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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재(52·오른 쪽)씨와 박수정(24)씨가 29일 서울 송파구청 앞에서 출근하는 동료 공무원들에게 전단을 나눠주고 있다.
임정재(52·오른 쪽)씨와 박수정(24)씨가 29일 서울 송파구청 앞에서 출근하는 동료 공무원들에게 전단을 나눠주고 있다. ⓒ 오마이뉴스 선대식

비가 흩뿌리던 지난 29일 오전 8시 서울 송파구청 앞. 이 곳에서 민원안내도우미로 일하고 있는 박수정(24)씨는 출근하는 동료 공무원들에게 전단을 나눠주고 있었다. 내용은 비정규직 차별 철폐였다.

임신 6개월째인 박씨가 전단지를 나눠주는 이유는 '비정규직보호법'으로 구청에서 쫓겨나게 생겼기 때문이다. 이 날은 박씨의 마지막 근무날. 구청에서는 지난 5월, 계약기간인 6월 30일 이후 재계약이 없음을 통보했다.

박씨는 "지난 2005년 8월 구청에 들어와 한달에 85만원 정도를 받으며 열심히 일했다"고 말했다. 이어 "구청에서 '상용직 공무원 기회를 주겠다, 기다리면 좋은 일 있을 것'이라고 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그를 기다리던 건 좋은 일이 아니라 '계약 해지'라는 나쁜 일이었다.

기다리면 좋은 일 있다더니 '계약해지' 통보가

지난 26일 한덕수 국무총리 주재로 열린 국무회의에서 '공공부문 비정규직 종합 대책'이 최종 확정됐다.
지난 26일 한덕수 국무총리 주재로 열린 국무회의에서 '공공부문 비정규직 종합 대책'이 최종 확정됐다. ⓒ 국정브리핑
정부는 지난 26일 '공공부문 비정규직 종합 대책'을 최종 확정했다. 주 내용은 기간제 노동자 20만여명 중 2년 이상 상시적인 업무에 종사한 7만명 정도를 무기계약으로 전환한다는 것. 2년이 되지 않은 기간제 노동자에 대해서도 전환계획을 마련하고 있다는 것이다.

박씨가 2년은 되지 않았지만 상시적인 일에 종사해온 이상 무기계약 전환 대상자다. 그렇다면 박씨는 왜 일자리를 빼앗기게 된 걸까? 정부가 거짓말을 한 게 아니라면, 어디서 잘못된 것일까?

정부의 비정규직 대책은 각 지자체에서 낸 '무기계약 전환계획서'를 토대로 작성된 것이다. 서울의 경우 서울시에서 각 자치구로부터 계획서를 받아 정부에 제출했다. 이해선 서울시 조직관리팀 팀장은 "무기계약 대상자가 무기계약으로 전환되지 못한 경우는 없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실제 상황은 달랐다. 송파구청이 지난 5월 서울시에 낸 '무기계약근로자 전환 계획서'에 따르면 송파구청 내 기간제 근로자 152명 중 1명만을 무기계약으로 전환하기로 했다. 그런데 기간제 근로자 152명 중에는 박씨를 포함해 12명의 상시적 업무 종사자들은 여기에 포함돼 있지 않았다.

이같은 상황에 대해 오인환 민주노동당 서울시당 의정지원부장은 "기간제 노동자를 일부로 축소한 것"이라며 의혹을 제기했다.

구청 "재정지원이 없어서"... 정부 "내년에 예산 준다고 했는데"

이영선 송파구 인사계장은 "일부로 축소한 게 아니다"면서도 "무기계약 대상자 12명이 빠져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인정했다.

이 계장은 "비정규직법에 따라 상시적인 업무를 하는 사람은 무기계약으로 전환해야 하는데, 예산 때문에 계약해지할 수밖에 없었다"고 해명했다. 또한 "법만 만들어 놓고 재정지원을 해주지 않아 어쩔 수 없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 계장의 말은 정부의 입장과 어긋나는 것이다. 지난 26일 확정 발표된 '공공부문 비정규직 종합 대책'에는 '사업의 종료, 폐지 등 합리적인 사유 외에 고용계약을 종료하는 일이 없도록 한다'고 명시돼 있다. 그렇다면 송파구의 조치는 어떻게 이해되어야 할까?

최영범 '공공기관 비정규직 대책 실무단' 사무관은 "예산 때문에 무기계약 전환을 포기하는 일이 없도록 지속적으로 지침을 내리고 설명회도 80회나 열었다"고 설명했다. "내년부터 총액인건비에 그 예산을 포함시켜준다고 했다"고 덧붙였다.

또한 최 사무관은 "기간제법 등 비정규직법은 (최소한) 기간제 형태를 유지하는 것"이라고 못박았다. 이어 "일선 구청에서 (무기계약 대상자 중) 무기계약으로 전환하지 않은 경우가 있다면 명백하게 법률과 정부의 지침을 잘못 이해한 것"이라며 "앞으로 지도 점검할 계획"이라고 강조했다.

엉망 계약서에 돌연 계약해지까지... 노동자만 고통

서울 송파구청의 모습.
서울 송파구청의 모습. ⓒ 오마이뉴스 선대식
결국 정부와 지자체 간의 엇박자 속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만 고통을 받고 있다.

11년째 송파구청 재무과에서 행정사무보조로 일해 온 노진혜(가명·36)씨 역시 무기계약 전환 대상자에 포함돼 있지 않다. 노씨는 계약이 끝나는 10월까지만 일할 수 있다. 수많은 비정규직 노동자처럼 노씨도 '계약해지'라는 이름으로 쫓겨나게 된다.

사실 노씨는 계약서를 쓰지 않았다. 매년 자동적으로 갱신됐기 때문이다. 노씨는 "비정규직 법 때문에 돌연 계약을 해지하겠다고 한 것"이라고 밝혔다. 노씨는 이어 "같이 일하는 정규직 공무원과 거의 같은 일을 한다"고 말했다.

공공부문 비정규직 대책에 따르면 상시적인 업무를 2년 이상 했던 노씨는 무기계약 전환 대상자다. "내게는 왜 무기계약전환이 적용되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노씨는 "밤마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 한다"고 말했다.

송파구청 민원봉사과에서 일하는 임정재(52)씨는 29일이 마지막 근무날이었다. 2002년 1월 공공근로로 시작해 2003년 1월부터 일용직으로 일했다. 정규직 공무원과 함께였다. 점심시간에도 제대로 못 쉴 정도로 바빴다. 하지만 임씨에게 돌아온 건 계약해지였다. 공공기관도 일반 기업과 다르지 않았다.

임씨는 노씨와 마찬가지로 제대로 된 계약서를 받지 못했다. 임씨는 "매해 1월, 6개월 계약을 맺고 1년을 일했다"고 말했다. 이어 "비정규직 법이 시행되자 부랴부랴 계약이 만료됐다고 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박수정씨 역시 계약서가 이상하긴 마찬가지였다. 11개월 계약을 맺고 1달을 쉬었다. 박씨는 "퇴직금을 주지 않기 위해 11개월 계약을 한 것"이라고 귀띔했다.

이러한 '엉망 계약서'는 서울시에서도 인지하고 있었다. 이해선 서울시 조직관리팀 팀장은 "몇몇 자치구에서는 인력을 잘못 써온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비정규직 보호법'이 주는 고통

정부와 지자체의 '헛발질'은 비정규직 노동자에겐 생존의 위협으로 다가온다. 인근 롯데호텔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남편과 살고 있는 박씨는 "착잡하다"고 짧게 대답했다. 다른 설명이 필요없기 때문이다. 남편의 월급만으로 2세 출산을 준비할 수 있을지 걱정이다. 그 뒤는 차치하고라도.

임씨 역시 간암 투병하는 남편 대신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상황에서 이번 계약해지는 충격이었다. 이미 고등학생 딸은 학원 한번 보낸 적 없는 상황. 임씨는 "당장 하루를 어떻게 살지 걱정"이라고 말했다. 임씨 역시 "막막하다"고 짧게 말할 뿐이었다.

이들은 "공공기관이 먼저 솔선수범해야 하는 것 아니냐"면서 "비정규직 보호법을 만들어 놓고 일자리를 뺏을 수 있느냐"고 소리를 높였다. 또한 "비정규직 법이 없었으면 (근무 조건이) 아쉽더라도 다녔을 텐데, 이 법 때문에 일자리를 잃어버린 것"이라며 한숨을 쉬었다.

정부가 스스로 비정규직 보호법이라 일컬었던 법 때문에 공공부문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고통을 받고 있다. 과연 정부는 비정규직 '보호'법이라는 자신들의 말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비정규직#공공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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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법조팀 기자입니다. 제가 쓰는 한 문장 한 문장이 우리 사회를 행복하게 만드는 데에 필요한 소중한 밑거름이 되기를 바랍니다. 댓글이나 페이스북 등으로 소통하고자 합니다. 언제든지 연락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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