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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헌법재판소는 1999년에 있었던 두 번의 합헌 결정을 뒤집었다. 재외국민의 선거권을 제한하는 공직선거및선거부정방지법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린 것이 주요 골자다. 정치인들은 여야 없이 해외순방 때마다 재외국민의 선거권 부여를 약속해왔지만 법 개정은 그간 난항을 겪어왔다.

2005년에 여야합의로 정치개혁특위를 통과한 선거법 개정안은 외교관, 상사주재원 등 국내에 주민등록이 있는 국외체류자에게는 대선에 한해 부재자 투표권을 부여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 조항은 법사위 심의과정에서 삭제되었는데, "국외 부재자투표를 대선에서만 허용할 경우 총선 등 다른 선거와 비교할 때 형평성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법사위는 오히려 총선이나 주민투표에도 확대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특위안도 해외부재자 투표, 즉 국내에 주민등록이 있는 경우에 한해 선거권을 부여하자는 입장에 불과했다. 그런데 이번 헌법재판소 결정은 국내에 주소가 없더라도 국적만 있으면 선거권 행사를 허용한다는 태도로 한발 더 나아갔다. 정치권이 립서비스만 무성하게 할 뿐 실천에 옮기지 않던 동포들의 오랜 숙원을 해결했다는데, 헌법재판소 결정의 의미가 있다.

8년 만에 헌법재판소의 태도가 바뀐 이유

재외국민 선거권 문제는 보통선거의 원칙과 관련이 있다. 이는 헌법상 원칙으로, 선거권자의 능력, 재산, 사회적 지위 등과 상관없이 성년이면 누구라도 당연히 선거권을 갖는다는 뜻이다. 물론 국적이 없거나 의사능력이 없는 자처럼 선거권 본질상 요청되는 사유에 따른 내재적 제한은 가능하다. 하지만, 국내에 주민등록이 없는 점은 본질적 제한사항이 아니다. 그저 국회에서 만든 법으로 제한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기본권 제한입법에 관한 헌법 제37조 제2항을 지켜야 한다. 과잉금지의 원칙을 준수하지 않으면 보통선거의 원칙에 반하여 위헌이게 된다.

재외국민들은 그동안 국적이 있어도 주민등록이 없으면 선거권 행사를 가로막는 이 조항을 계속 다투어왔다. 과잉금지의 원칙에 반한다는 외침이다. 1999년 결정에서 헌법재판소는 이러한 재일교포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여러 이유를 들었는데, 선거공정성을 확보하기 어렵고 선거기술상으로도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특히 우리의 독특한 현실을 지적했다. 가장 큰 문제로 국토가 분단되어 있는 우리나라에서 북한 주민이나 조총련계 재일교포에 대하여 선거권을 인정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대법원 판례에 따라 북한주민이나 조총련계 재일교포도 우리나라 국민인데, 재외국민 모두에게 선거권을 인정하는 선거제도를 둔다면 그들이 선거권을 행사하는 것을 저지할 수 없게 된다고 본 것이다. 근소한 표 차이로 당락이 결정되는 경우 이들이 캐스팅 보트를 행사하는 기이한 현상이 발생할 수도 있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렇게 우리 사회가 지닌 특수성이 기본권을 제한하는 토대가 되는 논리는 늘 아쉬운 대목이다.

그럼 8년 사이에 어떤 변화가 있어서 헌법재판소 태도가 변했을까. 사실 그 사이에 통일이 된 것도 아니고, 바뀐 현실은 없다. 다만 헌법재판소가 선거권이라는 민주사회의 기본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의지를 더 확고히 했을 뿐이다. 입법 편의주의에 빠지지 않고 좀 더 세밀하게 법을 만들면 해결할 수 있다고 보았다.

(...)재외국민등록제도 및 재외국민 국내거소신고제도를 활용하여 이들이 선거권을 행사할 위험성을 예방하는 것이 선거기술상 불가능하지 않고, 재외국민은 북한주민이나 조총련계 재일동포와는 달리 우리나라 여권을 소지하고 있어 양자의 구분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북한주민이나 조총련계 재일동포가 선거에 영향을 미칠지도 모른다는 추상적 위험성만으로 재외국민의 선거권 행사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을 정당화할 수 없다.

선거기술상 어려움, 정보통신기술 발달로 극복

또 하나의 쟁점은 국민의 의무와 관련되어 있다. 1999년 결정에서 헌법재판소는, 선거권은 국가에 대한 납세, 병역, 기타의 의무와 결부되기 때문에 의무이행을 하지 않는 재외국민에게 선거권을 인정하는 것은 무리라고 보았다. 재일교포와 같이 타의에 의하여 외국에서 거주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자진하여 출국한 사람도 많다는 것이다. 해외에 이민을 목적으로 거주하고 있는 국민들은 자의로 납세, 병역 등의 의무를 부담하지 않고 장차 그 국가에 동화되어 생활하게 될 이들이 많은데, 왜 그들에게 선거권을 인정하여야 하는지 어떤 논리도 발견할 수 없다고 했다.

이 논점 역시 8년 전과 다름없는 논쟁거리다. 다만 헌법재판소는 이번 결정에서 새로운 논리를 폈다. 헌법이 국민의 기본권행사를 납세나 국방의 의무 이행에 대한 반대급부로 예정하고 있지 않다는 원칙을 제시했다. 국내에서 세금을 내지 못하는 사람도 선거권을 행사한다. 또한 재외국민에게도 병역의무 이행의 길이 열려 있는 점, 재외국민 중에는 병역의무와 무관한 여성들도 있는 점, 청구인들 중 이미 국내에서 병역의무를 필한 사람도 있는 점 등을 감안했다. 이 쟁점은 앞으로 입법과정에서 다시 논란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 그동안 재외국민에 대한 선거권 부여를 반대하는 가장 강력한 논거가 국민의 의무를 불이행한다는 지적이었다.

이번 결정에는 8년 전과 다른, 변화한 현실에 바탕을 둔 새로운 논리도 있다. 바로 과학의 발전이다. 선거기술상의 어려움은, 정보통신기술의 발달 등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재외국민도 인터넷 등을 통해 후보자의 정보에 대한 접근이 쉬어지고 있다. 특히 오늘날 선거는 인물투표보다 정당투표 성격을 띠는 경향이 있어서 재외국민을 상대로 한 선거운동이 국내처럼 이루어지지 못해도 정보부족 때문에 선거권 행사를 가로막을 만큼은 아니라는 접근이다.

선거공정성을 확보 문제의 경우, 이는 기본적으로 국가의 과제인데, 국가가 힘들다는 이유로 특정국민의 권리를 가로막아서는 곤란하다고 보았다. 해외에서 이루어지는 선거운동방법의 적절한 제한, 투표자 본인의 신분확인방법 도입, 선거운동비용 지출에 대한 사전 사후관리 등도 우리 경제력의 성장과 기술발전에 기대어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선거권의 제한은 그 제한을 불가피하게 요청하는 개별적, 구체적 사유가 존재함이 명백할 경우에만 정당화될 수 있으며, 막연하고 추상적 위험이라든지 국가의 노력에 의해 극복될 수 있는 기술상의 어려움이나 장애 등의 사유로는 그 제한이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러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국제교류 잦아지는 세계화 흐름 고려

1999년에 있었던 또 하나의 사건은 해외부재자 투표문제를 다루었다. 재외국민 선거권을 논할 때 구분없이 논의되는 경우가 많은데, 앞서 사건과는 문제상황이 다르다. 앞서 본 사건은 국내에 주민등록이 없는 국민이 문제된 경우지만, 부재자투표문제는 국내에 주민등록은 있는 경우다. 주로 유학생 등 단기해외체류자가 해당된다. 법적으로는 장애가 없다. 해외거주자들은 투표 당일 귀국하여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다. 다만 투표하기위해서는 국내에 들어와야만 하는 사실상 걸림돌이 있을 뿐이다. 귀국에 소요되는 시간과 비용때문에 선거권 행사가 쉽지 않다. 국내에서만 부재자투표가 허용되는데서 비롯된 문제다.

헌법재판소는 1999년 결정에서 해외체류 국민들에게 부재자투표를 할 수 있도록 할 것인지 여부는 선거권 자체와 관련된 문제가 아니라고 보았다. 단지 선거권을 행사함에 있어서 편의를 제공할 것인지 여부에 관한 다툼이라는 것이다.

선거권을 행사하는데 소요되는 시간과 비용은 사람들마다 천차만별이어서 다른 사람보다 많은 시간과 비용이 소요되는 국민에는 여러 부류가 있을 수 있다. 국가가 이러한 국민들 모두에 대하여 투표권을 행사하는데 같은 시간과 비용이 들도록 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취했다. 결국 어느 정도 범위의 국민까지 부재자투표를 허용할 것인지 여부는 입법재량의 범위에 속하는 문제라고 보았고, 그 범위를 국내로만 한정해도 재량범위 내라고 했다.

헌법재판소는 8년 뒤 이번 결정에서는 우리의 경제력을 언급했다. 선거기간 연장에 따른 후보자들의 선거비용증가, 국가부담증가가 예상되더라도 우리 경제력으로 감당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단지 선거비용 걱정만으로 민주국가에서 선거권 행사를 제한하는 것은 더 이상 타당성을 인정하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선거권 행사에 대한 제한이라는 입장을 전제로 논의를 풀어간 것이다. 국제교류가 잦아지는 세계화 흐름도 고려했다.

가속화되고 있는 국제화시대에 해외로 이주하는 경우가 높아지고 있는 상황에서, 그것이 자발적 계기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이유만으로 국민이면 누구나 향유해야 할 기본적인 권리인 선거권의 행사가 부인되는 것은 타당성을 갖기 어렵다.

결국, 국내거주자에 대해서만 부재자신고를 허용하는 제도는 정당한 입법목적을 갖추지 못한 것으로 헌법 제37조 제2항에 위반된다는 결론에 이른다. 헌법재판소는 같은 취지로 국민투표법, 주민투표법에 대해서도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주민투표의 경우는 최근 법 개정으로 주민등록이 있는 외국인에 대해서도 투표를 허용하고 있는데, 이들과의 차별도 지적했다.

흩어진 디아포스라와 어떤 관계 맺을지 고민해야

이번 헌법재판소 결정은 외국과 비교한다면 때늦은 감이 있다. 현재 재외국민에게 참정권을 주지 않는 나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1개 회원국(유럽연합 포함) 중 우리와 터키,헝가리, 멕시코 네 나라뿐이다. 미국과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은 오래 전부터 재외국민에게 참정권을 부여해왔고, 이들 중 다수국가는 영주권자에게도 참정권을 부여한다. 최근에는 일본이 2000년부터, 이탈리아가 2003년부터 인정하고 있다. 중국·대만·북한의 경우는 일정 수 이상의 재외국민이 거주하는 지역에는 외국 선거구를 두고 국회의원을 선출해서 본국에 보내는 제도를 실시하고 있다.

우리도 전례가 없던 것은 아니다. 지난 1966년부터 재외국민 중 국내주소가 있는 해외체류자를 대상으로 하여 6년 동안 부재자투표를 시행한 바 있었다. 그러나 유신 선포 직후인 72년 12월 6일 통일주체국민회의법이 발표되고 기존 대통령선거법이 폐지됨으로써 해외부재자투표는 중단되었다. 유신 때 제도가 지금까지 지속되면서 파병군인이나 외교관과 같이 국가가 부여한 의무를 수행하고 있는 사람들도 기본권을 행사하지 못하게 되는 상황이 이어져 왔던 것이다.

헌법재판소 결정이 있자 곧바로 정치권에서는 일제히 환영논평을 냈다. 이와 같이 의견일치를 보아왔는데도 지금까지 스스로 법을 개정하지 못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선거에 미칠 파장과 이해득실에 대한 셈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지난 대선의 경우 15대 39만 표, 16대 57만 표 차로 당락이 결정된 점을 떠올릴 때 재외국민에 대한 선거권 부여는 엄청난 변수다. 해외부재자투표자만도 91만여명으로 추산되는데, 재외국민 모두에게 선거권을 허용하게 되면, 약 285만명의 유권자가 추가로 생겨난다.

헌법재판소는 2008년 12월 31일까지를 개정시한으로 못 박았고, 개정할 때까지는 현 법률을 적용할 수 있게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그 사이에 대통령 선거가 있고, 국회의원총선거가 있다. 이들 선거를 어떻게 치를지는 국회가 결정하게 된다. 다시 또 복잡한 손익계산이 이루어질 것이다. 정치권은 자신이 속한 정당과 정파의 이해관계를 따지는 데만 머물지 말고, 세계 곳곳에 흩어진 코리안 디아스포라와 앞으로 어떻게 관계를 맺을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것이다.

#헌법재판소#재외국민#선거권#동포#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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