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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는 다시 항구(Ketchikan)를 떠난다. 항구는 언제나처럼 다시 비에 젖는다. 잠시 사람들은 감회에 졌다가 빠른 시간내에 그들의 일상으로 되돌아간다. 배에 탄 사람들은 배의 일상으로, 항구에 남은 사람들은 항구의 일상으로. 이제 크루즈 여행도 막바지로 향하고 있다. 내일 하루는 항구에 들림 없이 빈 바다를 항해하고 모레 아침이면 종착지 밴쿠버에 닿는다. 배가 닿으면 승객들은 그동안 여행으로 젖은 감회를 재빨리 널린 빨래걷듯 걷어내고 그들의 일상으로 돌아가겠지. 일상 그 익숙하나 뭔가 허전한 곳으로.

ⓒ 제정길
오늘은 배에서 두번째 맞는 포멀 드레스의 만찬 날이다. 여기 프로빈스 다이닝 룸에서의 식사도 오늘과 내일 저녁이면 끝이다. 그 다음 날 저녁부터는 캐나다 땅의 어느 낯선 식당에서 우리의 저녁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오늘의 주메뉴는 랍스터다. 그것은 내가 좋아하는 음식 선호도 1위 종목이다. 랍스터는 두마리가 나왔다.

붉은 빛 나는 딱딱한 각질에 싸인 그놈은 머리는 잘려 나간채 몸통만 남아 쟁반에 담겨 얌전히 내앞에 놓여졌다.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돌았다. 포크와 나이프를 들고 그것의 껍질을 벗기려는 순간 친절한 '희랍인 조르바'는 번개같이 달려와 재빠른 손놀림으로 순식간에 그것들을 홀라당 벗겨버렸다. 실로 놀라운 칼솜씨였다. 나도 한칼 쓴다고 자부하는데 그 앞에서는 초라해질 수밖에 없다. 그는 나의 찬사를 뒤로 하고 다른 테이블로가서 그의 칼솜씨를 연신 뽐내었다.

벗은 랍스터의 살은 연하고 부드럽고 향긋했다. 그것은 아직은 정정한 내 잇발 사이에서 몇번의 깨물림을 당한 후 목구멍을 타고 천천히 위속으로 가라앉았다. 향내는 아직 입안에 남아있고 여운은 코끝을 감돌았다. 곁들여서 마신 한모금의 와인은 랍스터가 갔던 항로를 따라 그를 뒤쫓아가며 애타게 그를 불렀다.

▲ 실내의 불을 끄고 노래를 부르면서 디저트인 아이스크림 케익을 들고 나오는 식당 종사원들
ⓒ 제정길
랍스터와 와인이 위속에서 서로를 애무하는 동안 나는 내내 행복했고 그리고 고마웠다. 캐나다의 차거운 바다에서 동료들과 즐겁게 노닐다가 졸지에 그물에 걸려, 언 상태로 위티어 항까지 운반되고 그곳에서 프린세스호에 실려, 끝내는 나의 식탁에 현신(現身)하여 그의 몸을 버리고 나의 몸이 되어준 나의 랍스터에게 우선 고마웠다. 그리고 재빠른 칼솜씨를 자랑하는 희랍인 조르바의 친절함이 고마웠고, 무엇보다 나를 이곳으로 초대해준 조카에게 고마웠다. (그러고 보니 무슨 오스카상 수상 소감 같네.)

랍스터로서는 다소 억울한 생각도 들었어리라. 만일 그가 하느님에게 가서, 평생에 죄라곤 지어본 적이 없는 그가, 나쁜 일을 밥 먹듯이 하는 나 같은 인간의 먹이감이 됨은 공평치 못한 처사라고 항의한다 하드라도 나로서는 아무 할 말이 없다. 단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부드러우면서도 쫄깃한 그의 몸을 제대로 음미하며 남김없이 먹어 치우는 것 뿐이다. 그의 몸은 나에게 기쁨을 준다. 고백하자면 나는 지금껏 누구에게 제대로 기쁨을 주어 본 일이 없다. 죽어서 누구의 식탁에 올라 그에게 기쁨을 줄 처지도 못 된다. (나는 화장(火葬)주의 자다) 그런면에서 나는 랍스터 보다는 한참 하위의 생물임이 분명하다.

▲ 751개의 샴페인 잔에 샴페인은 부어지고
ⓒ 제정길
식사를 끝내고 나오니 배 중앙에 위치한 아트리움 프라자(Atrium Plaza)에서는 샴페인 워터폴이 막 시작되고 있었다. 751개의 샴페인 잔을 원추형으로 쌓아놓고 그위에 삼페인을 쏟아붓는 행사란다. 샴페인도 공짜로 준다니 카메라를 들고 은근슬쩍 다가가 보았다. 751개의 삼페인 잔을 원뿔 모양으로 쌓아 올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두세명의 숙달된 사람들도 땀을 뻘뻘 흘리며 30분 이상 공력을 들인 끝에야 완성할 수 있었다.

▲ 플로어에서 춤추는 승객과 승무원들
ⓒ 제정길
그리고는 그위에 삼페인을 쏟아붓는 것이다. 배의 칩 오피스로부터 시작한 쏟아붓기는 주변의 승객들로 이어지고 사람들은 그때 마다 박수를 치며 환호하였다. 웨이터가 날라다 주는 샴페인을 세잔이나 마셨더니 기분이 약간 고조되었다. 사람들도 기분이 고조되었는지 갑자기 옆 사람의 허리를 잡고 통로를 따라 빙빙 도는 기차 춤을 추기 시작했다. 몇 사람으로 시작한 기차춤은 드디어는 맨 뒷사람의 꼬리가 맨 앞 사람의 머리와 이어지는 원형을 이루었다.

▲ 춤추는 것을 난간에 서서 구경하는 사람들
ⓒ 제정길
악단의 연주는 점점 더 빨라지고 술잔의 비는 속도도 덩달아서 빨라지드니 춤은 기차춤에서 막춤으로 바뀌어 갔다. 플로어의 승객들과 승무원들은 어울려서 몸을 흔들어대고 난간에서 이를 내려다 보는 사람들은 그들의 술잔을 옆 사람과 함께 흔들어대었다. 크루즈 여행은 그 막바지를 향해 치닫고 있었다.

술이 좀 된 상태에서 선실로 돌아왔다. 밤은 많이 늦어져 이미 오늘이 아니고 내일이었다. 밤의 언저리에서 잠이 쿵쿵 발자국 소리를 울리며 몰려오는 것이 느껴졌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이 낯선 환경에서 잠이 이렇게 떼를 지어 몰려오다니.

실토 하건데 나는 꽤 오래전부터 잠을 잘 못 잤다. 잠이 들었다가도 시도 때도 없이 깨었다. 새벽 2, 3시경 불현듯 잠을 깨어 시계를 보았을때 '아, 아직 한참을 더 잘수 있겠구나' 하는 안도감을 느끼던 시절은 어느덧 지나가고, '아, 아직도 날이 밝으려면 한참을 더 있어야 하는구나' 하는 당혹감을 느끼기 시작한지가 한참 오래 되었다.

ⓒ 제정길
그것은 어쩌면 일터에서 팅겨나온 뒤에 생긴 버릇 같기도 하고, 아니 그전에 어머니가 천수를 다하지 못 하고 돌아가신 뒤에 생긴 버릇 같기도 하고, 어쩌면 늙어가는 과정에서 점차로 생겨난 버릇 같기도 하였다.

크루즈 여행을 위해 시애틀 공항에 내렸을때 가장 먼저 생각난 것은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이라는 영화 제목이었다. 거기에다 알래스카에 첫발을 디뎌, 밤 10시가 넘어야 해가 진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도 모르게 '인썸니아(Insomnia:불면증)'라는 영화가 불현듯 떠올랐다. 백야의 밤에 범인을 쫓으며 불면으로 고통을 겪는 알 파치노의 부스스한 얼굴이 내 모습인양 오버랩 되어서였다. 불면으로 고통 받아온 내 잠 버릇이 불면으로 유명한 백야의 땅에서 어떻게 견뎌낼 수 있을지 내심 많이 걱정이 되었었다.

ⓒ 제정길
그러나 걱정과는 달리 크루즈 여행 내내 잘 잤다. 한번도 잠이 모자란다는 느낌도 없었고 한번도 더 자야 한다는 느낌도 없었고 한번도 잠을 못 이루어 뒤척인 날도 없었다. 밤이 되어 선실에 돌아오면 순식간에 잠들었고 잠을 깨면 언제나 날은 밝아 있었다. 내가 봐도 신기할 정도였다. 무엇이 나를 잠으로 이끌었을까.

어쩌면 잠을 자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무뎌진 게 그 원인이 아닐까 생각이 되어진다. 밤10시가 넘어야 해가 지는 알래스카의 날씨와 선상생활의 밤 늦은 부산함은 늦게 까지 잠들지 않아도 된다는 편안한 마음을 갖게하고 또 어쩌다 밤에 자다가 깨어도 알래스카의 태양은 언제나 나 보다 먼저 일어나 있으니까 굳이 다시 잠들지 않아도 되었다. 어쩌다 실수로 내가 먼저 눈을 뜨더라도 조금만 기다리면 태양은 재빨리 모습을 드러냈다. 새벽 4시만 되면 그는 얼굴을 내미니까, 나는 조바심을 낼 필요가 없었다. 거기에다 '요람처럼 흔들어주는' 배의 진동은 나를 아기처럼 깊은 잠에 빠지게 했을지도 모르겠다.

▲ 꿈속의 배
ⓒ 제정길
졸린 눈으로 고개를 돌려 발코니 쪽을 바라보니 어두운 바다에 불 밝힌 배 하나 지나간다. 꿈결인지 흔들리며 배는 밤속으로 떠내려간다. 나는 지금 꿈속에 있는지 꿈 밖에 있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흐릿하게 같이 밤속으로 떠내려간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한 평범한 '늘근백수'가 미국 등지를 떠돌며 보고 느낀 것을 기술해가는 여행기입니다. 여행은 4월 25일 시작되었고, 7월 말 쯤 끝날 예정입니다. 지금은 알래스카-밴쿠버 간의 크루즈 여행기를 올리는 중이고 이어서 캐나다 록키 패키지 관광 등을 게재하려 합니다. 글은 중간 거점인 새크라멘토에서 인터넷 작업을 하여 보내고 있습니다.


태그:#늘근백수, #크루즈, #알래스카, #불면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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