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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밤에는 술을 좀 마셨다. 저녁 식사자리에서, 멀어지는 스캐그웨이를 바라보며 홀짝거린 술이 선실에 와서도 이어지고 그리고는 쓰러져 잠이 들었다. 눈을 뜨니 새벽 6시, 그 사이에 배는 밤새 달려 또 다른 항구에 벌써 진입해 있었다. 쥬노(Juneau)였다. 하늘은 다시 흐리멍덩해졌고 한 줄금 비라도 쏟을 듯 암울한 기색이었다.

▲ 쥬노항에 정박한 프린세스호
ⓒ 제정길
이른 아침으로 속을 달래고 서두를 것도 없이 천천히 배에서 내려 쥬노 땅에 들어섰다. 어제 스캐그웨이에서 와는 달리 오늘은 아무런 사전 관광 예약을 하지 않았다. 예약을 해둠으로써 받아야하는 시간의 구속감이 싫었고, 또 배에서 보다 현지에 내려 직접 표를 사면 더 싸게 관광을 할 수 있다는 정보도 있어서였다.

쥬노는 제법 큰 도시였다. 시가도 제대로 형태를 갖추었고 사람들도 차들도 꽤 많았다. 자료에 보니 쥬노는 알래스카 주의 주도(州都)이고 인구도 3만명이나 되었다. 한 때(1880년대)는 세계 3대 금광의 하나로서 2차대전 말까지 1억 5천만불어치의 금이 채굴되기도 했던 이 도시는 이제 금은 사라졌지만 금보다 더 좋은 현금을 찾아 나선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게다가 일개 도시로는 그 땅 넓이가 3248평방마일나 되는 세계 최대 크기의 도시 중 하나다.

▲ 쥬노의 도심지역, 중간의 사각형 건물이 주 청사
ⓒ 제정길
관광안내센터를 찾아가니 역시 예상했던 대로 다양한 관광코스가 배에서보다는 싼값으로 즐비하게 대기하고 있었다. 다만 비가 올 것 같아 야외 활동이 많은 것은 피하는 게 좋을 듯해서 망설여졌다. 케이블카를 타고 로버츠(Roberts) 산에 올라가는 것과 버스를 타고 맨댄홀(Mendenhall) 글레시어를 찾아보는 것, 두 가지를 샀다.

▲ 흰 머리 독수리, Juneau Raptor Center에서
ⓒ 제정길
로버츠 산에 올라가는 케이블카는 부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케이블카를 타기위해 사람들은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타자마자 10분도 안 되어 산 정상부근에 우리를 실어다 놓았다. 산 위에서 보는 쥬노는 아름다웠다. 바다는 강인양 휘어져 들어와 연안에 닿아있고 바다가 미치지 못 하는 곳에서 산들은 높이 솟아 눈을 머리에 이고 있었다. 도심은 산과 바다가 접하는 지점에 둥지를 틀었고 그 사이로 배 한척 물보라를 일으키며 둘 사이를 오갔다.

▲ 쥬노 원경
ⓒ 제정길
산에는 작은 트레일 코스가 있었다. 길을 따라 나서자 눈은 허리가 빠질 만큼 길옆으로 쌓여있고 사람들은 더러 눈밭에서 사진 찍느라 바빴다. 몇 백 미터를 올라가자 길은 끝나고 산 정상 눈 속에는 십자가 하나가 덩그러니 꽂혀있었다. 누구를 위한 손짓일까. 천년이나 살고 싶은 인간의 욕망은 눈 속에서도 얼지 않고 꼿꼿했다. 내려오는 길섶에 신기한 풀이 돋아나 있었다. 사진을 찍는 중년 아주머니에게 물어보니 인디언 캐비지란다. 인디언들이 저런 걸 먹었다는 뜻일까.

▲ 로버츠산에 자라는 인디언 캐비츠라는 식물
ⓒ 제정길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와 걸으면서 시내를 구경했다. 집들은 크고 번듯하고 거리는 사람들로 붐볐으나 차림새로 보아 그들 중 반은 관광객이었다. 하늘은 기어코 비를 쏟아 내었다. 사람들은 비를 맞으면서도 느긋하게 걸었다. 누군가가 물었다. 알래스카에서는 왜 사람들이 우산을 쓰지 않느냐고. 누군가가 대답했다. 비가 하도 자주 와서. 책에서 읽은 얘긴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 쥬노 시내
ⓒ 제정길
빗속에서 맨댄홀 글레시아행 관광버스를 탔다. 비는 더욱 세차게 내렸고 운전을 하는 중년의 흑인 여성은 지나치는 주변 경관을 설명하려 목소리를 돋우었으나 차창에 내려치는 비 때문에 제대로 보이는 것이 없었다. 30분 정도 걸려 맨댄홀 글레시어에 도착하였다.

▲ 맨댄홀 글레시어
ⓒ 제정길
빙하는 산과 산 사이의 겹쳐진 낮은 고원 위에, 나태한 녹아내린 엿판처럼 펑퍼짐하게 누워 있었다. '1500평방마일에 달한다는 거대한 쥬노 빙원의 하나인 몸집은, 하단은 바다에 담그고 상단은 산 쪽으로 고개를 기댄 채 조용히 잠을 자는 듯했다.

햇살을 받으면 영롱한 푸른빛을 내뿜는다는 글레시어(Glacier: 빙하), 그러나 오늘도 빗속에 잠기어 그의 푸른 빛깔을 제대로 보기는 어려웠다. 4번의 글레시어 알현 기회 마다 하늘은 번번이 구름의 장막을 쳐, 태양의 고개 내밈을 허락하지 않았다. 알래스카의 태양은 직장에서 쫓겨난 중늙은이처럼 무기력하고 나태하기 짝이 없어 보였다.

▲ 맨댄홀 글레시어
ⓒ 제정길
서울의 태양이 아파트 틈새로 비집고 들어와 시간에 지친 도회인을 닦달해 깨우고, 새크라멘토의 태양이 나뭇가지 사이로 햇살을 쏟아 부어 가지에 잠들어 있는 새들을 쫓아내 그들이 인간의 창에 가서 시끄럽게 울게 만든다.

사막 위 도시 킹맨의 태양은 거칠 것 없는 사막을 가로지르고 창문을 뛰어넘어 침대로 달려와 여독에 절은 여행객의 눈을 사정없이 후벼댄다. 그랜드캐니언의 태양은 봉우리마다를 형형색색으로 채색하여 호기심 많은 인간군상들이 태양이 떠오르기도 전에 기상해 자신을 맞게 한다.

그러더니 여기 알래스카의 태양은 어찌 보면 정신지체를 가진 동네 아저씨처럼 이른 새벽부터 기척도 없이 살그머니 일어나 비, 구름, 안개 속에 묻혀 있는 듯 없는 듯 하루를 보내다가 밤늦은 시간에 슬그머니 사라지기만 한다.

▲ 알래스카의 태양은 나약하다
ⓒ 제정길
이곳의 태양은 나약하고 선량하다. 산 위의 눈들을 늦봄까지 내쫓지 않으며 몇몇 곳에서는 아예 그들의 생에 관여하지조차 않는다. 집세를 내지 않고 무단 점유한 거주자를 모른 듯이 그냥 두는 집주인처럼. 그는 비보다도 약하고 구름에 감히 맞서지 못하며 안개를 슬슬 피해 다닌다. 어찌 보면 그는 알래스카의 '늘근백수' 신세일지도 모르겠다.

▲ 맨댄홀 글레시어 앞에 떠 있는 유빙
ⓒ 제정길
끝내 빗속에서 비 떨어지는 맨댄홀 글레시어를 망연히 보고 있다가 시간이 되어서 그대로 철수 하였다. 비를 맞으며 바다 위를 둥둥 떠다니는 유빙이 오늘 따라 쓸쓸해 보였다. 시간이 가면 언젠가는 물이 되어 물 속으로 사라지겠지.

빗속에서 다시 부두로 돌아와 빗속에서 승선을 하였다. 역시 알래스카는 비의 땅이 틀림없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한 평범한 '늘근백수'가 미국 등지를 떠돌며 보고 느낀 것을 기술해가는 여행기입니다. 여행은 4월 25일 시작되었고, 향후 두어달간 또는 그 이상 계속될 예정입니다.


태그:#쥬노, #맨댄홀 글레시어, #알래스카, #태양, #늘근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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