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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7월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 군경에 의해 처형된 대전형무소 재소자 및 민간인들.
1950년 7월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 군경에 의해 처형된 대전형무소 재소자 및 민간인들. ⓒ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1일 열린 산내 골령골 희생자 위령제 및 유해발굴을 위한 개토제에 참석한 유가족들이 흐느끼고 있다.
1일 열린 산내 골령골 희생자 위령제 및 유해발굴을 위한 개토제에 참석한 유가족들이 흐느끼고 있다. ⓒ 오마이뉴스 심규상
"나라에서 가족들 몰래 끌고 가 죽이고서 이제와서 사망경위가 불분명해 독립운동 유공자로 인정할 수 없다니요? 억울하고 분통이 터져 말이 안나옵니다…."

1일 대전 산내 골령골 집단학살 희생 위령제에서 만난 강철민씨(66·대전시 유성구)는 끝내 눈물을 떨꿨다. 감정이 복받쳐 오르는 듯 목소리마저 심하게 떨렸다.

1950년 당시 9살 코흘리개였던 강씨는 그 해 7월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 부친을 잃었다. 전쟁이 일어난 직후인 그 해 6월 30일, 경찰이 논(부여군 세도면)에서 일하고 있던 아버지를 부여경찰서로 끌고 갔다. 가족들이 아버지를 본 마지막 날이기도 했다.

함께 끌려갔다 살아 돌아온 사람들의 전언에 따르면 강씨의 부친은 대전형무소로 이송됐다. 또 그해 7월 10일 부친이 트럭에 실려 끌려가는 모습을 본 사람도 있다. 미군과 육군형무소 등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군경은 대전형무소에 수감된 사람들을 대전 산내 골령골로 끌고 가 집단학살했다.

강씨는 지난 1995년 부터 수차례에 걸쳐 국가보훈처에 부친을 독립유공자로 인정해 달라며 서훈을 신청했다. 강씨의 부친인 강일구(1910년생)는 일제 당시 충남부여 장암면 장하리에서 충남 일대 최대의 적색조직으로 주목받은 일명 '금강문인회'의 면 조직 책임자를 맡아 농민조합운동과 민중야학에 참여하다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이후에는 서울과 만주 등지에서 해방 무렵까지 독립운동을 벌였다.

실제 강씨의 부친과 함께 독립운동을 벌였던 동료들은 모두 서훈이 인정됐다.

국가보훈처 "독립운동 인정되지만 사망경위 불분명해서..."

ⓒ 오마이뉴스 심규상
하지만 국가보훈처는 강씨의 부친에 대해서는 1996년 회신을 통해 "항일운동에 참가한 것으로 생각되나 광복 이후 행적이 상훈법규에 맞지 않다"며 포상대상에서 제외했다.

강씨는 국가보훈처가 좌파 또는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를 포상하기 시작한 2005년 이후에도 수차례 서훈을 신청했지만 국가보훈처는 "사망경위 등 광복이후 행적이 불분명"하다며 포상대상에서 또 제외시켰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의 조사 의견도 받아 들여지지 않았다.

국가보훈처 관계자는 "국가유공자요건 기준 및 범위는 대한민국 국민에 한하고 있다"며 "당대의 관점에서 항일활동을 평가하지만 48년 8월 정부수립이후 실정법상 위법사실이 있거나 사망경위가 불분명한 경우는 상훈법규에 맞지 않아 포상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강씨는 "전쟁 통에 경찰이 이유없이 아버지를 끌고가 재판도 없이 죽여 놓고 이제와서 실정법 위반여부와 사망경위가 불분명하다고 주장할 수 있느냐"며 "나라가 뭐하는 짓인지 모르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일제시대 아버지와 함께 독립운동을 하던 아버지의 동료들은 이미 수 십년 전에 모두 서훈이 인정됐다"며 "명예를 회복시키지 못한 죄책감에 부모님을 뵐 낯도 없다"고 덧붙였다.

대전민간인희생자대책회의 문창기 팀장은 "각종 증언과 자료를 통해 객관적으로 산내에 끌려가 억울하게 희생된 사실이 인정되는데도 법규를 내세워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국가에 의해 자행되는 또 다른 폭력에 다름 아니다"며 "관련 법과 규정을 개정해서라도 이를 바로 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강씨의 부친의 항일운동 행적이 들어 있는 신문기사 (조선일보 1935년 4월 30일)
강씨의 부친의 항일운동 행적이 들어 있는 신문기사 (조선일보 1935년 4월 30일) ⓒ 오마이뉴스 심규상
대전 산내골령골 학살 현장은 한국전쟁 당시 군경에 의해 제주 4·3 관련자 등 대전형무소 수감 정치범과 보도연맹 관련 민간인 등 7000여명이 집단학살 후 암매장된 곳으로 실증되고 있다.

다음은 강씨와 산내 희생자 유해발굴을 위한 개토제 및 위령제 행사장에서 가진 인터뷰 요지.

- 한국전쟁당시 부친이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 학살됐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전쟁이 일어나자 경찰이 논에서 일을 하고 있던 아버지를 부여 세도경찰서로 끌고 갔다. 이후 아버지와 함께 끌려갔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온 분이 전하길 아버지가 대전형무소로 이송돼 수감됐다고 했다. 또 아버지가 트럭에 실려 끌려 가는 걸 봤다는 사람도 있다. 그 때가 음력 5월 25일(양력 7월 10일) 이다. 이후 매년 이날 제사를 지내고 있다"

"함께 독립운동한 아버지 동료들 모두 공적 인정"

- 모친은 언제 돌아가셨나
"당뇨와 홧병으로 15년 전 세상을 떴다. 아버지가 끌려가 총살돼 6남매를 혼자 키우느랴 고생만 하다 돌아가셨다. 위로 3명의 누님 중 한 분이 지병으로 세상을 떴고 아래로는 두 동생이 있다"

- 부친에 대한 기억은?
"어렸을 때라 전혀 기억이 없다. 다만 어머니로 부터 내가 갓난 애기때 아버지 등에 업혀 만주를 돌아다녔고, 가정은 돌보지 않고 매일 독립운동만 했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3년 동안 영정을 모셨는데 세도지역 유지를 비롯 마을 사람들이 우리 집에서 살다시피 했다. 그 분들이 영정 앞에서 절하는 모습이 생생하다"

- 해방 후 부친의 생활에 대해 기억나는 것이 있다면?
"해방되기 직전 부여 장하리 고향으로 내려왔다. 하지만 경찰에서 감시가 심해지자 외가댁이 있는 부여 세도면으로 이사했다. 이사했으니 망정이니 안그랬으면 아버지뿐 아니라 가족 중 상당수가 희생됐을 거라도 본다"

강철민씨
강철민씨 ⓒ 오마이뉴스 심규상
- 그 동안 생활은?
"아버지 없이 시골에서 땅 파고 살았으니 순탄했을 리 있겠나. 하지만 열심히 일해서 전답도 장만하고 한때는 땅판 돈을 밑천으로 장사도 했다. 남동생의 경우 공부를 참 잘해 한국은행에 지원했는데 연좌제에 묶여 시험도 못봤다"

"경찰이 재판도 없이 죽여놓고..."

- 부친의 독립운동 공적과 관련 독립유공자 공적심사를 신청한 적 있나
"아버지와 관련 1995년 부터 수차례에 걸쳐 국가보훈처에 공적심사를 의뢰했다. 사회주의 계열에 있던 사람들도 독립유공자 신청을 받는다고 해 다시 신청했지만 번번히 '독립운동 공적은 인정되지만 사명경위가 불분명하다'며 유공자로 인정할 수 없다고 회신해 왔다."

- 이에 대한 의견은?
"말이 안된다. 아버지와 독립운동을 함께 하셨던 동료 분들은 모두 독립유공자로 인정을 받았다. 고향에 갈때마다 어르신들이 아버지의 독립유공자 인정여부를 물어 올 때마다 도리를 다하지 못한 데 대한 죄책감에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 없다. 며칠 뒤면 아버님 기일인데 아버님 볼 낯도 없다."

- '사망경위'가 불분명하다는 국가보훈처 입장에 대해서는?
"안 맞는 얘기다. 같이 끌려가서 살아오신 분이 대전형무소에 수감됐다고 했고 정부 자료에도 산내로 끌고가 총살한 것으로 돼 있다. 경찰이 끌고가 재판도 없이 죽여 놓고 이제와서 실정법을 거론하고 사망경위가 불분명하다고 유공자로 인정을 못한다고 하니…. 억울하고 분통이 터져 말이 안나온다. 한마디로 나라가 뭐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민간인집단학살 희생자#강철민#강일구#산내골령골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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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보천리 (牛步千里).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듯 천천히, 우직하게 가려고 합니다. 말은 느리지만 취재는 빠른 충청도가 생활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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