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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일 파키스탄 라호르에서 "저주스런 살만 루시디에게 작위를 수여한 것은 영국 정부의 위선을 입증한 것"이라는 구호가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영국 국기를 불태우며 규탄 시위를 벌이고 있는 파키스탄 시위자들.
ⓒ EPA=연합뉴스

이슬람인들의 오랜 '공공의 적' 살만 루시디(61). 그가 또 이슬람과 유럽 국가 간 갈등의 핵으로 떠오르고 있다.

소설 <악마의 시(The Satanic Verses)>를 발표하면서 양측의 외교 단절 등 문화 충돌을 촉발한 루시디가 다시 세계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다. 영국 정부에서 최근 루시디의 문학적인 공로를 높이 인정한다며 '기사 작위(Sir)'를 주겠다고 밝히면서부터다.

이 결정에 대해 이슬람 국가들에선 곳곳에서 반대 시위가 벌어지고 있고, 파키스탄의 한 장관은 이에 맞서 "자살테러를 감행해도 합리화될 수 있다"고 공언하는 등 반발이 확산되고 있다.

이슬람의 '공공의 적' 살만 루시디

살만 루시디라는 이름이 이슬람인들의 가슴에 처음으로 자리 잡은 것은 1988년. 루시디가 <악마의 시>를 발표한 때다. 인도 출신 영국인인 루시디의 소설이 출간되자 이슬람 국가들이 발칵 뒤집어졌다.

이 소설은 이슬람교의 창시자인 무함마드를 '악마'로 비유하고, 이슬람 신도들이 매일 보는 경전인 <코란>을 '악마가 쓴 시'로 언급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무함마드의 열두 아내를 '창녀'라고까지 묘사해서 이슬람인들의 반감은 극에 달했다.

사실 이슬람 사람들에게 종교는 삶 자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곳 영국에서 만난 이슬람인들은 학교든, 기차역이든 장소를 가리지 않고 하루에도 몇 번씩 신에게 절을 하고 기도한다. <코란>을 읽으면서 그 '말씀'대로 금주, 금욕하는 등 이슬람인의 생활 곳곳에는 종교적인 생활 윤리가 깊이 배어 있다.

그런데 이슬람인들이 그토록 숭배하는 신적인 존재를 루시디가 악마로 비유하고 그 예언자의 아내를 창녀로 비유했으니, 이슬람권의 반감은 하늘로 치솟을 수밖에 없었다.

이란 정부의 공개 사형 선고

▲ 살만 루시디가 쓴 <악마의 시>.
ⓒ 펭귄출판사
소설이 발간된 이듬해(1989) 2월 14일, 이란의 정신적 지도자이던 아야톨라 호메이니는 무함마드를 불경스럽게 모독했다는 이유로 테헤란 라디오 방송을 통해 "루시디를 제거하라"는 파트와(종교칙령)를 공개적으로 내렸다. 100만 달러의 현상금도 내걸었다. 루시디에게 공개적으로 사형을 선고한 셈이다. 이란은 1989년 영국과 외교를 단절하기도 했다.

이 선언 후 루시디를 둘러싼 갈등은 극에 달했다. 1991년에는 루시디의 소설을 번역한 이탈리아의 번역가가 습격을 받았고, 일본 번역가가 살해당하는 일까지 발생했다.

영국 경찰은 이에 맞서 루시디와 이 소설을 판매하는 서점들에 대해 특별 경비를 서기도 했다. 하지만 서점들은 빈번한 폭탄 테러로 곤욕을 치러야 했다. 한국에도 2001년 이 소설이 번역, 출간됐지만 이 같은 테러 위험을 우려해 번역자의 연락처를 공개하지 않기도 했다.

이란 정부는 영국 정부와 관계 개선을 위해 1998년 공식적으로 사형선고를 철회했지만, 이슬람 과격세력들은 여전히 루시디의 목에 300만 달러의 현상금을 걸고 있다. 루시디의 사형 선고는 여전히 유효한 셈이다.

도망과 도피 생활... 이문열 책에 발문 쓰기도

이슬람 강경세력의 테러 위협을 느낀 루시디는 그간 영국과 미국을 넘나들면서 은둔과 도피 생활을 해야만 했다. 그 와중에도 루시디는 소설 쓰는 작업을 계속했다. 루시디는 <악마의 시>로 이슬람 국가의 공공의 원수가 됐지만, <한밤의 아이들>이라는 소설을 통해 역대 부커상 중에서도 최고 부커상을 수상하는 등 문학성을 세계적으로 인정받기도 했다.

경찰의 철저한 보호 아래 영국 각지에서 생활하던 루시디는 미국 뉴욕으로 건너가 활동을 재개해 2004년에는 세계작가단체인 펜(PEN)클럽 미국본부 회장에 지명되기도 했다. 루시디는 올해 초부터 미국 에모리 대학에서 강의도 시작했다. 루시디는 앞으로 5년 이상 이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강의하면서 집필 작업을 계속할 것으로 전해졌다.

또한 루시디는 2001년에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 미국에서 처음으로 번역 출간될 때 "인간의 나약함에 대한 보편성을 드러냈다"며 이 책의 발문을 써서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자살테러 합리화 발언, '빈 라덴에게도 작위를'... 들끓는 이슬람 국가들

영국 버킹엄궁은 16일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생일을 맞아 문학 분야의 공로를 인정해 루시디에게 작위를 수여한다고 발표했다. 루시디는 이 발표를 듣고 "이런 영광을 누리게 돼 전율을 느낀다"며 기쁜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반면 이슬람권의 분노는 갈수록 고조되고 있다. 이슬람 국가 곳곳에서는 이번 결정에 반대하는 화형식과 시위가 열렸다. 강경 이슬람파를 중심으로 테러를 선동하는 발언까지 나왔다.

무하마드 에자즈 울하크 파키스탄 종교장관은 의회에서 "누군가 예언자 무함마드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자살테러를 감행해도 이는 합리화될 수 있다"며 국민을 선동했다. 더 나아가 이슬람 국가들이 영국과 외교를 단절하는 등 강력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파키스탄의 한 정당은 "무슬림도 알카에다를 이끄는 오사마 빈 라덴과 탈레반을 이끄는 물라 오마르에게 각각 '경(Sir)'의 칭호를 내려줘야 한다"며 영국 정부를 비난했다.

이란 외무부 대변인도 "이번 결정은 결코 우연이 아니고 계획적으로 이뤄진 것"이라며 "영국 고위 관리들 사이에 반이슬람주의가 만연해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비판했다.

▲ 루시디의 작위 수여 문제로 이슬람권과 영국 사이에 발생한 갈등을 보도한 뉴스.
ⓒ BBC

여유 있는 영국 정부의 속셈은?

영국 정부는 파키스탄 장관의 자살테러 발언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시한다"며 "어떤 경우에도 자살테러는 합리화될 수 없다"고 논평을 냈다.

또한 영국 정부는 '표현의 자유를 존중해줘야 한다'며 이번 작위수여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방침을 고수하고 있다.

존 레이드 영국 내무장관은 "우리에겐 의견을 표현할 권리와 함께 다른 사람의 관점을 참고 인내할 수 있는 의무도 있다"며 "이번 일로 인해 사과할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또한 멜 깁슨의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 일부 유대인과 기독교인이 반발했지만 결국에는 참고 견뎌야 했다며, 이번 사건의 경우도 일부 반대가 있지만 별 문제가 없다는 방침을 재확인했다.

영국 정부는 이번 일에 대해 정치적인 상황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내린 결정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렇지만 이번 결정이 불러올 이슬람의 반발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정도로 순진했을까. 지난해 덴마크의 한 풍자만평으로 이슬람 국가와 유럽이 극심한 갈등을 겪었다는 사실을 영국 정부는 분명히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영국 정부가 이 같은 결정을 내린 것은 이러한 갈등을 통해 갈수록 약화되는 백인 중심인 영국 사회 내부의 결속력과 흩어지는 국가의 정체성을 추스르려는 의도된 포석이 아닐까.

일간 <인더펜던트>는 "이번 결정이 신중하지 못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악마의 시>에 대한 논란이 이미 끝났다는 판단에 따라 이번 결정을 내렸다면 더욱 그렇다, 이번 결정에 논란을 더욱 일으키게 하는 의도가 있는 것으로 의심된다"고 지적했다.

#살만 루시디#이슬람#무함마드#악마의 시#기사 작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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