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 박근혜 후보는 89년 5월 19일 MBC와의 인터뷰에서 "부모님에 대한 왜곡된 평가를 바로 잡는 것이 자식의 도리"라고 말했다.
ⓒ 월간 <근화보> 창간호 스캔

은둔과 침묵만이 능사는 아니었다. 체육관 선거로 집권한 5공이 막을 내리자 박근혜 현 한나라당 대선 예비후보는 작심한 듯 공개발언을 시작했다. 민주화운동의 결실이 그를 '밀실'에서 '광장'으로 이끈 셈이다.

특히 89년 5월 당시 인기프로그램이었던 MBC의 '박경재의 시사토론'에 출연한 것은 대중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출연 시점도 남다른 의미가 있다. 10년간 '은둔의 세월'을 보낸 박 후보가 근화봉사단('새마음봉사단'의 후신)을 조직하는 등 조심스럽게 대외활동에 나섰던 때이기 때문이다. 그는 당시 MBC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혔다.

"그동안 아버지가 하신 일과 관련 왜곡된 평가나 보도를 수없이 접했다. (그에 대해) 말하고 싶은 생각이 많았다. 그런데 기회가 안 됐다. (아버지) 기념사업도 하고 싶었지만 여건이 안됐다. 그런데 작년부터 기회가 성숙됐다. 이런 기회에 부모님에 대해 잘못된 것을 하나라도 바로잡는 것이 자식된 도리 아니겠는가 싶어 (인터뷰 등에) 적극 응해왔다."

"아버지가 너무나 극심하게 매도됐던 5공 시절"

인터뷰는 5·18 광주민중항쟁 기념일 직후인 89년 5월 19일 총 2시간에 걸쳐 진행됐다. 장소는 지난 1970년 박 후보의 모친인 육영수 여사가 지은 어린이회관. 진행은 변호사 출신인 박경재씨가 맡았다.

당시 인터뷰 내용은 근화봉사단 기관지인 월간 <근화보> 창간호에 실렸다(총 9쪽). <근화보>는 "방송이 나가기 전부터 시청자들의 방영 여부를 묻는 전화, 확인전화가 방송국으로 쇄도하는가 하면 방송이 나간 지 1주일이 넘도록 반응전화, 또는 재방을 요구하는 전화 등 방송사상 드물게 높은 시청률을 올렸다"고 전했다.

인터뷰 초반부에 박 후보는 '기념사업조차 할 수 없었던' 침묵의 세월을 언급했다. 그가 "그 전까지 (박정희·육영수) 기념사업을 할 수 없었다"고 말하자, 진행자는 "누가 방해를 해서 못했다는 얘기냐"고 물었다.

"제가 새마음운동을 했는데, 그 새마음운동도 타의에 의해 해체된 거나 마찬가지다. 그런 마당에 무슨 기념사업회를 한다는 것은 더더구나 어려운 일이었다."

쿠데타와 체육관 선거로 집권한 5공을 겨냥한 발언이다. 진행자는 다시 "5공 시절에 그 두 분(전두환·이순자)이나 그 두 분의 지시를 받은 수하의 인물들이 박근혜씨나 박 대통령 유족의 활동을 박해한 적 있냐"고 캐물었다.

"그런 기억은 없다. (다만) 5공화국이 저한테 어떤 의미가 있는가? 저로선 그 5공화국 시절을 상당히 가슴 아프게 살아왔다. 가슴 아프게 기억된다. 왜냐하면 돌아가신 아버지와 아버지가 하신 일이 너무나 극심하게 매도됐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딸로서 가슴 아픈 일이지만 국가에도 정신적으로 큰 손해를 입혔다고 믿는다."

이어 진행자가 "백담사에 가 있는 전두환씨의 모습을 어떻게 느끼냐"고 묻자, 박 후보는 "청문회에 나온 일들이 없었다면 저런 일도 없었을 것"이라고 '백담사 옥살이는 인과응보'라는 반응을 보였다.

▲ 박근혜 후보는 "제 머리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득차 있다"고 말할 정도로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진한 애정을 나타냈다.
ⓒ 육영수 여사 전자기념관
대범한 27살... 10·26사건 보고받고 "3·8선은 괜찮냐"

인터뷰의 주제는 한국 현대사로 이동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 정보부장의 총격으로 사망한 '10·26사건'(79년)이 먼저 화제에 올랐다. 그런데 비보를 전해들은 박 후보의 반응이 인상적이다.

"그 당시에 아버지가 자주국방문제에 골몰하고 계셨던 것을 제가 옆에서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혹시 이런 공백기에 북한이 장난을 할 수도 있지 않겠나 싶어 '3·8선은 괜찮냐'고 (김계원 비서실장에게) 질문했던 기억이 난다."

당시 박 후보는 27살에 불과했는데, 그의 대범함이 묻어나는 대목이다. 74년 8월 육영수 여사가 저격당한 뒤 5년간 영부인 역할을 대행했던 경험 덕분일까?

그렇다면 박 후보는 10·26사건의 배경을 어떻게 보고 있었을까? 그는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 차지철 경호실장의 충성심 경쟁"이라는 분석을 내놓았다. 그리고 '저격자' 김재규 부장에 더 원죄의 가중치를 두었다.

"그 당시 경호실장과 정보부장의 충성심 경쟁이랄까? 그런 알력에서 비롯된 데다, 정보부장으로서 여러 가지 실책을 저지른 것에 대해 아버지가 문책하고 불신한 것에 대한 두려움이 복합되어서 우발적으로 일어난 일이라고 판단한다."

박 후보는 10·26사건이 '계획살인'이 아니라는 근거로 김재규 부장이 박 전 대통령의 생일선물로 마련한 시계를 들었다(양력 11월 14일이 박 전 대통령의 생일이었다). 생일선물까지 마련한 김재규 부장이 계획적으로 아버지를 죽였겠느냐는 것.

그래도 김 부장을 향한 원망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만약 아버지가 하신 일이 잘못됐다고 생각했다면 사나이답게 한 번이라도 아버지께 건의를 했어야 한다. 옛날에 도끼를 앞에 놓고도 상소라는 걸 하지 않았나. 유신을 정말 나쁘게 생각했더라면 한번이라도 얘기를 했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고 건설부장관을 비롯해 좋은 부귀영화는 다 누리고, 정보부장이라는 높은 자리까지 주었는데 그런 식으로 배신을 한다는 것은 패륜이다."

박 후보가 당시 김재규 부장과 차지철 경호실장의 경질을 요구한 건의서를 전달했다는 대목도 나온다.

"10·26 사태가 없었다면, 김재규 정보부장은 분명히 경질됐을 것이다. 또 차지철 경호실장도 그 자리를 물러나게 됐을 것이다. 그 때 제가 여러 통의 편지와 건의서를 받았다. 아버지 주위의 몇몇 사람들이 일을 망치고 있다, 그 사람들을 하루 빨리 사퇴시키지 않으면 안된다는 강력한 건의였다. 거기엔 김재규 부장과 차지철 실장도 포함돼 있었다. 그걸 종합해서 아버지에게 말씀드렸다."

흥미로운 점은 김재규 부장에 대해선 '경질', 차지철 실장에 대해선 '퇴진'이란 표현을 썼다는 것이다. 당시 박 후보가 최태민 목사건을 두고 김 부장과 아주 불편한 사이에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 박근혜 후보는 88년 발족한 박정희·육영수기념사업회 회장을 맡은 데 이어 89년 근화봉사단을 출범시켰다. 사진은 89년 5월 근화봉사단 단원들이 박정희·육영수기념관 건립을 위한 성미를 거두어 당시 박 회장에게 전달했다.
ⓒ 월간 <근화보> 스캔
"5·16과 유신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은 없었다"

또 10·26사건이 터지기 전 박 전 대통령이 최규하 국무총리를 후계자로 염두에 두었다는 증언도 흥미롭다. 박 후보는 "아버지는 식사를 할 때 간간히 '다음 대통령이 누구면 좋겠냐'고 물었다"며 이렇게 말했다.

"나중에 아버지가 결론을 내리셨는데 '나는 최규하 국무총리가 맡아서 하면 잘할 걸로 생각한다'고 했다. 하루 아침에 내린 결정이 아니라 그동안 성실하게 일해온 것을 보고 쭉 판단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에 진행자가 "박 전 대통령은 전권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독재자였다"며 "독재자가 권력을 스스로 포기하고 나온 일이 가능한지 의문"이라고 꼬집자, 박 후보는 "아버지는 물러나서 좀 평화롭게 지내고 싶다고 굉장히 소망했다"고 반박했다.

이어 화제는 박 전 대통령이 권력을 잡은 계기였던 '5·16 쿠데타'로 돌아갔다. 5·16 쿠데타를 바라보는 박 후보의 시각은 분명했다. 그는 "구국의 혁명이었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재미작가가 아버지를 추모하면서 신문에 기고한 글에 '한반도가 아버지를 만들어간 방법과 아버지가 한반도를 만들어간 방법을 동시에 생각해야만 바른 평가가 된다'고 썼는데, 이것이야말로 아버지를 평가하는 데서 정곡을 찌른 것이다. 어떻게 군인이 정치에 개입할 수 있느냐, 헌정을 중단시켰다, 민주주의를 후퇴시켰다 등의 비판이 나오는데, 과연 5·16과 유신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이 존재할 수 있었겠나?"

하지만 진행자가 "5·16이 있었기 때문에 5공이라는 또다른 군사독재정권이 출현했다"고 지적하자 박 후보는 "그런 어거지 논리가 세상에 어디 있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아버지가 하신 모든 것을 깎아내리기 위해 어거지로 갖다붙인 논리다. 그 때 시국을 보는 분들은 5·16이 먼저 나느냐, 공산당이 먼저 쳐들어 오느냐인데, 그런 점에서 5·16이 먼저 나서 파멸 직전의 국가를 구출했다고 보더라. 나라가 없어지면 그 다음엔 민주주의를 못하는 건 둘째치고 다 죽는 판 아닌가? 그래서 5·16혁명이 국민의 지지를 받았다."

심지어 박 후보는 "5·16혁명은 4·19의거의 뜻을 계승하고 있다"며 '5·16 옹호론'을 '4·19 계승론'으로 확장시켰다.

"4·19의거는 잘못된 나라를 바로잡기 위해 일어난 희생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라를 구하기 위해 일어난 5·16혁명도 4·19의 뜻을 계승하고 있다고 본다. 5·16이 있었기 때문에 4·19 때 희생된 분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목숨까지 버렸는데 4·19 후 그 혼란의 와중에 만약 우리나라가 공산당의 밥이 됐다면 그 희생이 무슨 가치가 있나?"

이어 박 후보는 '유신헌법'을 '자주국방'과 연결시키는 독특한 견해를 선보였다.

"유신과 자주국방은 뗄래야 뗄 수가 없다. 아버지는 유신을 통해 북한보다 10년이나 뒤진 우리나라의 병기 생산을 독자적으로 생산해서 자주국방을 달성하려 했다. 그런 계획을 차질없이 수행하려면 사회의 안정이 유지되어야 하고, 사회의 안정이 유지되려면 강력한 지도체제가 불가피했기 때문에 유신을 통해 그것을 이루려 했던 것이다."

▲ 지난해 10월 26일 서울 국립현충원에서 열린 고 박정희 대통령 27주기 추도식.
ⓒ 오마이뉴스 이종호
"아버지와 스위스 은행이 무슨 관계가 있나?"

또다른 현대사가 화제에 올랐다. 먼저 아직도 미스터리로 남아있는 김형욱 전 중정부장 실종사건이다. 중정이 박 전 대통령의 지시로 김형욱 전 부장을 파리에서 납치해 청와대 지하실에서 사살했다는 설도 있고, 최근에는 중정요원이 파리 근교의 양계장에서 김 전 부장을 살해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박 후보는 "저는 5·16도 무혈혁명이라는 것을 항상 다행이면서도 아버지다운 걸로 생각했다"며 "그런 아버지가 인명을 가볍게 볼 분이 절대 아니다"라고 말했다. '박정희 지시설'을 부인한 셈이다.

"아버지는 이렇게 추측을 했다. 김형욱씨가 중정부장으로 있을 때 원한을 산 일도 있고, 직권을 남용한 비리도 있었을 것 아니냐. 그런데 국회의원으로 있을 때야 신분보장이 됐지만 국회의원 공천에서 떨어지니까 신변에 위험을 느껴 미국으로 달아난 것 같다. 거기서 북쪽하고 연결돼서 돈도 많이 받고, 자기를 합리화하고 (나를) 비난하는 글도 썼다. 북한 쪽에서는 자기들의 목적이 달성됐으니까 잘못하면 탄로날까 봐 어떻게 한 것 아니냐. 혼자 상상한 게 아니라 여러 군데서 정보를 듣고 추측한 것 같았다."

또 박 후보는 '김대중 납치사건'과 관련, "아버지는 당시 '북한이 조작해서 한국정부를 궁지에 몰려고 한 게 아니냐'고 추측했다"며 "일본이 관련돼 있어서 공개적으로 발언할 경우 국가간에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가 일어날 수 있기 때문에 냉가슴을 앓았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진행자가 박 후보에게 "박 전 대통령이 수십억달러의 비자금을 스위스 비밀금고에 예치해놓은 것 아니냐"는 민감한 질문을 던졌다. 물론 박 후보는 "말도 안된다"고 일축했다.

"정말 너무 기가 막힌 조작이다. 도대체 스위스은행과 아버지하고 무슨 관계가 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 후보가 10·26사건 이후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의 명령에 따라 은행원출신의 보안사 직원 5명과 함께 스위스로 가서 박 전 대통령의 이름으로 관리되던 비자금 60억불의 존재를 확인하고 명의를 박 후보로 변경했다는 의혹이 제기된 바 있다.

"결혼을 안한다고 해서 큰 일 날 일도 아니다"

▲ 박근혜 후보의 20대 모습.
ⓒ 박근혜 후보 미니홈피
화제는 현대사에서 개인사로 넘어갔다. 진행자는 "부모님이 살아계셨다면 결혼을 해서 가정을 이루고 외손주도 낳은 생활을 원하지 않았을까"라고 물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살아계셨다면 그렇게 바라셨을 것 같다. 그런데 (두 분이) 돌아가셨으니까 바르게 빛내 드려야겠다는 생각에 모든 걸 바쳐도 충분히 보람이 있다. 다른 걸 할 마음의 여지가 없다. 보통사람들이 걷는 평범한 길이 가장 아름다운 길이라는 얘기를 저도 소설에서 본 기억이 난다. 하지만 결혼을 안 한다고 해서 그렇게 큰일 날 일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어 진행자가 "육영수 여사 생존시 약혼설 같은 것이 시중에 돌아다녔다"며 사실 여부를 캐묻자, 박 후보는 "전혀! 전혀! (아니다)"라고 강하게 부인했다.

또 진행자가 "육영수 여사 서거 이후 박 대통령 말년에 아버지가 결혼을 강력하게 권하지 않았나"라고 묻자 '박근혜다운' 답변이 돌아왔다.

"아버지는 마음 속으로 제가 나이도 있으니까 어떻게 결혼을 시켜야 하지 않을까 하는 부담이 분명히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아버지가 저를 굉장히 필요로 했고, 전 그것을 보람과 자랑으로 생각했다. 제가 5년 동안 아버지 곁에서 노력한 것도 아버지가 외롭지 않도록 어머니가 남긴 공백을 메꾸기 위해서 노력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박 후보는 인터뷰 중간중간에 아버지에 대한 애정을 그대로 드러냈다. 특히 "제 머리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운 마음으로 가득차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에도 박 후보를 두고 "그의 사고는 박정희시대에 멈춰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결국 '박정희 프레임'에서 벗어나는 것이 그의 최대 과제로 남아있는 셈이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1970년 전남 강진 출생. 조대부고-고려대 국문과. 월간 <사회평론 길>과 <말>거쳐 현재 <오마이뉴스> 기자. 한국인터넷기자상과 한국기자협회 이달의 기자상(2회) 수상. 저서 : <검사와 스폰서><시민을 고소하는 나라><한 조각의 진실><표창원, 보수의 품격><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국세청은 정의로운가><나의 MB 재산 답사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