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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해수욕장이 개장을 한다. 모든 것이 그렇듯 해수욕장에도 역사가 있고 거기에 비밀스런 역사가 있기 마련이다. 부쩍 일찍 들이닥친 여름 더위 때문에 전국 각지의 해수욕장이 개장준비에 겨를이 없는 6월 초입.

성큼 쫓아온 여름햇살에 뒤질세라 연포를 거쳐 채석포로 향하는 잰걸음을 가로막고 나선 것은 해수욕장이 만들어질 무렵 벌어졌다는, ‘연포 비사(秘史)’ 쯤 되는 이야기였다. 반신반의(半信半疑)하면서 30여 년 전 신문을 뒤적이다가 마침내 찾아낸 ‘연포의 비정’이라는 제목의 기사는 충격적이었다. 어렵게 수소문한 끝에 해수욕장 개장 직후부터 10년 넘게 연포에서 이장(里長)을 했다는 이진호(71) 할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다.

"지난 70년 10월 하순 어느 날, 삼성재벌의 마크도 선명한 세스나기(機)의 프로펠러 소리가 서산 갯마을의 정적을 깨뜨리면서, 솔개마을을 솔개처럼 선회하다 사라졌다."

이렇게 시작되는 기사(동아일보 1976년 6월 30일자 3면)에는 당시 삼성이 연포에 해수욕장을 만드는 과정에서 땅을 매입하며 저지른 횡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 연포해수욕장을 사설해수욕장으로 삼았던 삼성에 맞선 덕분에 이장 자리까지 맡았다는 도황리 옛 이장님 이진호 할아버지
ⓒ 강곤
"함모씨(당시 54세)의 경우, 해수욕장 별장지역 입구에 물려받은 산 3천9백 평을 갖고 있었다. 삼성 측은 개발초기부터 길을 내야겠다면서 대토를 줄 테니 팔라고 했다. 갖은 권유와 유혹에도 함씨는 조부의 산소가 있기에 딱 거절했다. 그러나 삼성 측은 멋대로 함씨 땅을 불도저로 밀어 길을 내기 시작했다. 40년생 소나무가 잘리고 산소로 가는 길마저 차단됐다. … 이모씨(당시 46세)씨도 땅을 팔지 않자 삼성 측이 불도저로 흙더미를 밭에다 밀어붙여놓아 농사를 지을 수 없었다. … 71년 추석을 앞두고 벌초를 갔던 김 노인은 조부의 산소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사실을 발견하고 까무러질 뻔 했다. 삼성 측이 수도관 매설 공사를 한다면서 불도저로 봉분을 밀어버린 것이다."

태안이 아닌 삼성의 '연포해수욕장'

이뿐만이 아니다. 해수욕장이 문을 연지 몇 해 지나서는 조부모의 산소에 벌초를 하러 갔던 형제가 해수욕장을 관리하던 자체경비대에게 붙잡혀 5시간 동안 감금당한 채 몽둥이로 두들겨 맞는 사건이 벌어졌다. 또한 허락 없이 물건을 팔았다는 이유로 주민들도 경비대에 붙잡혀 곤욕을 치루기 일쑤였다. 기사의 표현대로 연포해수욕장은 경찰 행정력이 미치지 못하는 삼성의 ‘치외법권’ 지역이었던 것이다.

그 시절 이야기를 증언해줄 마땅한 이를 만나기는 쉽지 않았다. 삼성에 토지매입을 거부하며 마찰을 빚은 주민들은 대부분 뿔뿔이 흩어져 연락할 길이 없었고 어렵게 연락이 되어도 선뜻 나서지 않았다. 많은 분들은 이미 세상을 떠나기도 했을 세월이다.

대여섯 분을 만나고 헤어지기를 거듭한 끝에 마침내 찾은 이가 이진호 할아버지. 그이는 연포해수욕장이 개장하고 바로 이듬해부터 이장을 맡아 삼성과, 삼성의 대리인 격은 ‘중앙일보’와 내내 껄끄러운 관계를 맺게 된 분이다. 한두 시간으로는 다 못 한다며 시작된 이야기는 반나절을 넘도록 계속되었다.

처음부터 이진호 할아버지와 중앙일보의 관계가 좋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삼성이 연포해수욕장으로 가는 진입로를 매입하는 과정에서 이진호 할아버지는 주민을 설득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했다.

"삼성이 땅 매입하려고 애를 많이 먹었지. 나보다 한 살 많았던 그때 이장이 내가 뭐 아무것도 하는 일도 없이 건달짓 하듯 돌아다니는디, 도와달라고 해서 협조가 되면 좋구 안 되면 그만이여 하고 도와줬어. 그래서 내가 동의를 많이 받었지. 그래가지구서 진입로를 뚫고 일이 진척된 거여."

시작은 순조로웠지만 삼성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계약을 하구서 한 달 있다가 잔금을 준다고 한 건데 6개월 지나도록, 개장을 할 때꺼정 안 주는 거여. 내가 동네사람들 앞장서서 계약을 했으니 내 역할을 해야 하는 거 아니여?

7월 5일날 연포수욕장 개장을 하는데 전날부터 자가용이 미어터졌지. 그날 할 수 없이 내가 주민들보구 삽 갖구 전부 나오라 그랬어. 개장식 하는 데루. 그때 연포하우스인가 목조건물로 쫙 있는 앞에서 개장식을 하는데 면장이구, 서장이구 중앙에서 명망 있는 사람들, 이름 있는 중앙일보 사람들두 다 와서 번쩍번쩍 의자 놓구 앉어 있는데 헐 수 없이 그 앞으로 간 거여.

시골 촌놈들이 단상 밑에서 삽자루 들고 와 있으니까 그 사람들은 다 쳐다보잖여. 좀 있으니까 면 총무계장인가가 와서 왜 이래요? 그러기에 왜 이러는지 몰라서 그러유? 했지. 또 꼭 오늘 이래야 돼겄냐구 그러더라구. 아니, 오늘이 뭐냐? 한 달 있다가 준다는 게 6개월이 넘었는데 우리는 무식해서, 몰라서 그러니까 여기 높은 사람들 다 왔구 그러니까 여그 있는데서 오늘 무슨 확답이 안 서며는 여그 사람들 나가든 못 나가든 상관없이 이 삽 갖구 길을 다 엎겠다 그렸지. 그러니까 며칠만 시간을 달라구 하더라구. 결국 낼 모래까지 해결해주기로 했어."

"기자들 인간성이 별루 좋지 않데"

당시 옥답이 400~500원, 임야는 50원 하던 땅이 해수욕장으로 개발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2000~3000원, 많이 오른 곳은 3만원까지 뛰었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땅을 팔았던 사람들의 허탈감도 허탈감이지만 주민들의 불편과 고통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동아일보에 난 것보다 더 한 일도 많았어. 나두 들은 이야기지만, 땅 안 판다구 논에다 오물을 갖다 붓기도 하고 그랬다지. 그래도 집집마다 다니면서 어른들에게 큰 절하면서 우리가 개발하게 협조해주면 주민들 피해 절대 안 주구, 주민들 복리 증진을 위해서 최대한 힘을 쓰겠다구 말은 잘 했지. 그런데 다 끝나구 개장하니까 또 어디 그래? 내가 그 이듬해 이장을 하게 되면서 싸움 많이 했지. 주민들 괴롭히는 바람에.

중앙일보에서 서산에 몹쓸 것들, 깡패들 데려다 해수욕장 경비를 시켰어. 평소에는 줄였다가 여름에는 막 불러 모았는데 언제 하루는 저녁 먹고 어델 가는디, 한 아주머니가 파출소 앞에서 통곡을 하는 거여. 왜 그러유? 내가 물으니까 인제 남편이 꽃게잡이를 해갔구 그걸 팔러 해수욕장에 갔다가 허락 없이 장사한다고 그눔을 뺐어서 모래사장에 파묻었다는 거여. 아니 그래두 그눔들 무서워서 경찰도 말도 못하는 거여.

지들 도로도 아닌 신작로에 여름두 아닌 디, 두엄 실어 나르다보면 길에다 조금 흘릴 수도 있잖어? 동네 사람들이 집에 찾아왔어. 지저분해진다구 길을 못 다니게 막었다는 거여. 내가 경비소장을 찾아가서 이거 어떻게 된거냐구 그러니까 대뜸 왜 그려? 하고 큰소리부터 치는 거여. 그 소장이 중앙일보 기자출신이었던 모양인데 기자 성질 보여줘야 알겠냐며 말이야. 댁도 기자인지 모르겠지만 기자가 인간성이 별루 좋지 않데. 왜 사사건건 자기들 일에 시비를 거냐 이건데, 우리 같은 촌사람에게 우선 목소리부터 크게 지르고 보는 거지. 나도 성질이 팍 나서 니가 뭐냐? 이게 니 땅이냐? 그 도로가 중앙일보 껏도 아닌데 왜 니들 맘대로 막냐고 소리를 쳤지. 그러니께 금새 막걸리나 하자고 하며 태도가 돌변하드라구."

이런 일들이 동아일보에 의해 기사화되고 세간의 이목을 받게 되면서 삼성의 횡포는 차츰 줄었다고 한다. 그러나 연포를 주민들을 위해 개발하겠다는 약속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지켜지지 않다가 90년대 들어서 참다못한 주민들이 번영회를 중심으로 항의에 나서면서 해수욕장은 제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이장님의 화려한(?) 이력

당시 박정희 정권과의 돈독한 관계를 형성했던 무소불위 삼성과의 싸움도 싸움이지만 30년도 지난 이야기를 풀어놓는 할아버지의 기백이 보통이 아니다. 본인도 ‘건달끼가 다분했다’는 할아버지의 한창 때는 ‘이장님’과는 좀 거리가 있는 세월이었다.

할아버지의 집안은 대대로 태안에서 살아왔지만 할아버지는 부모님이 인천으로 이사를 한 탓에 거기서 태어났다. 그러다 6.25가 터져서 피난을 떠났다 돌아오고, 1.4후퇴에 다시 피난 짐을 꾸리면서 아예 태안으로 눌러앉았다고 한다.

"처음 내려와서 ‘시부럴’ 소리가 그리 흉직하게 들려. ‘염병할’ 소리는 들어봤어도 내 ‘시부럴’은 참…. 그런데 그게 금방 입에 붙데. 동네에서 하는 일 없이 다니다가 노 젓고 다니는 배 타고 쭈꾸미, 꽃게잡이 하는 거 배웠는디 군대갔다 와서 할 게 그것밖에 없었지. 군대가기 전에는 그것두 안 했는데 제대해갔구 영 헐 일이 없어서 돈을 빌려서 했는데 첨인데두 잘 잡히더라구. 하루는 바다에 갔다 오는데 어쩌다 건달들이 뽕치는 데 들어가게 됐어. 그날로 이틀 사이에 번 돈을 홀랑 잃었지.

사람들이 입부리, 발부리, 그리구 뭣부리 조심하라구 그러잖어? 그런데 발부리를 조심 못 해가지구…. 그렇게 해서 다니다보니까 기술도 배우게 되고. 그때만 해두 내가 기사 소릴 들었어요. 그래도 예전부텀 노름해서 부자된 사람 없다구, 나야 밖에서 먹구 자두 여관방에 가 자구 이발소에서 이발하구 하니 나는 편치. 집 식구들은 고생 많이 했지 참. 못할 짓 했어. 맘 잡고 집에서 일 해보려면 옛날 택시가 물방개 같이 생겼거든. 얘들이 쬐끄말 때 아부지 물방개 왔어, 물방개. 그러면 차에서 내린 놈이 야 이거 해서 돈이 벌리냐? 나가자! 그래서 또 따라나가서 놀음하고. 나 이전에 이장하던 분이 앞으로가 중요하지 과거가 뭐 중요하냐고 해서 이장을 하게 됐는데 그러면서 딱 끊었지."

그렇게 이장 일을 시작하게 된 것이 1972년. 한창 전국적으로 “새벽종이 울렸네~ 새아침이 밝았네~”하는 새마을 노래가 울려 퍼지던 시절이었다. 할아버지의 말에 따르면 새마을 운동에서 이장은 야전사령관 쯤 되었던 듯 했다.

"저녁에 들어오면 어이구 소리가 절로 났지"

"길을 뚫으면 어디는 좋고 어디는 안 좋구 그렇잖어. 이쪽저쪽 다 생각하면 못 하지. 무대뽀로 밀어붙이고 추진을 하니께 되는 거여. 지금 같으면 그렇게 못했지. 지붕개량을 하라구 위에서는 그러는디, 무대포로 하라 그거여. 아니, 먹구 살기두 힘든디 지붕개량 하면서 뭐 먹구 살게 나오나 하며, 불가능 하다고 생각했는데 행정력이라는 게 무시 못하겠더라구. 처음에는 있는 집부터 시작해서 한 집 두 집 하니까 좋지, 보기 좋구 깔끔하구. 그 담에는 정부에서 보조를 해주니까 일부 하구. 허니께 되더라구. 박정희가 군사독재니 뭐니 해두 그거 하나만큼은 똑 부러지게 했지.

또 우리나라 행정이 가시행정이라구 보이는 데만 해놓구 그렇기도 했지. 누가 시찰온다고 하면 미처 지붕개량 안 된 집은 천막천으로 덮어요. 위에서 헬기타고 가면 다 지붕 고친 것처럼 그럴 듯해 보이지. 또 마을회관 지으라고 양회(시멘트)를 지원해줘서 그걸루 블록이랑 맞바꿔서 회관을 짓는데 나무도 필요한데 살 돈이 있나. 집집마다 굵은 나무를 베었지. 지금 같으면 어렵지. 그래도 남의 집만 벨 수 있나. 우리 집도 큰 거 하나 베었구. 그렇게 길 내랴 지붕 고치랴 하고 저녁에 들어오면 어이구 소리가 절로 났어. 한창 젊었을 땐데도."

그렇게 삼성과의 싸움으로 주민들의 신임도 얻고 세마을 운동으로 추진력도 보여준 탓인지 할아버지는 80년까지 근 10년간 이장으로 장기집권을 했다.

"당시에는 이장한테 권한을 많이 줬어요. 주소 이전에도 이장 도장을 찍어야 하구 비료도 이장이 집집마다 사정 봐가면서 나눠주구. 그러니까 이장 말을 잘 들을 수밖에. 한 번은 비료가 없어서 난리가 났어. 이장 맡은 그 이듬해 8월쯤인가 그랬는디 비료가 없어서 비료값이 있어도 구할 데가 없어. 태안에 나와서 구해도 없고. 그런데 농협에 있는 이가, 그 놈도 좀 건달인데 나보고 저녁 몇 시까지 나오래. 둘이서 홍성에 가서 무슨 계장 무슨 계장 나오라구 그래서 넷이서 다방에 갔어. 들어가자마자 지금 문 닫으면 얼마나 주면 돼냐고 다방주인에게 묻데. 그러고는 다방 문을 닫고 맥주를 들여오고 춤판을 벌이고. 나는 술을 안 먹으니께 여관에 들어가 잤지.

아침에 전화가 왔는데 역전으로 나오라 그래서 갔드니 비료가 300여 푸대 쌓였어. 그걸 싣고 와서 마을로 갔지. 그 술값에 싣고 오는 비용까지 다 댔지. 동네 사람들이 해결해주겠지 하고. 마을에 오니까 비료 가지고 왔다고 소리도 안했는데 사람들이 지게 지고 다 와요. 어느 누가 덮어놓고 달라고 하면 안 된다고 이장이 돈 주고 사 온 건데 얼마씩이라도 걷어 줘야 한다고 고맙게 이야기를 하데."

이야기하는 할아버지 얼굴에 화색이 도는 것이 몸은 고달팠어도 생애에서 가장 빛나던 시간이었지 싶다. 할아버지는 이후 이장을 그만두고 서울에 올라가서 사업을 했지만 하는 일마다 “운 때가 안 맞아” 잘 안 되었단다. 지금은 태안읍에서 택시 일을 하는 둘째 네와 같이 살며 당뇨로 몸이 불편한 할머니를 돌보는 이진호 할아버지의 ‘왕년’은 그래서 더욱 아련하고 그만큼 더 아름다운 시절인 것이다.

‘연포 비정’의 주역
전 동아일보 태안 지국장 박규웅씨

▲ 당시 동아일보 신문기사 자료를 보여주고 있는 박규웅 할아버지
ⓒ강곤
연포에서의 삼성그룹의 횡포가 동아일보를 통해 기사화 된 데에는 당시 동아일보 지국장 겸 주재기자로 있던 박규웅(67)씨의 역할이 컸다.

해수욕장 자체경비대에 5시간이나 감금당하고 두들겨 맞았던 주민들이 하두 억울해서 지국으로 전화를 한 거죠. 그 얘기를 듣고 내가 취재를 해서 기사를 썼어요. 그때 컴퓨터가 있나 팩스가 있나 동아일보에 전화를 해서 불러줬지요. 기사가 나가고 나니까 그제야 경찰이 경비대 사람들을 구속시켰지. 그리고 이 사건을 계기로 해서 동아일보 사회부, 경제부, 사진기자까지 세 명이 상주를 해서 취재를 했지요. 그게 ‘연포의 비정’이라고 시리즈로 다뤄지게 된 거지.

그때 중앙일보랑 동아일보랑 사이가 안 좋았거든요. 그래도 당시에 동아일보가 야당지고 바른 소리 하던 신문이어서 중앙정보부가 서산 경찰서 이런데 다 내려와 있던 시절이었는데도 꿋꿋하게 썼지요.

그 기사 나가고서 해수욕장이 정상화되었지. 해수욕장이 목적이라고 했지만 삼성 본래 의도는 부동산 투기가 목적이었어요. 그리고 국방과학연구소 쪽에 골프장을 만들려고 했던 거 같아. 그게 국방과학연구소가 들어오면서 잘 안 됐지. 어쨌든 당시에 연포에 취재가면 주민들이 나와서 박수쳐주고 그랬어요.

이 사건 이후로 동아일보에 수습기자가 들어오면 내가 교육도 몇 번 했지요. 내가 뭐 말 주변도 없구 그렇지만 용기를 갖고 써야 한다, 이런 이야기 하고 왔지. 그런데 1980년대에 현대건설이 천수만 간척사업을 할 때였어요. 안면도 주민들이 3천명이 모여서 어장이 없어지니까 현대를 상대로 데모를 하는데 내가 또 취재를 했어. 그때는 현대가 한참 잘 나갈 때지요. 기사를 써서 갔는데 동아일보가 그때 벌써 현대 광고 끊긴다면서 이건 못 실어준다는 거여. 이거 안 실어주면 내가 가만 안 있겠다, 동아일보 앞에서 단독으로 시위라도 하겠다, 그러니까 겨우 1단 기사로 조그맣게 실었더라고.

그때부터 동아일보가 문제가 많구나 생각했지요. 지금 보면서 성질나고 그런 거야 말해서 뭣하나?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태안의 새 신문 <태안시대>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태안, #삼성, #중앙일보, #연포해수욕장,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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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과 기록에 관심이 많다. 함께 쓴 책으로 <우리의 소박한 꿈을 응원해 줘>, <여기 사람이 있다>, <나를 위한다고 말하지 마>, <다시 봄이 올 거예요>, <재난을 묻다>, <말의 세계에 감금된 것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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