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5월 27일, 경북 의성에서 맞이하는 두 번째 날이에요. 오늘은 구미로 돌아가는 시간까지 잘 헤아려야 하기에 돌아볼 곳을 짜임새 있게 다녀야 해요.아침에 지저분한 여관방을 서둘러 빠져나와 역 앞에서 아침밥을 먹고 길을 떠나려고 하는데, 애고! 그만 자전거 앞바퀴에 구멍이 났어요. 바람이 다 빠졌네요. 미리 가져온 튜브가 있어 새로 갈아 끼우고는 하루를 맞이했답니다.금성면 제오리에 '공룡발자국 화석'이 있는 곳을 먼저 찾아갔어요.
아침 공기를 마시며 자전거 타는 기분이 무척 싱그러워요. 이른 아침인데도 들녘에는 벌써 마늘농사를 짓는 농사꾼이 많아요. 부지런히 가꾸며 애쓰는 손길 때문에 이렇듯 들판 가득 넉넉함이 넘치는 걸 보니, 새삼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오리 마을 곁에 있던 지방국도를 넓히려고 흙을 깎아내다가 찾았다는 '공룡발자국화석(천연기념물 373호)'은 한 곳에 316개나 되는 발자국이 모여 있어요. 그것도 네 가지나 되는 공룡 발자국이래요. 1억1500만년 앞서 생긴 것이라 여기고 있는데, 보통 남해안 둘레에서 볼 수 있던 것과 달리, 내륙에서 찾아내어 매우 남다르다고 합니다.
사진을 찍으며 보니 그 모양이 모두 달랐어요. 발자국을 남긴 녀석들이 여러 종류라는 걸 알겠더군요. 또 지난날에는 이 발자국이 잘 보이도록 칠을 했다고 하는데, 우리가 갈 때엔 덧칠한 빛깔이 흐릿하게만 남아 있었답니다. '공룡' 하면 영화에서만 보던 걸 내 눈으로 그 발자국을 보고 있자니 믿기지 않을 만큼 놀라워요.
삼한시대 부족국가 '조문국'
이번에는 의성에 아주 남다른 문화가 있는 금성면 대리리에 있는 '경덕왕릉'으로 가 볼까요?큰 발자국을 보고 돌아 나와 조금 달리니 고갯길이 보이고 그 위에 널따란 구릉이 있는데, 고개 아래에서 봐도 한눈에 알 만큼 무덤이 커요.
"저기다! 저기가 경덕왕릉인가 보다."
그러고 보니, 처음 와보는 의성에서 우리가 가려는 데마다 잘도 찾아가요. 낯선 곳이라 길도 모르고, 그저 집 떠나기에 앞서 꼼꼼하게 지도만 살펴봤을 뿐인데도 척척 잘 찾아가는 우리가 스스로 놀라웠어요. '경덕왕릉'이라고 해서 처음엔 신라 때 경덕왕의 무덤인 줄 알았어요.
"어! 그건 경주에 있는 건데.""그러니까 경주에 있는 경덕왕릉과는 다른 거래."
알고 보니, 여기는 삼한시대 부족국가였던 '조문국'이란 작은 나라였어요. 이 의성 땅에 작지만 한 나라를 이루고 살았다네요. 또 이 금성면 둘레가 바로 조문국의 도읍이었대요.이 '조문국'을 자세하게 알 수 있는 자료는 그리 많지 않아요. 다만, 삼국사기에 신라 벌휴왕 2년(185)에 신라로 넘어가게 되었다는 기록만 있을 뿐이에요. 그렇지만, 이처럼 왕의 무덤을 크게 세우고, 이와 비슷한 200기 남짓 되는 많은 고분이 이곳 대리리와 탑리리에 걸쳐 모여있는 걸 보면, 조문국이란 나라가 꽤 번창했다는 걸 알 수 있답니다.
고갯길을 올라와서 보니 너른 땅에 여기저기 큰 무덤이 많아요. 초등학교 때, 경주로 수학여행 가서 봤던 왕릉과 같은 크기예요. 그런데 무엇보다 눈에 띈 건, 무덤보다도 그 둘레 경치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몰라요. 무덤과 무덤 사이로 구불구불 흙길이 퍽 남다른데, 자전거를 타고 한 바퀴 둘러보면 참 재미있을 듯했어요.
낯선 곳에서 '우리 것'을 찾아다니는 사람을 만나다
이른 시간이라 여길 찾아온 사람은 없는데, 저기 안내판 앞에서 누군가 우리를 눈여겨보고 있어요. 젊은 청년인데 우리가 다가가자, "어디에서 오셨어요?" 하고 물어요. 인사를 나누고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 분도 산악자전거를 탄다고 했어요. 자전거를 탄다는 까닭 하나로 금세 이야기보따리를 하나씩 풀었지요.
서울에서 왔는데 우리 문화재를 둘러보며 여행하는 걸 무척 좋아한다면서, 이날은 나중에 동호회 사람들이랑 함께 와 보려고 미리 답사를 나왔대요. 벌써 며칠 동안 의성에서 머문 이야기와 밥집 인심 이야기, 또 자기가 둘러본 곳을 얘기하기도 했어요. 자전거를 타고 가면, 어디에서든지 이렇게 반갑게 맞는 이들이 있어요. 오로지 서로 자전거를 탄다는 까닭 하나로 금방 가까워지지요. 즐겁게 나들이하라며 인사를 하고 헤어져 이젠 탑리리로 발판을 부지런히 밟았어요.
탑리리는 지난날 내가 어릴 적 살던 고향 풍경과 많이 닮아서 참으로 정겨웠던 곳이에요. 여기에는 국보 77호인 '탑리오층석탑'이 있어요. 통일신라시대에 세운 이 탑은 돌탑이면서도 목조건물 모양을 곁들여 쌓은 탑이에요. 마을 이름조차 이 돌탑 때문에 지은 거라고 합니다.
탑리역 둘레에는 나지막한 집들이 많아요. 그 가운데 눈길을 끈 건, 오래되어 보이는 빈집인데요. 가게 유리문 앞에 붙어있는 '까.치.화.만'이라는 글자가 퍽 재미있어요. 본디 '까치만화방'인데 문을 어긋나게 닫아두어 그렇게 보이는 거예요. 지금은 낡고 허름하지만, 옛날에는 이 만화방에 개구쟁이 아이들이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하니, 금방이라도 재잘거리며 깔깔거리는 아이들 웃음소리가 새어나오는 듯해요.이 밖에도 낡았지만 고향집과 비슷한 나지막한 집들이 지금은 비어 있어 조금은 서글프기도 했어요.
또 기차역 모양이 탑처럼 생긴 '탑리역'은 이번에 <오마이뉴스> 철도여행 기사 공모에서 큰상을 받을 수 있었던 얘깃거리를 얻은 곳이에요. 탑리역 열차운용원 아저씨한테 물어서 알게 된, 기억 속에 묻힐 뻔한 '통표(운전허가증)'를 구경하기도 했지요. 탑리역은 우리한테 꽤 남다른 추억으로 오래 남을 거예요.
'전통집'을 짓고 사는 '산운마을'
이제 드디어 금성면 산운리에 닿았어요. 여기는 '대감마을'이라고도 하며 옛집이 모여 있는 산운마을이에요. '영천 이씨'들이 한데 모여 사는 곳이에요. 바로 앞날 다녀왔던 사촌마을과 거의 닮은꼴이고 옛집 풍경이 정겨운 곳이에요.
소우당·운곡당·점곡당처럼 옛집도 있지만, 새롭게 지은 집이 더 많아요. 지금 한창 짓는 집도 있고요. 사촌마을에 견주면 너무 반듯하고 깔끔해서 예스러움은 덜하지만 흙길을 끼고 있어 나름대로 풍경이 아름다웠답니다.
"어머나! 여기서 또 만나네요?"
몇 시간 앞서 경덕왕릉에서 만난 청년을 또 만났어요. 아마 우리와 거의 비슷한 차례로 둘러보고 있었나 봐요. 이번에는 차를 마을 앞에 세워두고 지팡이 하나 짚고 금성산 자락에 있는 '수정사' 절에 가려고 한 대요.'우리 것'을 찾아다니는 사람을 다시 만나니 무척 기뻤어요. 우리는 서로 다녀온 곳을 이야기하며 보고 듣고 느낀 걸 하나하나 되짚으며 정보도 나누곤 했답니다. 낯선 곳에서 같은 뜻을 품고 온 사람끼리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게 여간 즐겁지 않아요.
오늘은 제오리 '공룡발자국 화석'과 의성에서 남다른 문화를 꽃피웠던 '조문국'의 경덕왕릉, 또 옛것을 좋아하는 우리 마음을 찡하게 했던 탑리역 둘레, 옛집이 많은 산운마을까지 둘러봤습니다.이제 의성 이야기 마지막으로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듯한 바람이 나온다는 '빙계계곡' 이야기가 남았는데요. 올여름 나들이하기도 좋은 이곳 이야기를 남겨 놓을게요. 다음 이야기도 귀 기울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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