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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 여름밤


반딧불 하나 둘
별이 되려고 사락사락
살찌는 들녘에서 피어나면
철둑길 따라 흐르는 봇물에
개구리 한바탕 울어댔지

코끝에 실리는 오이꽃 향
머리 푼 연기만 너울너울

담 밑에 함박꽃 함박웃음
박꽃은 달빛에 수줍은데
덕석에 누운 누나의 꿈은
오붓한 가슴에 소록소록
무섭던 아버지도 정다웠지

엄마의 몸에선 흙냄새가
뒤뜰에 돋아나는 감꽃 향기
단 수수 잎사귀 사각사각
힘없이 부채마저 잠이 들면
시름시름 여위는 모깃불
어머니 무릎에 잠든 동생은
봇물에 첨벙첨벙 뛰어드나 봐

처녀들 노랫소리 잦아들면
달은 새벽으로 기울어
풀벌레 찌르르르 코 고는 소리
뱃속에선 쪼르르르 시냇물 소리
아버지 엄마는 단잠이나 드셨을까?
긴 긴 여름밤 쓰르르르
아득한 가슴에 사무쳐라

-김홍표 지음


▲ <뒤란에 서다> 김홍표 지음 7천원
ⓒ 북랜드
김홍표님의 시집 <뒤란에 서다>에 실린 '그 해 여름 밤'을 음미하며 아침 사제독서 시간에 우리 반 아이들과 함께 독서를 하다가 베껴 본 시랍니다.

저는 오늘 아침 이 시집을 읽으며 40여년 전으로 돌아가는 행복을 누렸답니다. 초등학교 시절 여름밤에 모기장 속에서 아버지가 사오신 수박 한 통, 참외 몇 개를 먹으며 행복했던 시간들을 반추해 냈습니다. 이제 그 아버지는 그리움 저편, 내 삶의 뒤란에 서 계십니다. 시 한 편이 주는 아득한 그리움에 작가의 시선을 따라나섰답니다.

언제부턴가 우리네 삶의 터전이었던 농촌은 아픔과 좌절의 그림자를 드리운 채,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는 모습으로 비친 현실이 안타깝지요. 그럼에도 시인의 눈에는 그리움으로 점철된 그날들이 새록새록 그려져 있어서 향수에 젖게 하는 시들이 즐비했습니다.

세간에 유행하는 말로 '누가 시집을 돈 주고 사서 보는가?' 할 정도로 시집을 사는데 인색한 우리들의 주머니는 유난히 책값에 인색한 것 같아 서글픕니다. 저도 이 시집을 선물 받고 제 수필집을 보낼 생각입니다. 자식을 잉태했으니 낳아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 자식으로 인하여 덕을 보고자 하는 부모는 드문 것처럼, 마음으로 낳은 시집이나 산문집을 출간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부모 마음을 갖곤 합니다.

오늘 문예반 아이들과 함께 낭송하며 시 감상 수업까지 했답니다. 시골 아이들이라 작가의 시선을 금방 따라가서 참 기특하고 즐거웠습니다. 덕분에 즉석에서 시를 짓는 시간까지 곁들였으니 좋은 수업 자료로 활용한 셈입니다.

풍성한 의태어와 의성어는 초등학교 학생들에게도 좋은 글감이 되기에 충분했던 '그 해 여름밤'은 이 여름이 다가도록 나를 불러내어 그리움의 편지를 쓰게 할 것 같습니다.

잔잔한 서정을 불러 일으키는 시들로 가득 찬 김홍표님의 시집 <뒤란에 서다>(북랜드) 속에는 농촌의 아픔보다 그리움이 잔뜩 묻어나게 하는 예민한 감성의 노래들이 잊혀진 시간들을 불러내 줍니다.

사라져 가는 농촌의 문화와 언어를 기록하고 남기는 일이 작가들의 몫이라면 그 언어와 문화를 재발견하여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농촌의 아름다운 서정을 다시 찾게 하는 일은 우리 어른들과 선생님들의 몫이 아닐까요?

그리워할 '그 무엇'을 어린 시절에 많이 쌓게 하는 일은 평생을 살아가는 힘과 사랑의 원천이 되리라 확신합니다. 할 수만 있다면 감성을 일깨우는 서정적인 시집도 늘 읽을 수 있었으면 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시원한 여름밤을 위해 내일이나 모레쯤 아니면 오늘 밤 당장 시집을 읽으며 마음의 고향으로 달려가지 않으실래요?

덧붙이는 글 | 아침독서 시간에 아이들과 함께 읽은 시집이 인상 깊어서 글 속으로 초대합니다. 사라져 가는 농촌의 향수를 그림 같이 그려낸 작품이 참 좋아서 추천하고 싶어서 쓴 글입니다.


뒤란에 서다

김홍표 지음, 북랜드(2007)


#김홍표#뒤란에 서다#시#그해여름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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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매에는 사랑이 없다> <아이들의 가슴에 불을 질러라> <쉽게 살까 오래 살까> 저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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