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과 한국의 6월은 20년 간격을 두고 '변화의 물결'로 꿈틀댄 날들이었다.
1967년, 베를린과 독일은 젊은이들의 저항의 목소리가 6월 하늘을 수놓았다. 1987년, 우리의 6월은 시민항쟁의 용암이 세차게 분출하는 격동의 시간이었다.
독일은 60년대 후반 들어 대학 및 사회개혁을 요구하는 젊은이들의 요구가 서서히 달아오르고 있었다. 1967년 6월 2일. 베를린에서 한 대학생이 독재자 이란 국왕의 독일 방문을 항의하는 시위 도중 경찰의 총격으로 사망한다. 이 사건으로 소수 대학생들의 개혁 요구 목소리에 많은 젊은이와 지식인들의 힘이 모아진다.
'항의'의 목소리는 '저항'의 물결로 옮아갔다. 부모세대의 어두운 과거인 나치 역사와의 단호한 단절이 준엄하게 요구되었다. 미국이 밀고 나가는 '부당한' 베트남 전쟁과 이에 동조하는 서독정부에 신랄한 비판의 화살이 집중되었다.
낡아빠진 권위적인 대학정책이 본격적인 비판의 도마에 오르고, 정부가 추진하던 비민주적인 '비상권한법'에 대한 분노가 증폭되는 등 서독의 각종 사회적 모순이 낱낱이 파헤쳐졌다.
독일 사회의 '근본적인 수술'에 대한 광범위한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저항은 베를린 담장을 넘어 전 독일로 들불처럼 번져 나간다. 이른바 독일 '68운동'의 진정한 시작이었다. 이로써 '한 대학생의 죽음'은 독일사에서 68운동의 '영원한 불꽃'으로 각인된다.
1968년에 절정에 달한 68운동은 독일의 사회·정치·문화적 지형도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68운동으로 수많은 사회적 터부가 무너지고 독일인은 한결 자유로운 공기를 누리게 되었다.
20년의 시간이 지난 1987년 6월 한국. 몇 달 전 한 대학생이 고문으로 사망한 일로 시민들의 분노가 쌓여가고 있었다. 6월 9일. 시위 도중 한 대학생이 최루탄에 맞아 쓰러지며 국민적 분노가 폭발한다. '두 대학생의 희생'은 반도의 6월 하늘을 뜨겁게 달군 이른바 '6월 시민항쟁'의 진정한 도화선이 된다.
전국 곳곳에서 수십 수백만의 시민들이 독재 정권에 맞서 저항의 깃발을 높이 치켜들었다. 정권은 결국 6·29선언으로 직선제 개혁이란 '백기'를 들고 시민들에게 무릎을 꿇었다. 6월 항쟁은 우리 사회가 민주화로 들어서는 중대한 길목이었다.
20년을 사이에 두고 독일과 한국의 6월 하늘에 울려 퍼진 사회적 불의와 모순에 저항하는 '거대한 함성'의 불길을 지핀 것은 꽃다운 젊은이들의 고귀한 목숨이었다.
독일과 우리의 6월. 묘하게 닮은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