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정부의 고질적 문제점 중 하나는, 외교 협상이든 대북 협상이든 간에 대외적 협상에만 나가면 번번이 상대방에게 당하고 돌아온다는 점이다. FTA(자유무역협정) 협상, 한중·한일 협상, 남북회담 등 굵직한 대외협상들을 앞으로 계속해서 치러야 할 한국 정부는 대외협상의 문제점을 하나씩 고쳐 나가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한국 정부가 고려해야 할 것 중 하나는, 과연 자신에게 유리한 때를 협상 시점으로 삼아 왔는가 하는 점이다. 협상 시점의 유불리는 협상에서 심리적 우위를 확보할 수 있느냐와 관련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불리한 때를 협상 시점으로 삼게 되면 특별한 변수가 없는 한 그 협상에서 성공을 거둘 수는 없을 것이다.
만약 압도적인 물리적 우위를 확보한 상태라면, 어느 시점에서 협상하든 간에 기본적인 심리적 우위를 유지하면서 협상을 잘 풀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이 상대하는 나라들은 대개 한국보다 물리적 우위에 있는 나라들이다. 그러므로 그런 나라들을 상대로 협상에서 최대한의 성과를 거두자면, 적어도 심리적 측면에서만이라도 우위를 확보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최근에 치러진 한미FTA 협상도 기본적으로 미 의회의 스케줄에 맞춰 진행됐다. 미국의 스케줄에 맞춰 진행된 회담에서 한국이 어떤 결실을 맺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한국이 협상 시점을 제대로 선정하지 못함을 보여 주는 하나의 예가 될 것이다.
협상 시점의 선정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검토하기 위하여 좋은 모델과 나쁜 모델을 한 가지씩 살펴보기로 한다. 좋은 모델이란 오늘날의 북측 정부를, 나쁜 모델이란 7세기 초반의 동돌궐 정부를 말한다.
심리적 우위 확보 뒤 협상 나서는 '북한'
북측의 경우를 보자. 두 차례의 핵 대결에서 나타난 북측의 협상전략 중 하나는 상대방에 대한 심리적 우위를 확보한 다음에 대화에 착수한다는 점이다.
북측은 처음부터 자신에게 유리한 때를 협상 시점으로 삼는다. 만약 이미 오래 전에 예정된 협상이라면 협상 시점에 임박해서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전환시키거나, 혹은 협상이 임박했는데도 상황을 전환시킬 묘책이 생기지 않는 경우라면 형식적으로 회담에 참가해서 자신들의 기본 입장만 밝히고는 회담을 사실상 파탄 내고 돌아간다.
1993년 6월 2일은 제1차 핵 대결 당시 북측과 미국이 협상을 시작하기로 한 날이다. 그런데 북측은 그보다 나흘 전인 5월 29일에 하와이와 괌 앞바다에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떨어뜨려 미국 정부를 당혹하게 만들었다. 이에 관한 사실관계는 2001년 4월 27일자 AP 통신에 실린 마크 커크 미 하원 군사위원의 증언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이와 같이 기선을 제압하고 회담에 착수했기에, 제네바합의는 결국 '미국은 대북 핵위협을 제거하고 경수로 및 중유 등을 제공하는 대신 북측은 핵시설을 동결'하는 조건으로 체결될 수 있었다. 북측의 핵위협이 쟁점이 된 회담에서 도리어 미국이 대북 핵위협을 제거하기로 하는 엉뚱한 결론이 도출됐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진행되는 제2차 핵 대결에서도 북측은 번번이 회담을 지연시키고 있다. 그러다가 북측이 회담에 복귀하는 시점은, 회담 지연으로 인해 미국의 속이 탈대로 타버린 때였다. 미국의 외교적·경제적 압박이 거세져서 코너에 몰릴 것 같으면, 북측은 시간을 지연하고 회담 자체를 파탄 낼 것 같은 분위기를 조성하면서 심리적 우위를 다시 확보한 연후에야 회담장에 돌아왔던 것이다.
또 미리 예정된 남북회담에서 소득이 없을 것이라는 판단이 들면, 북측은 회담 참가에만 의의를 두고 그 성과에는 처음부터 기대를 걸지 않는다. 상황이 불리하다고 약속된 회담에 불참하면 국제적 신용이 떨어질 수 있으므로, 그런 경우에는 회담에 참석만 했다가 적당한 주장으로 상대방의 심기를 건드려서 회담을 사실상 파탄 내고는 돌아간다. 불리한 시점에서 상대방과 진지하게 협상했다가는 도리어 상대방에게 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라 들어 바쳐도 멸망 당한 '동돌궐'
이처럼 상대방에게 불리한 때를 회담 착수시점으로 잡는 북측과 달리, 7세기 초반의 동돌궐 군주 힐리가한(?~634년)은 자신에게 불리한 때를 협상 착수시점으로 삼았다가 결국 나라도 망치고 자신도 망치고 말았다.
수나라가 멸망(618년)한 이후 당나라를 압박하면서 숱한 금과 비단을 챙겨간 동돌궐은, 당 태종 이세민의 즉위(626년) 이후 기가 한풀 꺾이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당나라에 대한 동돌궐의 압박은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예컨대 627년에는 동돌궐이 사냥을 빙자해 당나라의 삭주 지방을 침략하기도 했다.
그런데 당시 힐리가한의 권력은 그리 견고하지 못했다. 이중적 권력 시스템이 작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힐리가한은 큰형인 시필가한의 아들을 돌리가한(可汗)으로 삼았다. 물론 힐리가한이 최고권력을 보유하고는 있었지만, 권력의 일정 부분은 또 다른 가한인 돌리가한에 의해 행사되고 있었다.
당 태종은 이 틈을 놓이지 않고 두 가한에 대한 분열작전에 들어갔다. 통일 직후의 수나라가 돌궐을 동돌궐과 서돌궐로 갈라놓은 것처럼, 당 태종은 동돌궐의 힐리가한과 돌리가한을 갈라놓는 전략을 구사했다. 당나라의 의도대로 힐리가한과 돌리가한이 반목을 거듭하던 끝에, 결국 629년 12월 돌리가한은 힐리가한을 배신하고 당나라에 투항하고 말았다.
돌리가한 세력이 당나라에 투항하자 상황이 불리해졌음을 깨달은 힐리가한은 당나라에 협상을 제의하기로 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힐리가한이 자신에게 불리한 때를 협상시점으로 삼았다는 점이다.
당나라 때의 역사를 기록한 <구당서> 권194 돌궐열전 상편에 의하면, 힐리가한은 630년 4월에 사신을 보내 죄를 청하면서 당나라에 내부(來附)하겠노라고 밝혔다. '내부'는 자신의 지위와 영토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다른 나라의 행정단위로 편입되는 것을 말한다. 요즘 한미관계에서 유행하는 말로 하면, 동돌궐이 통째로 당나라의 '51번째 주'가 되겠다고 한 것이다. 자신의 지위만 보장해 주면 나라를 들어 당나라에 투항하겠다고 제의한 것이다.
힐리가한 입장에서는 자신의 처지가 절박했기 때문에 그런 협상을 제의했겠지만, 당시의 국제정세로 보면 힐리가한의 판단은 최선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당시 당나라 동쪽에는 고구려가 버티고 있었고 당나라는 고구려 때문에라도 동돌궐에 모든 힘을 쏟아 부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힐리가한은 심리적 곤궁에 쫓긴 나머지 상대방이 기대한 것 이상의 카드를 내밀었던 것이다.
상대방이 불리한 때가 아닌, 자신이 불리한 때에 협상을 제의한 힐리가한은 결국 어떻게 되었을까? 만약 다른 때에 힐리가한이 그런 제의를 했다면, 당나라에서는 쌍수를 들면서 환영을 하고 힐리가한이 해달라는 것은 뭐든지 다 해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힐리가한이 자신에게 불리한 때에 협상을 제의해 오자, 당나라 정부에서는 오히려 힐리가한의 약점을 간파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당 태종은 홍로경 당검과 장군 안수인을 보내 힐리가한의 요청을 들어줄 것처럼 해서 일단 그를 안심시킨 다음에 군대를 보내 아예 동돌궐을 붕괴시켜 버렸다.
위와 같은 두 가지의 사례를 볼 때, 어느 때를 협상 시점으로 잡을 것인가 하는 것은 대외협상 전략에서 매우 기본적인 문제에 속한다. 북측의 경우에는 자신에게 유리한 시점을 잡아 협상에 착수했기에 세계 최강 미국으로부터 양보를 얻어낼 수 있었고, 동돌궐의 경우에는 자신이 극도로 불리한 시점을 잡아 협상을 제의했기에 도리어 당나라에게 멸망되고 말았다.
서두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앞으로 한국 정부에게는 굵직한 대외협상들이 놓여 있다. 한국의 협상 상대방은 대개 한국보다 물리적 우위에 있는 나라들이다. 그런 나라들을 상대로 최대한의 성과를 거두려면, 일단 협상시점 선정에서부터 고도의 전략적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