 역시 제일 궁금했던 건 회룡이란 사찰명의 유래였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사찰명은 이성계가 함흥에서 돌아와 이곳에 들른 바에서 연유하고 있었다. 조선 초, 아직 중국의 사대사상에 완전히 물들지 않았던 그 당시 이성계는 자칭, 타칭 용의 칭호를 얻었을 것이다.

회룡사는 그 명성만큼 화려한 사찰이 못 되었다. 물론 전철역 이름 때문에 얻은 유명세이겠지만 어쨌든 사찰의 전각들은 대게가 1940년대 이후에 재건된 것들이었고, 사찰의 전체적인 짜임새도 엉성해 보였다. 다만 그 위 석굴암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낫다고들 하는데, 워낙에 늦게 시작한 산행이라 그곳에서 미적거릴 시간은 없었다. 사찰을 나서며 법당 밑에 길게 누워 평화롭게 잠을 자고 있는 백구 한 마리만이 눈앞에 아른거릴 뿐이었다.

▲ 회룡사를 지키는 백구 녀석
ⓒ 이희동
다시 시작된 산행. 나이에 3자가 들어가서인가, 역시 체력이 예전 같지 않았다. 비록 쉬지는 않았지만 더 많은 땀을 흘려야 했고 더 가쁘게 숨을 헐떡여야만 했다. 빈번하게 돌아보는 등 너머 도시 풍경.

드디어 계곡의 끝. 저 멀리 능선과 계곡이 만나는 지점이 보였다. 10년 전 산이 처음이라던 친구와 등산하면서 이맘께 얼마나 많은 감언이설을 쏟아내어야 했던가. "저기 끝이 보인다, 다 왔네", "하늘이 보이니 끝이야",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 등. 하지만 10년 후 그 선의의 거짓말을 지금 나 자신에게 하고 있을 줄이야.

계곡의 마지막 급경사를 이겨내자 곧 완만한 능선길이 펼쳐졌고 발걸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완만한 경사도 경사였지만, 양옆의 계곡으로부터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나의 수고를 한결 덜고 있었다.

▲ 거짓말을 이쯤 해서 시작됩니다
ⓒ 이희동
얼마나 걸었을까. 저 멀리 아스라이 보이던 허연 화강암 바위가 드디어 차차 그 위용을 드러내었다. 사패산의 정상.

정상의 바위는 '마당바위'라는 그 이름에 걸맞게 매우 넓고 평평했다. 북한산 백운대는 그래도 정상이라 부를만한 우뚝 솟아나온 바위라도 있지, 사패산의 마당바위는 평평한 것이 왠지 더 올라갈 곳이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나마 정상에서 목 놓아 '아이스께끼'를 외치는 아저씨 덕분에 이곳이 정상이려니.

그러나 사패산의 매력은 그 정상 자체보다 정작 눈앞으로 펼쳐진 환상적인 풍경에 있었다. 수락산, 도봉산, 오봉, 삼각산 등 병풍처럼 펼쳐진 서울의 명산들. 비록 짙은 안개 덕에 실루엣 밖에 볼 수 없었지만 그것만으로도 가슴은 두근거렸다. 도대체 평소에는 어떤 장관이 펼쳐지는 것일까. 언젠가 다시 이곳을 오르겠다는 굳은 다짐만이 되풀이될 뿐이었다.

▲ 사패산에 바라본 서울 명산의 위용
ⓒ 이희동
다시 홍진으로

미련만 남긴 채 발걸음을 돌렸다. 비록 여름의 시작이었지만 산에서 떨어지는 해의 속도를 가늠할 수는 없었다. 7년 전 겨울 혼자서 느지막이 강원도 두타산에 올랐다가 해가 순식간에 떨어지는 바람에 죽도록 고생한 기억이 아직까지도 생생한 터였다.

그래도 못내 하산하기 아쉬워 조금이라도 더 많은 풍경을 보기 위해 올라올 때와 다른 길을 선택해 내려가기 시작했다. 곳곳에서 마주친 푯말을 보아하니 내가 내려가고 있는 곳은 범골의 호암사 방향이었다. 범? 호(虎)? 등산을 시작했던 동네 이름도 호원동이었건만 예전 이곳에는 호랑이가 많이 살았던가? 아님, 이성계를 호랑이로 지칭하기도 했을까?

시답잖은 나의 궁금증을 해결해 준 이는 손자의 손을 꼭 붙잡고 산을 타시던 어느 할아버지였다. 할아버지는 나 혼자 갔으면 그냥 그러려니 하고 지나갔을 어느 동굴을 가르치더니 바로 그곳이 범굴이라고 설명해주었다. 전해져 내려오는 말에 의하면 과거 이곳에 호랑이가 살았다 하며, 또한 이곳은 MBC 드라마 <허준>에서 허준의 스승 유의태 수술 장면의 촬영장소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할아버지의 설명대로 동굴 속에는 소품인 듯 'MBC 드라마'가 선명히 적혀있는 나무상자가 뒹굴고 있었으며, 그 한 편으로는 여러 인물상들이 머리가 잘린 채 기괴한 모습으로 모여져 있었다.

할아버지는 그 상들이 사패산 곳곳에 있었던 단군상들이고, 열렬한 기독교 신자들이 그것들을 모아 목을 베었다고 설명했지만 내 눈에는 소품 같아 보이는 것이 정체를 확신할 수는 없었다. 다만, 기독교의 비타협성은 어느 노객의 시각마저도 편협하게 만들 수 있다는 가능성만 확인했을 뿐이다. 그것이 친기독교든, 반기독교든 간에.

▲ 범굴의 목 잘린 인물상
ⓒ 이희동
동굴 바로 밑에는 호암사가 자리하고 있었다. 뻔지르르한 사찰의 모습에서도 유추할 수 있었지만 사찰은 역시나 1990년대 만들어진 것이었고 그 앞으로는 사찰까지 이르는 콘크리트 길이 뻗어 있었다. 그곳은 내가 8년 전 DMZ 내 GP를 오르던 그 길과 비슷했다. 눈이 오면 보급품을 전달해 주기 위해 죽어라 눈을 쓸며 오르내리던 바로 그 길.

헛웃음이 나올 수밖에. 그것은 분명 환경파괴였다. 산세가 좋으면 멀쩡한 산을 깎아 사찰을 짓고 콘크리트를 깔아버리는 그 가벼움. 아마도 콘크리트길의 용도는 차를 이곳 산 중턱까지 끌어오기 위함이겠지. 욕망을 버리기 위한 사찰에 욕망을 불러들이는 꼴이었다. 그런 이들에게 사패터널을 뚫는 것은 환경파괴라며 목 놓아 외칠 자격이 있는 걸까. 내가 하면 로맨스요, 남이 하면 불륜인가.

피곤한 콘크리트길을 내려오다 보니 길옆으로 우뚝 서 있는 바위 위에 얹혀있는 콘크리트 구조물들이 보였다. 뭔고 살펴보니 호암사까지 이르는 옛 길이었다. 그 역시 바위 위에 콘크리트로 계단을 낸 형국이었다. 욕망은 욕망을 낳는 법. 결국 그 구조물들은 하얗게 뻗은 콘크리트길의 과거형이었다.

▲ 호암사까지 뚫린 그 가벼운 길
ⓒ 이희동
산을 모두 내려가니 옆으로 졸졸 흐르던 계곡물이 휑하니 뚫려있는 콘크리트 구조물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으며, 사람 역시 서울외곽순환도로 밑으로 뚫려 있는 터널을 지나야 도심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 그곳은 하나의 경계였다. 모든 걸 콘크리트 밑으로 묻어버리는 도시와, 모든 걸 있는 그대로 발화케 하는 자연과의 경계.

하지만 별수 있는가. 나는 터널을 지났고 눈앞으로는 다시 답답한 고층 아파트 숲이 펼쳐져 있었다. 뒤를 돌아보니 언제 그랬느냐는 듯 사패산이 저만치 떨어져 나를 굽어보고 있었다. 기껏해야 얼마 되지 않는 길이의 터널을 통과했을 뿐인데, 나와 사패산의 거리는 마냥 멀게만 느껴졌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저 멀리 보이는 도봉산을 보며 또다시 감회에 젖어들었다.

▲ 저 너머 홍진
ⓒ 이희동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유포터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사패산, #도봉산, #회룡사, #범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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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물류와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을 했었고, 2022년 강동구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일상의 정치, 정치의 일상화를 꿈꾸는 17년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제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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