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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망한 삼세르 바하두르 타칼리씨.
ⓒ 아시아인권문화연대

지난 일요일 오전, 예림이가 다리를 다쳤습니다. 공사장 근처에서 놀다가 날카로운 돌에 발목 부근이 조금 찢어졌습니다. 상처는 깊지 않았지만 덥고 습한 싱가포르 날씨 때문에 제때 치료를 하지 않으면 상처가 덧날 수 있어서 근처 병원을 찾았습니다.

클리닉(Clinic)이라고 쓰여 있는 동네 병원은 대부분 문을 닫아서, 택시를 타고 싱가포르에서 제일 크다는 종합병원 응급실을 찾았습니다. 병원에 도착하니 입구에서 간단한 인적사항을 기록하는 종이를 내밀었습니다. 거기엔 이름과 주소 나이 등과 함께 신분증번호(NC/FIN)를 적는 난이 있었습니다.

우리의 주민등록번호와 같은 것인데 저 같은 외국인은 취업비자 번호를 적어야 합니다. 아이들 역시 저마다 개인번호가 따로 있습니다. 평소 신분증을 가지고 다니지 않을 뿐더러, 그 번호를 기억해 낼 수도 없었습니다. 당혹스러웠지만 담당직원에게 신분증은 안 가져 왔고, 번호는 기억이 안난다고 솔직하게 말했습니다. 신분증을 가져오라고 하면 택시를 타고 집에 다녀 올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직원은 이름과 연락처, 상태만 적어도 된다면서 접수를 받아 주었습니다. 응급실에서 간호사로부터 간단한 처치를 받고, 한 시간쯤 뒤에 담당의사를 만나 진료를 받은 뒤 수술실로 들어갔습니다. 상처가 벌어져서 네 바늘 정도 꿰매야 했습니다.

치료가 끝나고 치료비와 약값으로 80달러(5만원)를 냈습니다. 의사는 2주 후 실밥을 풀 때는 가까운 클리닉에 가면 싸게 할 수 있다며 소견서 한 장을 써 주었습니다.

싱가포르에서는 나도 이주노동자

싱가포르에서 저는 이주노동자이며, 취업비자를 보여주기 전까지는 불법체류자로 오해를 받을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건 제 딸 아이 예림이도 마찬가지지요. 하지만 싱가포르의 종합병원에서 치료를 받는데 그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정해진 치료비 외에 더 받지도 않았으며 (보험여부와 상관없이 응급실 이용시 치료 요금은 같습니다), 치료 과정에서 다른 환자와의 차이는 전혀 없이 제대로 된 의료 서비스를 제공 받았습니다.

한국이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한국에 거주하는 불법체류자 신분의 이주노동자가 병원에 갔을 때에도 저와 마찬가지로 아무런 불편 없이 치료를 받을 수 있을까요. 싱가포르와 마찬가지라 믿고 싶습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오마이뉴스>를 통해 네팔 국적의 이주노동자 삼세르씨가 집에서 죽은 채 썩고 있었다는 뉴스를 봤습니다. 그의 수첩엔 '한국이 지옥 같다'고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한국이 지옥' 같았던 까닭이 아파도 병원에 갈 수 없었던 상황 때문은 아니었을까요. 무엇이 그로 하여금 병원치료 대신 골방에서 썩는 길을 택하게 했을까요.

이 글에서 불법체류자 문제에 대해 말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사람이 아프면 우선 치료를 받아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상식적인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환자가 돈이 없어도, 범죄를 저질렀어도, 불법체류 중인 이주노동자 신분일지라도 마찬가집니다.

▲ 지난 2005년 10월 열린'반인권적 이주노동자 정책과 차별로 숨져간 이주노동자 합동 추모식'.
ⓒ 오마이뉴스 권우성

한국에서 목숨 잃은 이주노동자 이야기 남의 일 같지 않아

일하는 곳은 달라도 저 역시 이주노동자라 그런지 한국에서 목숨을 잃은 이주노동자의 이야기가 남의 일 같지 않습니다. 저는 언젠가 이곳에서의 생활을 청산하고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하지만 한국으로 돌아 간 이후에도 이 곳 싱가포르가 '지옥'같은 곳이라 느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게 꼭 불법체류자 신분이 아니라서 그런 것만은 아닐 겁니다. 불법체류자와 별반 다르지 않은 상황에서도 예림이는 치료를 받을 수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제가 언젠가는 돌아가고 싶은 내 나라가 누군가에게는 '지옥' 같은 곳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끔찍한 일입니다. 제대로 된 나라라면 그 대상이 불법 체류하고 있는 이주노동자라 하더라도 일을 시킨 후에는 임금을 주고, 다쳤을 때는 치료 해 주고, 하루 세 끼 밥은 먹을 수 있게 하는 게 상식입니다. 법에 따라 쫓아내는 건 그 다음 일입니다. 그래야 '지옥'이라는 소릴 안 듣습니다.

지금 저와 한 사무실에서 일하는 동료들의 국적은 참 다양합니다. 필리핀, 베트남,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그들이 한글을 모른다는 게 참 다행입니다. 그들이 삼세르씨 죽음에 대한 뉴스를 봤다면 한국인인 저를 어떻게 생각할까요. 동료들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기가 힘듭니다.

이주노동자에 대한 정부의 정책, 조금만 더 인간적이길 바랍니다. 최소한 '지옥'이라는 소리는 안 들을 수 있게 말입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태그:#이주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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