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 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 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인 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 이형기의 '낙화(落花)' 전문
올 봄 여름 유난히도 자주 꽃 지는 모습에 눈을 주었더랬습니다. 저희 어머니 말씀 따라 나이 들면 꽃을 더 아끼게 되는 것인가? 제 고향집 앞에 심은 노각나무가 하얗게 꽃을 피우더니 하루를 견디지 못하고 뚝뚝, 참으로 어이없이 떨어집디다. 살던 터를 옮기더니 심한 몸살을 하나 봅니다.
그런데 묘한 것은 이사 후유증으로 잎 모양새도 제대로 갖추지 못하는 주제에 턱없이 많은 꽃들을 피워내는 점입니다. 나무도 위기에 닥치면 열매를 맺으려 열심인가? 난의 꽃을 보기 위해서는 찬바람을 쐬어 위기의식을 느끼게 해주어야 한다더니 그 꼴인가 봅니다.
요즘 외신에 '9·11 베이비'니 '허리케인 베이비'니 야단이던데 사람 사는 모습이나 식물 살아가는 꼴이 닮아 있는 듯합니다. 9·11 테러나 허리케인과 같은 위기상황에 처하면 사람들도 본능적으로 후세를 위한 '작업'에 열중한다는 것 아닙니까? 중세 페스트와 같은 전염병이 창궐한 후에 출산율이 급증하는 것과 비슷한 현상이라 할 수 있는 것이지요.
물론 허리케인으로 인해 전기가 다 나간 마당에 '사랑놀음' 말고 할 일이 무엇이 있겠느냐고, 아니면 전기 대신 오랜만에 촛불 켜고 마주 있다 보면 그런 분위기에 휩싸이지 않겠느냐고, 이죽거리는 사람도 없지 않습니다만.
이상한 것은 그렇게 피워낸 꽃들을 하루가 멀다 하고 떨어뜨리는 것입니다. 새로 터를 옮긴 마당에 그 많은 꽃을 지탱할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위기에 처하여 후세를 기약하고, 다시 그로 인한 생존의 위협을 극복하기 위해 스스로 자신을 덜어내는 본능. 길게 보지 못한다고 탓할 수도 있겠지만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 참으로 처연해 보이지 않는가요?
이형기 시인도 꽃이 지는 모습에서 이런 의미를 읽어낸 듯합니다. 가을, 열매로 무르익기 위해서 불가피하게 겪어야 하는 희생에서 이별의 아픔을 통한 성숙이라는 자연의 이치를 확인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자칫 추할 수도 있는지는 꽃에서 '가야할 때를' 아는 사람의 아름다운 뒷모습을 읽어낼 수 있는 것입니다.
장난기 어린 안도현 시인은 꽃이 지는 모습에서 또 다른 의미를 읽어 냅니다. '건들거리'며 아무렇게나 얘기하는 듯하지만 그 뜻은 자못 의미심장합니다. 박노해 시인이 잘 그려주었던 '해거리'와 유사한 이치, 그리고 아름다움의 '실용성' 혹은 '효용성'이라는 함의를 '건들거림' 속에 감추고 있는 것입니다.
뜰 안에 석류꽃이 마구 뚝뚝 지는 날, 떨어진 꽃이 아까워
몇 개 주워들었더니 꽃이 그냥 지는 줄 아나? 지는 꽃이
있어야 피는 꽃도 있는 게지 지는 꽃 때문에 석류 알이
굵어지는 거 모르나? 어머니, 어머니, 지는 꽃 어머니가
안쓰럽다는 듯이 바라보시고, 그나저나 너는 돈 벌
생각은 않고 꽃 지는 거만 하루 종일 바라보나? 어머니,
꽃 지는 날은 꽃 바라보는 게 돈 버는 거지요 석류알만한
불알 두 쪽 차고 앉아 나, 건들거리고
- 안도현의 '꽃 지는 날' 전문
점잖은 분들에게는 마지막 부분이 조금은 야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겠습니다. '거대 담론'을 잃어버린 요즘 시들이 구체적 일상으로 내려오면서 흔히 드러내는 위악적 선정성.
정양 선생의 능청스러운 에로티시즘이야 새삼스러울 것이 없는 일이지만, 점잖고 진지하던 복효근 시인의 최근 시들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조금은 생뚱맞은 '야스러움', '진지함의 해체'로 인한 시인들의 고민과 무관하지 않겠지만 걸리기는 조금 걸리는 대목입니다. 안도현의 '야스러움'이야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만.
이런 의미에서라도 낙화의 의미를 좀더 진지하게 성찰하고 있는 조지훈 선생의 시를 견주어 읽지 않을 수가 없겠습니다.
꽃이 지기로소니 바람을 탓하랴
주렴 밖에 성긴 별이 하나 둘 스러지고
귀촉도 울음 뒤에 머언 산이 다가서다.
촛불을 꺼야 하리. 꽃이 지는데
꽃 지는 그림자 뜰에 어리어
하이얀 미닫이가 우련 붉어라.
묻혀서 사는 이의 고운 마음을
아는 이 있을까 저어하노니
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 조지훈의 '낙화' 전문
이 시에서도 역시 꽃이 지는 것을 '우연한 사고'쯤으로 여기지는 않는 듯합니다. 그러니 바람을 탓할 수 없는 것이지요. 허나 그러나 그 아름다움이 사라지는 것으로 인한 서글픔을 애써 감추려 하지도 않습니다. 지연의 이치라 해도 안타까운 것은 안타까운 것이라는 게지요.
여기서 특히 눈여겨볼 일은, 꽃 지는 것에 대한 시인의 마음 움직임이라 하겠습니다. 뜰에 어리는 '꽃 지는 그림자'를 차마 볼 수 없어, 아니면 그림자라도 더 오래 보고 싶어, 촛불을 꺼야 할지 놔둬야 할지 망설이는 마음이 손에 잡힐 듯 그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별이 불가항력의 일이라 해도 아쉬움의 뒤돌아봄이 없을 수 없습니다. 남들 다 가는 군대라지만 손 흔들며 떠나는 아들을 마냥 차분하게 보낼 수는 없는 일입니다. 고운 옷 차려입고 시집가는 딸아이 떠나보내며 남의 일처럼 초연할 수도 없는 일이고요.
죽음이 피할 수 없는 자연의 이치라 해도 그냥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이 얼마나 될까요? 어느 시인의 표현처럼, "어느 누가 망각의 제물이 되어/ 이 즐겁고 걱정스러운 삶을 하직하고,/ 유쾌한 날의 따뜻한 뜰을 떠나면서/ 그립고 아쉬운 눈으로 뒤돌아보지 않겠는가?" 말입니다.
이 작품에서 '속세를 멀리한 은자(隱者)의 체념과 정신적 자부'를 동시에 읽어내는 사람도 있고, '선비로서의 기품과 달관의 고양된 정신세계'나 '정적이면서 신비감을 주는 아침녘 뜨락'과 조화를 이루는 '선적(禪的) 고요의 분위기'를 강조하는 해설도 널리 퍼져 있는 듯합니다만, 이것이 정녕 마지막 행의 '울고 싶어라'까지를 고려한 평가인지, 의아스럽기만 합니다.
조지훈 시인을 말할 때 들먹이기 십상인 '고상하고 아취(雅趣) 있는 선비의 기품'에 갇힌 해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능소화 하염없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며 맥없이 해보는 것입니다.
대금의 달인 원장현은 꽃이 지는 모습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낙화로 은유되는 별리의 아쉬움, 안타까움, 그 '울고 싶은' 마음을 그리는 데에 절절한 대금의 흐느낌이 제격이라면, 그것을 감싸주는 신시사이저(synthesizer)는 성숙 혹은 결실을 위해 아픈 이별을 감수하는 또 다른 아름다움, 그 체념과 관조의 넉넉한 마음의 품을 그려주기에 안성맞춤이라 여긴 것은 아닐까? 대금이 시나위 가락으로 구름 위를 내달리며 슬픔을 흐느낄 때, 애이불비(哀而不悲)의 마음으로 이를 다독이고 받쳐주는 구름의 역할은 신시사이저가 해주고 있는 듯한 것입니다.
떨어지는 꽃은 쓸쓸하다. 아름답다. 축복이다.
열매를 맺기 위한 신의 은총이다.
봄의 화사한 꽃, 여름의 뜨거운 태양, 낙화...
흩날리는 꽃잎들, 하늘의 축복인 듯 아름답다.
꽃비, 꽃바람, 슬프지 않다.
꽃이 떨어져 찬란한 축복의 열매를 맺는다.
원장현의 말솜씨나 감수성이 시인 못지않아 보입니다. 허기는 그런 것 없이 이런 곡을 어떻게 만들며 또 어떻게 연주할 수 있겠는지요?
이 곡은 1998년에 나온 그의 세 번째 앨범 <날개>에 실려 있습니다. 그를 최고의 대금연주자로 인정받게 해준 이 음반은 우리 음악의 대중화에도 혁혁한 기여를 합니다. 여기에는 아름다운 비상을 꿈꾸게 해주는 타이틀곡 '날개'를 비롯하여 우리나라 대표적인 전통 정원의 정경을 담담하게 그리고 있는 '소쇄원', 그리고 '고향 가는 길' 등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대금 고유의 절절한 흐느낌을 맘껏 탐닉하게 해주는 것으로는 단연 이 곡을 꼽을 수 있겠습니다.
꽃이 지고 있습니다.
풍요로운 가을의 결실을 위해.
석류알을 굵게 하기 위해.
아니면 시인 돈 벌라고.
그것도 아니라면 후줄근한 장마에 지친 우리들 마음을 달래주기 위해.
안타까워할 일만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초연해 할 일도 아닙니다. 때로는 흐느낌이 카타르시스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여름을 나기 위해 땀을 흘려야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 곡 들으시며 이별, 그 아픔의 땀 많이 흘리시기 바랍니다. 상큼한 여름 마련해나가기 위해서라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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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issuetoday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