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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빨랫줄에 걸려 있는 수건 때문에 아직 사람 사는 집처럼 보이는 권정생 선생님 댁
ⓒ 누리
구멍 난 하늘에서 피부를 뚫듯 내리쬐던 햇살이 잦아들고 습기 먹은 7월 첫날, 사소한 일상 속에서 뚝 떨어져 나온듯한 날씨를 배경으로 안동에 다녀왔다.

안동에 한 번 가자, 가자, 하던 맘을 굳힌 계기는 결국 권정생 선생님이었다. 정확히는 그분이 세상에 계시지 않기 때문이었다.

선생님이 돌아가셨다고 하여 특별히 서글프지는 않았으나, 생전에 뵐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그곳을 찾아가는 내내 들었다. 그랬다면 좀 더 슬퍼서 힘들었겠지만 그만큼 찌들은 욕심을 덜어낼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살아계실 때는 뭐랄까 내 얄팍함, 비겁함, 천박함이 감히 그분을 찾아뵐 용기를 내지 못하게 했던 것 같다. 가 뵙고 싶다는 생각조차 못했더랬다.

홀로 머금을 때는 성찰일 수도 있는 마음이 투명할 것 같은 어떤 사람과 마주할 때는 회색적인 내·외부를 가다듬고 정리하려는 생각 속에서 번민하고 합리화하고 초라해지게 마련이다. 그 속에서 그분을 마치 성자쯤으로 치부하며 도리어 어떻게든 나와는 먼 세계인양 떼어놓으려 하기 때문이다.

"저 이런 사람이고, 이래서 선생님께 왔습니다. 존경합니다. 뵙고 싶었습니다"하며 소개를 한다고 치자, 그게 무슨 의미가 있으며 그 소개하는 낯이 얼마나 부끄러울까.

초라함과 마주할 때 마음은 보다 각박하고 옹색해진다. 그래서 돌아가셨을 때에야 안동으로 갈 수 있었다.

돈을 아끼느라고 우리는 전날 안동 시내 허름한 여관에서 잠을 청했다. 셋이 함께였는데도 불안하여 난 쉬이 잠들지 못했다. 여관은 '험한 일'이 냉정하게 벌어지는 곳이라는 세상적인 이미지가 내게 박혀 있다. 무서웠다.

여러 번 잠긴 문을 확인하고, 양쪽에 사람이 있음에도 예민해져 밖에서 들리는 취객들의 소리, 사람들 문 여닫는 소리 하나하나에 신경이 곤두섰다.

거의 닫아 놓은 꽉 막힌 여관 창문 틈으로 빼꼼히 빛이 들어오고 이제, 비도 그친 것 같다.

여관 가까이에 있는 성당에서 아침 미사를 드리고, 그 근처에서 배를 채웠다. 화분을 정성스레 가꾸시는 할머니가 차려주시는 식당에서 집에서 먹는 것 같은 진짜 밥이었다.

▲ 권정생 선생님 댁 앞에 흐르는 냇가. 물이 불어 콸콸 소리가 집 주위를 진하게 맴돈다.
ⓒ 누리

바로 앞에 불어난 시내가 가로막혀 발길을 멈추었는데 집을 찾지 못하다가 왼편에 수풀과 바위에 가려져 있는 선생님 사시던 집을 찾았다. 가는 비가 숨죽여 내리고 있었다.

전날 불안했던 마음의 실체가 새벽에 쏟아진 비 덕분에 한층 콸콸 흐르는 소리가 선명하게 감싸는 자그마한 그 집에서 뚜렷하게 떠올랐다. 욕심이었다.

터질 듯 삐뚤어진 욕심을 채우려는 공간에서 불안하여 불면했고, 이 탈탈 턴 듯 외로움이 깃들어 있는 집 주위를 거닐면서 마음이 편안해졌다.

사진과 향이 놓여 있는 방문 앞에서 우리 셋은 말없이 절을 드렸다. 그러면서 선생님 바람처럼 다음 생에서는 건강한 몸으로 태어나셔서 스물 몇 살에 진한 사랑을 하시라고 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선생님이 사셨던 곳이라며 이곳을 다시 일부러 찾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 인사를 드릴 수 있게 만들어 놓았다.
ⓒ 누리

마을을 돌아 걸어나오면서 보이는 풍경은 여러 번 살던 터전에서 쫓겨나 서럽게 세운 빈궁한 벽과 슬레이트 지붕이 많았던 대추리와는 달리 안정되고 아름다워서 괜스레 서러웠다.

그러면서 지난 여름 황새울을 걷던 마음이 권정생 선생님 이야기 속에 나왔던 누구네 아버지, 누구네 강아지, 어떤 바람, 어느 물결을 맑게 담은 정취와 섞이는 걸 느꼈다.

그렇게 마을을 거니는 발걸음 속은 살았던 날들과 살고 있는 지금과 섞여서 오늘 이 한 걸음을 이루었다.

마을은 고요했다. 예배당에 갈 시간이었다. 선생님도 이 시간에는 예배당에 계셨을지도 모르는구나.

살아계셨을 때 왔어도 비어 있었을 집에 누구와 누가 잠시 다녀간다고 쪽지 한줄 써놓고 온 듯 생생하다.

마을을 떠나 봉정사로 향했다. 사람 흔적 없이 빗소리까지 먹은 듯 고찰은 발소리조차 부담스레 고요했다.

옆 암자에 잠시 흩어져 앉아서 새소리를 들었다. 우리 셋과 암자와 자연과 외로움뿐이었다. 이런 곳에서 마음을 비우고 살면 많은 책도 필요 없고, 맛있는 음식이나 많은 배움도 필요 없이 행복할 것 같은 깨달음이 서둘러 왔다. 결국 사람이 불행한 이유는 욕심 때문일 테니까. 한 개가 없으면 아무것도 없이 살 수 있지만, 두 개가 있으면 세 개를 갖고 싶을 테니까.

▲ 봉정사 부속 암자 영산암에서 마음을 쉬고 있다.
ⓒ 누리

봉정사에서 내려와 식사를 했다. 여행 막바지다.

오전 미사 때 알게 된 부제 서품식에 구경을 갔다. 안동에서도 자주 있는 일이 아니라 했다. 시간에 겨우 맞춰 갔는데, 자리가 없다. 맨 뒤에 서서 한 사람이 서약하는 걸 보았다. 한 젊은이가 하느님과 사람에게 종신토록 독신으로 봉사하기를 서약하며 엎드리는 순간 아, 소리가 나왔다.

그 젊은이는 서약하겠습니다, 하는 단백한 목소리로 고백과 다짐을 끝내고 앞서 그 의식을 끝낸 여러 사제들과 가족들, 친구들과 인사를 하고 난 후 주교님 옆으로 자리를 옮겨 사람들 앞에 섰다.

아마 그 젊은이는 사람들이 성직자에게 요구하는 여러 기대들과 인간적인 고뇌 사이에서 외롭게 싸워야 할 것이다. 아직 식을 많이 남았으나 차 시간을 핑계로 더는 그 모습을 보지 않을 수 있었다.

여행은 끝났고 올라오는 차 안에서도 잠은 쉬이 오지 않았다. 집에 돌아와 안동 곳곳에서 따온 봉숭아를 빻아 손톱에 물을 들였다.

작년 대추리에서 들였던 봉숭아를 생각하며, 이 물이 빠질 때까지는 이 여행에서 느꼈던 여러 사람들의 외로움을 느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 속에서 내 외로움도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태그:#권정생, #안동, #사제, #봉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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