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형 선생. 아마도 우리나라의 역사, 문학, 사회운동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분들이라면 성함을 한번쯤은 들어봤을 것입니다. 인터뷰하기 전 선생을 생각해보니 백발성성한 노 시인이 집회 현장에서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자작시를 낭송하던 모습이 제일 먼저 떠올랐습니다.
또 근현대사를 전공한 사람은 여운형 선생에 대한 전문가로도 알고 있고, 여운형 전기의 저자라고 떠올릴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여운형 선생 비서 출신이라고 하던데, 선생께 직접 여쭤보니 "비서는 아니었다"고 하며 "젊은 시절부터 선생님을 민족의 지도자로 모시고 따라다닌 제자였다"며 웃으시네요.
선생께선 올해로 91세의 고령임에도 "갈수록 청년이 되고 있다"고 좋아 하십니다. 정말로 그 목소리와 기상, 그 날카로운 시대인식과 열정에서 청년의 모습을 연상케 합니다. 아니 사실 전 주눅이 들고 말았죠. "역사와 민족 앞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 "민중을 위한 참다운 지도자를 찾아 헤매본 적이 있느냐"는 말씀에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인터뷰를 마치곤 옷깃을 여미고 제 삶의 자세를 점검해야 했을 정도입니다.
선생의 꿈과 희망은 꿈에도 통일, 통일입니다. 선생님은 이산가족이기도 합니다. 이북에 아직 한 번도 보지 못한 아들이 있고, 그 손자·손녀들이 너무도 그립다고 하십니다. 다행히 딸은 남북교류 중에 2번 만나셨다고 합니다.
91세. 1917년생. 곡절 많은 한국의 100년을 온몸으로 겪으면서 살아오셨습니다. 이 선생은 "친일·친미 반민족의 역사가 반민중의 역사가 됐다"며 "지금도 그것이 가장 가슴 아픈 일"이라고 하십니다. 그걸 온 몸으로, 온 눈으로 보아왔다고.
"그러나 돌이켜 보건데 최근의 역사는 벅찰 정도로 바른 길로 가고 있다", "민주주의와 인권은 기본이고, 평화와 통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 확 느껴진다"고 높이 평가하십니다. 나아가 "지금과 같은 속도라면, 10년이면 통일 될 것 같다. 조국통일 되기 전까지는 죽지 않기로 맹세했다"며 "그 맹세를 지킬 수 있을 것 같다"고 좋아하셨습니다.
다음은 선생님과의 일문일답을 요약한 것입니다.
- 선생님은 지금도 '투사'로서의 삶을 살고 계십니다. 무엇이 가장 문제라고 판단하세요?
"무엇보다도 친일·친미 수구세력이 청산되지 않고 지금도 판치는 것이 문제죠. 이승만 정권이 이를 전혀 청산하지 않아서 지금까지 외세추종세력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에요. 그런데 이들의 뿌리인 친일반민족세력이 어떤 이들이냐, 일제의 회유로 또는 자발적으로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한 무리들로 가장 기회주의적인 자들이었어요. 정신적으로도 미성숙한 사람들이었고요. 정신이 약간만 깨어있다면 어떻게 민족을 팔아먹는 짓을 할 수 있겠어요. 이럴 수는 없지요.
이들이 8·15 이후에 죽기는커녕 살아났어요. 특히 경찰과 군대를 친일파들이 장악한 것이 비극이죠. 정일권, 박정희, 이익흥(일제하 경찰서장으로 이승만 정권에서 초대 내무부장관을 지낸 이) 등이 그들이죠. 그런 그들이 5·16 쿠데타로 본격적으로 정권을 잡아서 더 발호하고 득세한 것이죠. 이들의 특기가 독립투사 때려잡기인데, 그 중에서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투사가 더 많았으니 이들의 주특기는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투사를 때려잡는 것이었고요, 해방 후에는 자연스럽게, 독재에 반대하는 사람들 모두를 '빨갱이'로 몰아 때려잡는 짓을 한 것이죠."
- 사회주의를 탄압한 것도 일본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면서요.
"그렇죠. 단순하게 독립운동 하는 것도 용서가 안 되는데, 사회주의까지 한다니까 더 문제가 된 것이죠. 원래 일제는 공산당을 지극히 싫어했어요. 왜냐하면, 일본의 공산당이 천황제를 인정하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일본 제국주의·국수주의자들이 일본 내에서 사회주의자를 탄압했는데, 그 수법을 친일파들이 일제 때랑 해방 후에 그대로 배운 것이죠. 원래 사회주의자를 '빨갱이'니, '적색분자'니, '폭도'니 하고 부르는 것 자체가 일본 경찰이 한국의 독립투사들을 탄압하던 용어에서 시작한 것입니다. 그걸 배워 독립투사나 반독재인사를 '빨갱이'로 몰아 죽였던 것이죠. 친일 군·경들이 해방 후에 독립투사들의 주도한 건국준비위원회, 인민공화국, 근로인민당 등을 모두 짓밟아 버렸고, 또 사회주의자가 아닌 사람마저도 '빨갱이'로 몰아 엄청나게 죽여 버린 거예요."
- <여운형 평전>을 쓴 것으로 유명하신데요. 여운형 선생과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하신 거죠?
"내가 먼저 여운형 선생을 찾아간 것인데요. 왜 찾아갔느냐? 그 악독한 일제하에서 우리 민족을 해방시킬 조선의 혁명 지도자가 누구일까를 찾아다니다 그렇게 된 것이에요. 고향 친구가 자기 선생을 소개해주어요. 그래서 만난 사람이 문석준 선생이신데요. 당시 저명한 사회주의 지향의 교사이자 역사가였는데, 이분은 조선역사를 처음으로 맑스주의 입장으로 쓴 사람이에요. 이분의 글이 분단 후 이북에서 초기에 교재로도 쓰였지요. 그렇게 문 선생을 찾아 뵀더니 여운형 선생을 추천해주셨어요. 그 다음날로 바로 여운형 선생을 찾아가 뵙게 된 것입니다. 그때가 1938년, 제 나이 22살 때입니다."
- 만나서 어떻게 되셨나요?
"만나자마자 여운형 선생께서 조선독립을 역설하시데요. 감명을 받았죠. 그 때 저는 서울에서 또 만해 한용운 선생도 만났어요. 3·1선언문을 기초하셨던. 당시에 이미 '님의 침묵'이라는 시를 읽어 알고 있었어요. 그때 또 이광수를 만나서 '내선일체론'에 대해서 따지고 싸우기도 했어요. 그렇게 일제의 탄압이 최고조일 때 여운형 선생과 한용운 선생을 만난 것이 제게 많은 영향을 주었어요.
돌이켜보면, 12살 때 제 고향인 함경남도 함주에서 야학 선생님께서, '우리는 농사를 지어 알맹이는 일본 놈들에게 바치고 우리는 쭉정이만 먹는다'로 가르쳐 주셨던 것이 반일 의식의 시작이었던 것 같아요. 그렇게 38년부터 크게는 아니지만, 여운형 선생을 따르면서 반일운동을 하면서 결국 해방을 맞이했지요. 지하협동단 사건이라는 반일 조직 사건의 배후이기도 했고요."
"조선, 동아 친일·친독재 했기 때문에 박근혜 지지"
- 최근 < KBS >에서 '서울 1945년'이라는 드라마에 여운형 선생이 제대로 조명됐었는데요.
"아마도 '중도좌파' 세력에 대해서 나름대로 긍정적으로 그린 최초의 드라마겠죠. 아쉽지만, 역사를 제대로 해석한 드라마가 나와서 참 반가왔어요. 그때 작가 선생도 만나고 그랬어요. 해방 후 여운형 선생을 비롯한 중도좌파들은 조국의 완전한 자주 독립을 위해, 분단을 막기 위해, 또 인민들의 삶의 향상을 위해 무진 애를 썼어요. 그런데 드라마에서 나오는 것처럼 온갖 친일 군·경들에게 탄압당하고 암살당하고…. 결국 여운형 선생도 죽고, 김구 선생도 죽고 그러면서 분단과 외세의 지배를 못 막아내게 된 것이죠."
- 1917년생이니까, 박정희와 동갑이신가요?
"그렇죠. 제가 4월생이고, 박정희가 9월생입니다. 똑같은 해에 태어났지만, 달라도 너무 다르지요. 박정희는 친일장교 출신으로 혈서로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한 자입니다. 그런데, 그의 딸이 대통령을 꿈꾼다고 돌아다니니 정말 기가 막힌 일이지요. 머리를 삭발하고 석 달 열흘을 석고대죄해도 용서를 받을까 말까하는 일인데요. 또 박근혜는 사실상 퍼스트레이디로 권력에 깊숙이 참여한 사람입니다. 그에게 물어봐야 해요. 이명박이도 그걸 물어야죠. 그때 영부인 할 때, 1975년 4월 인혁당 사람들에게 사형을 확정하고 바로 집행할 때, 그걸 말려본 적이 있는지 물어봐야 합니다. 그걸 말리지도 않았다면 박근혜의 죄는 정말 막급한 것이죠.
또 '네 아비가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대통령을 한 사람인데, 넌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야 해요. 사람들이 자꾸 박정희가 경제를 잘 했다고 하는데, 그게 어떻게 박정희가 한 것입니까. 뼈 빠지게 일한 이남의 노동 대중들이 한 것이죠. 그리고 그 높은 국민적 열의와 노동대중들의 헌신이라면 누가 대통령했어도 그 정도는 할 수 있었지요. 박정희는 이름마저도 스스로 일본 말로 바꾼 사람인데요, 얼마나 친일파였으면 자신의 영구집권 헌법까지 일본 말인 '유신(維新)'이라고 했겠어요."
- 그런데, 박근혜씨가 제대로 반성을 안 하는 것 같습니다.
"그게 기가 막힌 노릇이죠. 언론들이 아주 못된 놈들이죠. 그 놈들이 실제로 친일을 했고, 친독재를 했으니 박근혜를 계속 띄워주는 것입니다. <조선일보>, <동아일보>가 얼마나 친일과 친독재를 극렬하게 했습니까. 친일 반민족행위자이고 수없이 많은 국민을 죽인 독재자의 딸이 대통령 후보라고 언론에 나온다는 일은 세계적인 수치입니다. 어디에서 이런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생각 만해도 너무 징그러운 일입니다. 정의가 있고, 민족의 정기가 있는 나라에서 이게 가능한 일이냐는 거죠.
그러나 저는 이번 대선에서 우리 국민들이 현명하게 선택하고, 심판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렇게 한나라당이 판을 친다는 데도 지난 4·25 선거에 국민들이 한나라당을 찍지 않았으니까요. 분단 60년의 고통이 친일 군경, 친일 언론들에 의해서 지금까지 계속 되고 있는 형국인데요, 우리 국민들이 계속 분단을 원하겠습니까, 아니면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통일된 나라를 원하겠습니까. 친일·친미 외세 추종을 원하겠습니까, 아니면 완전한 자주 독립을 원하겠습니까. 이건 뻔하거든요. 그러니까 조선일보와 같은 거품과 독극물이 그렇게 난리를 쳐도 우리 국민들이 넘어가지 않는 것입니다. 저는 이번 대선에서도 결국 국민들이 완전한 자주 독립과 통일을 일궈나가야 할 시대적 과제를 해결할 사람들을 선택할 것이라 믿습니다."
- 일각에서는 한나라당이 집권하면 수천·수만 명이 감옥에 갈 것이라는 우려도 합니다만.
"그들이 집권할 일도 없겠지만, 한나라당이 집권하면 국가보안법 등으로 수천 명을 감옥에 보낸다는 이야기인데, 그건 말이 안 됩니다. 진보·애국 세력들도 정적들을 죽일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잘못했어도 뉘우치면 용서하고 원수관계를 청산하고 화해할 생각을 해야지요. 정치보복은 절대 안 됩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에서도 그런 일은 거의 없었잖아요. 그런데 한나라당이 해방 후에 극우파들이나 친일 경찰들의 테러처럼 정치보복을 한다는 것은 시대를 완전히 역행하는 것이죠. 몽양 선생이 적대적인 사람까지 함께 하려 했던 것이 바로 '좌우합작' 정신입니다. 조그만 지성과 양심이 있다면 정치적 보복은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특히 진보·애국 세력은 그런 양식과 의식이 있다고 생각해요. 즉, 진보·애국 세력도 어떤 경우라도 정치보복 같은 것은 결코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 선생님 소원은 '통일'이라고 들었습니다.
"통일이야 말로 한반도 사회의 자주독립의 완성입니다. 이렇게 분단돼 있는 것은 너무나 가혹한 일이고, 남북 양쪽에게 너무 큰 시련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니 통일을 바랄 수밖에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두고 온 이북의 자녀들도 너무나 그립지만, 우리 민족이 살길이 통일이니 통일을 너무나 간절히 염원하고 있지요. 저는 맹세했어요. '조국이 통일되기 전까지는 죽지도 않겠다.'고…. 그래서 제가 91세인데도, 이렇게 건강한 것입니다. 저 안 죽을 거에요. 통일 될 때까지는. 요즘 오히려 더 힘이 납니다.
45년 8.15 해방을 여운형 선생 같은 선각자가 아니었으면 언제 올지 몰랐던 것처럼 남북의 통일도 그렇게 갑자기 올 수 있습니다. 외교의 천재 이북이 북-미 관계를 잘 풀고, 미국에 민주당 정권이 들어서고,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비서과 2차 남북정상회담을 하고…. 이런 정세들이 이어지면 의외로 통일이 금방 올 수도 있다는 것이죠. 역사적 통찰로 지금의 국면을 보면, 남북은 상당히 통일에 근접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전에 상상할 수도 없는 엄청난 진전이 이뤄진 것입니다. 이런 기세로 통일로 일사천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제 판단으론 향후 10년 안에 통일의 결정적 국면이 올 것이라 생각합니다."
- 이번 대선이 변수가 될까봐 걱정입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전 이번 대선에서 한나라당이 안 될 거라고 봐요. 우리 민족이 나아갈 바를 전혀 제시하지 못하고 친일·친미 수구냉전세력 역할을 하고 있는데, 이래서는 국민의 선택을 못 받지요. 미국의 오판을 막아내는 이북의 외교 전술이나 선군 역량도 대단하지만, 이남의 민주 역량도 정말 대단하거든요. 그렇게 극심한 반공·반인성교육에 시달리면서도, 지금만큼의 민주주의와 인권, 남북화해와 협력을 만들어낸 게 우리 민주 역량이고 국민 의식이거든요. 이게 아주 공고합니다. 그렇게 쉽게 반민족·반민주 세력이 정권을 잡을 수 없습니다."
- 선생님은 민족 투사이시면서 시인이신데요.
"그렇죠, 전 기본적으로 시인입니다. 어렸을 때 한용운 선생의 '님의 침묵' 시를 읽고 큰 감명을 받아서 시인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전 그 시를 읽자마자 '님'이 '조국'이라는 것을 알았었던 기억이 나요. 지금까지 어떤 행사나 뜻 깊은 날을 기념해서 쓴 '행사시'만 180여개가 됩니다. 제가 시를 좀 늦게 쓰기 시작했는데, 80년대 중반부터 쓴 행사시만 벌써 시집으로 5권 분량인 것이죠. 88년에는 빨치산을 기리는 시집 '지리산'을 썼다가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도 살았어요. 지금도 끊임없이 시를 쓰고 있습니다. 최근에도 정신대대책협의회(정대협)의 수요 집회 때 발표한 시도 썼고, 고 이한열 열사 20주기 추모식 때 발표할 시도 썼어요. 앞으로도 계속 틈만 나면 시를 쓸 생각입니다."
- 요즘 생활은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어쩌면 요즘이 가장 행복합니다. '분지'의 작가 남정현 선생과 교류하는 것도 좋고. 아들과 며느리와 함께 살고 있는데, 손녀가 둘 있어요. 8살, 6살인데요, 손녀들 아침에 학교와 유치원에 데려다 주고, 또 오후에 데리고 오고…. 그게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어요. 손녀들도 할아버지를 아주 좋아합니다. 그렇게 지내면서, 어떤 집회나 행사 같은 것 있으면 틈나는 대로 참여하고, 시도 짓고, 낭송도 하고. 건강도 좋을 뿐만 아니라 시심도 막 솟아올라 시가 가장 잘 써지고 있습니다. 아들과 며느리가 제 활동에 대해서 이해도 잘 해주고, 또 용돈도 좀 주고 해서 경제적으로도 예전보다 나아지고…. 암튼 아주 행복하게 지내고 있지요."
- 이북에 두고 온 식구들도 있다고 들었는데, 가족들이 어떻게 되세요.
"제가 이남에 오기 전에 이북에서 결혼을 했었어요. 그래서 45년도에 아들을 낳았고, 47년도에 딸을 낳았죠. 그런데 전쟁 통에 이남에 오는 바람에 이산가족이 되고 말았어요. 이북에 있는 아들은 63세, 딸은 61세가 됐어요. 남북 교류 와중에 이북에 가서 딸은 두 번 만났는데, 아직 아들은 못 만났어요. 손자·손녀들이 여럿 있다는데, 아직 못 봤고요. 어서 통일 되서 아들도 손자·손녀들도 보고 싶어요. 이남에선 쭉 혼자 있다가 1960년에 지금의 아내를 만났어요. 그렇게 결혼한 아내(방현주 선생, 84세)와의 사이에 아들이 하나 있어요. 아들이 공부 잘해서 지금은 한양대 교수로 일하고 있습니다. 모두 고마운 일이지요."
- 선생님 오래 오래 건강하셔서 꼭 가족들도 만나고, 통일도 어서 봤으면 해요.
"그럴 거에요. 다시 말하지만, 전 조국이 통일되기 전에는 죽지도 않을 거라고 맹세했으니까요. 그래서 제가 지금 마치 40대처럼 건강합니다. 청년들이 부럽지 않아요."
| | 이기형 시인은... | | | | 이기형 선생은 1917년 4월 함경남도 함주에서 태어나 12세 때 야학을 통해 반일 독립운동에 눈을 떴습니다. 함흥고보를 졸업하고 일본대학 예술부 창작과를 다니다 귀국하여 ‘지하 협동단 사건’ ‘학병 거부사건’의 배후로 활동하며 반일운동에 참여했고요.
이 선생은 이후 카프 작가 한설야의 소개로 상경하여 1938년 약관 22세에 마르크스주의 사학자인 문석준과 교유하였으며, 또 그의 소개로 몽양 여운형을 만나 배우고, 그것이 인연이 돼 이기영·임화·박세영 등 카프 출신 문인과 이태준·안회남·지하련 등 훗날의 월북 문인들과도 친하게 지냈다고 하시네요.
이 선생은 1944년 여름 몽양 여운형의 주선으로 그의 육촌 여동생과 결혼했습니다. 몽양이 주례를 서고 카프 비평가 임화와 국문학자 김태준이 축사를 했다고 합니다. 선생님이 존경하는 몽양의 여동생과 결혼하고, 몽양이 직접 주례를 섰으니 얼마나 감격하셨을까 생각해봅니다. 그러나 선생의 첫 번째 결혼은, 분단과 전쟁으로 ‘이산가족의 한’으로 이어지고야 맙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 한은 처절하게 계속 되고 있고요.
선생은 47년, 선생이 그렇게 따르던 여운형이 암살당한 후 월북하였다가 전쟁 통에 종군 기자 비슷한 일로 이남에 내려왔다가 다시 이북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되셨다고 합니다. 그 후 이남에서 ‘조용히’ 지내시다가 80년대 초 시인 김규동, 작가 남정현 등과 교류하면서 <창작과비평> 사람들을 만났고, ‘여운형 평전’을 쓰면서 민족문학 진영의 원로로 사람들의 주목을 끌게 됩니다.
선생님의 시집으로는 첫 시집 ‘망향’(1982) ‘산하단심(山河丹心)’(2001), ‘봄은 왜 오지 않는가’(2003) 등이 있는데, 일관된 관심사는 ‘분단과 외세 극복, 그리고 통일’이었습니다. 역시 빨치산의 조국 사랑을 그린 시집 ‘지리산’(1988)으로는 국가보안법으로 출판인인 정동익 선생과 함께 구속되는 고초를 겪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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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한열 추모시 | | | |
"아침 태양이 솟듯이"
- 이한열 열사 20주기에 -
한열아!
엄마다
귀염둥이 재주꾼 내새끼 네가 부활한 지도 어언 20년이구나
인지와 과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한번 간 목숨을 되돌릴 수는 없는 법
엄마는 오늘도 그저 허공을 바라 네 모습을 그려보며 가슴이 메어질 뿐
천심은 무심해도 인심은 무심치 않아
오늘 아침도 네 모교 네 동상 앞에는
많은 벗들이 꽃다발을 놓고 갔구나
네 이름을 붙인 도서관에도 찾는 발길이 멈추질 않았다
1987년 7월 9일!
한열이 우리 곁을 마지막 떠나던 그날
백만 조문객이, 아니 격노한 민주화 물결 산맥이
연세대 교정에서 시청 앞 광장까지 울부짖는 파도더미마냥 꽉 메워
서울 장안은 온통 민주화와 통일의 피맺힌 함성절규 물결로 흔들렸습니다
문익환 목사의 ‘전태일 열사여! 박종철 열사여! 이한열 열사여!’ 분신 타살 열사들의 호명시 낭송은 절창이었지
이어, 비감 장중한 만가에 맞춰
이애주 교수의 길놀이 진혼굿 춤은
만인의 가슴을 후벼 파고도 남았습니다
이렇게, 이한열의 이름과 더불어
불멸의 유월항쟁 불길은 타올랐느니
군사독재정권은 물러갔건만
친일잔재 수구배들 때문에
미군은 남아있고 국가보안법은 존속된 채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분단 62년이라니?!
대명천지 민주주의 대낮에
이게 어디 말이나 될 법합니까
친일 친미 수구배들은
골수 친일 적자(赤子) 박정희군사독재를 추켜세우며
미군영구주둔과 국가보안법 존속을 떠벌입니다
저들은 멀리는 을사오적의 후예요
가깝게는 친일 배신자들의 후손입니다
무엄하게도 차기 대권마저 넘봅니다
하지만, 우리 유권자들은 현명합니다
분단 62년간 외세의존 반역사 통치는
인성을 파괴했고 통일을 가로막았음을 늦게나마 알아차렸습니다
선과 악, 정의와 불의가 어느 쪽인가를 가려낼 능력도 가졌습니다
부시는 우리 북쪽을 폭군, 악의 축, 폭정 전초기지라 매도하며
목조여 죽일려고 발광했건만
북은 자주 선군 천재외교로 상승 약진
부시의 콧대를 꺾어놓았습니다
부시는 결국 대북 굴복을 했습니다.
이는 새 사회주의의 고개 듦이요
낡은 자본주의의 고개 숙임입니다
21세기 화두가 됐습니다
미국 자본주의 말기 썩은 문화가
안방 구석구석까지 파고들었고
겉옷 속옷을 다 내어주고도
굽신굽신 나체춤 추는 남쪽과
얼마나 대조적인가요
을지문덕 남이장군의 기개는 어디로 갔나?
을사늑약 경술국치의 망국한이 스쳐
21세기 정다산도 황매천도 없는가
반일 독립 우렁찬 그 목소리 다시 듣고 싶어
정녕, 이 나라엔 정치가도 애국자도 없단 말인가
허나, 우리 일반 서민대중은
자주적이요 애국적이요 헌신적입니다
오는 대선에선 구국의 기치를 높이 들고
이순신장군 후손만 골라 표를 찍을 것입니다
62년간 외세, 악법, 수구배로 역사가 뒷걸음쳤지만
저들의 운명은 일낙서산 벼랑끝입니다
이한열 열사여!
열사가 그렇게도 열망해 마지않던 민주세상 통일세상은
우리들의 가열찬 싸움으로
아침 태양마냥 솟고야 말 것입니다
은하수 여울목 푸른 동산 꽃밭에서
저희들에게 내내 날으는 천리마 힘을 주시옵소서. (2007년 6월 9일. 추모제에서 직접 낭송) | | | | |
덧붙이는 글 | 안진걸 기자는 희망제작소 사회창안팀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이 인터뷰는 민가협 양심수후원회 주선으로 이루어졌고, 양심수 후원회 소식지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