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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 앞 마당에서 바라 본 석양
ⓒ 최재인
장마로 하루에도 날씨가 흐렸다 맑았다 하기를 몇 차례 반복하는 요즘, 부모님이 살고 계신 강원도 시골에서는 배추며 무, 감자 등 온갖 작물이 제 덩치를 불려가며 자라고 있을 시기다.

땅 속 깊이 알알이 맺혀있던 콩알만한 감자들이 살을 찌워 어느 곳에서는 밭고랑에 금이 가기도 했을 것이고, 고추밭에서는 새끼손톱 크기보다도 작은 고추들이 가지마다 주렁주렁 달리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가지 가장 아래 달린 처음 난 고추는 검지손가락 길이 만큼 삐죽이 자라있을 것이다.

이런저런 기대들을 하노라면 4시간 가까이 걸리는 귀향길이 조금도 지루하지가 않다. 고향집은 평창을 지나서 고개 하나를 더 넘는다. 고개 아래 첫 집이 바로 우리집인데, 거기서부터는 행정구역상 평창이 아니고 홍천이다. 부모님은 20년 째, 그곳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고 계신다. 부모님은 가끔씩 "딱 3년만 해보겠다며 농사일을 시작했는데, 벌써 20년이나 지났다"며 세월의 무상함을 말씀하시곤 한다.

한 가지 직업에 오래 종사하다보면 그 분야에 대해서는 전문가가 되듯이, 농사를 오래 짓다보면 여러 가지 작물 중에서도 특히 자부심을 갖게 되는 '전문분야'가 생기는 것 같다.

부모님의 '전문분야'는 감자와 고추농사라고 마을에 정평이 나있다.

▲ 배추 모종 위에 앉아 있는 귀뚜라미
ⓒ 최재인
배추나 무 같은 야채농사는 조금 위험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감자에 비해 재배기간이 짧고, 비싼 값에 팔릴 때가 많다. 감자 재배량을 줄이고 야채농사를 늘릴 만도 한데, 부모님은 오빠와 내가 학교를 모두 졸업할 때까지 감자농사를 지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계약재배로 그나마 가장 안전하게 결실을 볼 수 있는 것이 감자농사라는 이유 때문이다.

하지만 지난해 여름에는 비가 오고 흐렸던 날이 많아서 감자 수확량이 좋지 못했다. 가물지 않을 정도로 비가 오고, 해가 쨍쨍 나는 날이 많아야 감자알이 굵어지는데, 지난해 같은 경우 강원도 지역에 비가 많이 와서 감자가 땅 속에서 썩어 버렸던 것이다.

마을 분들이 한미FTA 협상 체결로 인한 농산물 개방보다 '기후변화'를 더 무서워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몇 년째 계속되는 강원도 지역의 폭우와 폭염 현상을 염려하신 듯 부모님은 올해 배추농사를 곁들이셨다. 밭에 옮겨 심고 남은 배추모종판이 마당 한 켠을 차지하고 있었다.

부모님은 때마침 내린 장맛비로 엊그제 심은 배추가 뿌리를 잘 내리겠다며 좋아하셨다. 아빠는 감자는 싹이 죽은 다음부터 관리를 잘 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배추는 밭에 옮겨 심은 지 일주일 지날 때까지가 가장 중요하다고 말씀 하셨다. 그 일주일동안 부모님이 배추를 관리하기 위해 하시는 유일한 일은 농약을 치는 것도, 비료를 주는 것도 아니다. 바로 산에도 내려오는 노루를 쫓는 일이다.

▲ 마당 한 켠의 배추 모종
ⓒ 최재인
이 시기, 노루는 밭에 갓 심어 놓은 배추나 무를 뽑아먹는 농촌 최대의 적이다. 어느 정도 자란 배추는 먹지 않기 때문에 일주일에서 열흘 정도는 필사적으로 노루가 밭에 들어오는 것을 막아야 한다. 그래서 부모님은 고추밭에서 일을 하시다가도 2~3시간 간격으로 배추밭을 오가신다. 네 포기, 다섯 포기 정도 노루가 뽑아먹어 자리가 비어 있으면 남은 모종을 가져다가 옮겨 심는다.

하지만 정작 문제는 밤에 벌어지는 '노루의 공격'이다. 밤새도록 밭에서 노루만 지키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에 갖가지 방법을 모색해봤지만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집에서 키우는 개 두 마리를 밭가에 묶어 놓을까, 자동차를 세워두고 밤새 시동을 켜 놓을까. 결국 허수아비를 여기저기 세워 두기로 했다. 마음을 놓지 못한 아빠는 "이깟 허재비가 무서워서 노루가 안올까"하시며, 잠을 설쳐가며 새벽에도 몇 번씩 배추밭을 순찰하셨다.

어느 지역에서는 호랑이 울음소리를 녹음해서 밭에 틀어두기도 하고, 공포탄을 쏘아대기도 한단다. 냄새나는 약을 밭에 뿌리기도 하고, 조명을 설치해 두기도 한다지만 정작 '어느 방법이 가장 효과있더라'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다음 날이면 어김없이 노루가 배를 채우기 위해 다녀간 흔적이 남아있다.

산에 사는 그 많은 노루를 모두 포획할 게 아니라면 노루를 막을 수 있는 뾰족한 수는 없는 것 같다. 배추가 뽑힌 자리를 새 모종으로 재빨리 메우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 부모님은 반갑지 않은 손님, 노루가 다녀간 자리를 찾아 헤매신다.

#노루#배추#감사#배추모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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