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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뚱땅뚱땅. 우르르. 쿵쾅!"
사무실 옆이 꽤 시끄러웠다. 우중충한 날씨에 들려오는 소음은 슬슬 짜증 지수를 높여준다. 점심시간에 나가보니 바로 옆 건물이 공사 중이다. 4층짜리 대형 횟집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장사가 잘 안 되는 눈치를 받긴 했었다.
조금 고치는 것인가 했더니 그게 아니다. 건물 뼈대만 남기고 가게를 통째로 들어내고 있었다. 전문용어로 리모델링이던가. 그리고 공사현장 한쪽, 누군가 줄담배를 피워 물고 있다. 흐린 날씨만큼 회한이 서린 눈길이다. 바로 횟집 사장이었다.
지켜보던 옆 가게 사람들이 한 마디씩 위로를 건넨다. "경기가 워낙 안 좋으니 그런 거다", "요즘 판공비가 워낙 줄어 식당들이 먹고 살기 힘들다", "다른 업종으로 바꾸면 뭘 해도 잘 될 자리다" 등등. 글쎄… 안됐다는 생각은 들지만, 솔직히 공감하긴 어려웠다.
맛 없어도 차려놓기만 하면 손님은 온다? 천만에!
철가방(중국집 배달원), 횟집 '아라이'(접시 닦기의 일본식 표현), 갈비집 '장치'(숯불 피우는 사람을 이르는 은어). 가정형편상 고교 진학을 미루고 사회에 뛰어들었던 동네 친구들이 택했던 직업들이다.
일이 고되 피차 저임이긴 마찬가지인 지하공장으로 발길을 돌린 친구도 있고, 그 길에 남아 어느 누구에게도 부끄럽지 않게 전문성을 인정받은 친구들도 있다. 어쨌든 입맛에 있어선 나름대로 '선수'들이 됐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친구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있다. 요식업을 하는 이들 중 '남 탓하는 사람치고 잘 된 경우를 못 봤다는 것'이다.
"난 식당이나 술집 등을 차려만 놓으면, 사람들이 알아서 찾아 와야 한다고 믿는 그 배짱들이 우스워. 도대체 뭘 믿고 그런 건지…. 가게 위치? 그런 거 상관없어. 맛만 있어봐. 제발 오지 말라고 빌어도 찾게 돼 있어."(횟집 주방장인 친구)
"그 말도 맞고, 아무리 맛있어도 친절하지 않으면 거긴 끝이야. 가게 평수 믿거나 인테리어 좀 했다고 손님 돈으로 보는 사람들은 언젠가는 망해. 음식을 파는 게 아니라 마음을 팔아야지. 왜 기본 마인드들이 없을까?"(대형 갈비집 지배인 출신 친구)
친구들과 한 잔을 건네면 대개 이런 이야기들이 오고 간다. 그들의 기준으로 보자면 사무실 옆 대형 횟집의 몰락은 예견된 것이었다. 비싼 가격, 그리 친절하지 않은 서비스, 결정적으로 '본전 생각나게 하는 맛' 등.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는 언제나 비슷하다. "메뉴판 뒤적거리지 않고 편하게 엉덩이 붙일 대폿집 어디 없느냐"는 것이다.
끝없는 기본안주, 배고픈 청춘이여 오라!
퇴근시간, 잔을 잡으면 쓰러질 때까지 놓지 않긴 마찬가지인 최육상 시민기자가 '한 잔'이 당기나보다. 저녁 노을을 바라보며 쩝쩝 입맛을 다시고 있다. "한 잔 OK?" 긍정도 부정도 안 하고 비실비실 웃는다. 쯔쯔… 이건 '후천성 알코올 결핍증후군' 맞다.
어디로 간다…. 술과 배를 동시에 채워 줄 그런 집, 너무 많다. 그런데 딱히 갈 곳이 없다. 문득 얼마 전 누군가 이야기 해준 가게 명이 떠오른다. 제법 괜찮단다. 이름이 'PD수산'이라던가. 최 기자의 표정이 묘해진다.
"PD? 민중민주?"
"아… 그 운동권 출신 아니랄까봐."
'한 깃발' 날린 이답게 바로 정치적(?) 해석을 내려버린다. 아무튼 출발. 지하철 대림역에서 하차하란다. 그럼 구로동, 이런 여긴 내 구역인데 그동안 몰랐다니.
너무나 평범한 동네 골목. 몇 명 앉지 못할 조그만 테이블. 이거 여기가 맞나? 게다가 가게명은 '수산'인데, 메뉴는 김치찜, 제육볶음 등이 뒤섞여 있다. 가격은 1~2만원 사이. 우리는 주꾸미 삼겹으로 낙찰. 어쨌든 가게는 젊은이들로 북적북적하다.
우선 깍두기와 푹 익은 어묵 몇 점이 기본안주. 그러려니 했다. 이어 통조림 옥수수에 맛살과 햄이 섞여 나온다. 또 잠시 후 옛날 소시지와 감자전 등이 추가. 최 기자 왈 "음, 좋아 좋아" 일단 한 잔 쨍!
다시 해물전이 도착. 한 점 먹어보니 안에 들은 오징어가 생물인 듯 짭짤하다. "괜찮은 걸"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막 깨뜨린 달걀이 철판 위에서 지글거리며 다가온다. 이거 기본안주 맞아?
한 잔 두 잔, 속도가 빨라진다. 다시 추가 된 기본 안주, 맑은 해물 라면이다. 면은 쫄깃하고 국물은 은은하다. 슬슬 배가 불러온다. 순간 뚝배기에서 지글거리는 계란찜 등장. 으악, 메인안주는 어쩌라구!
PD수산? 예전 같으면 잡혀갔지
이어진 싱싱한 메인안주. 술에 취한 건지 음식에 취한 건지 둘 다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잠시 후 정신을 가다듬어보니 주인남자가 가게 밖 의자에서 뭉근한 담배연기를 피워 올리고 있다. 40대 중반쯤 됐을까.
문득 오래 전의 포장마차가 생각났다. 안주 없이 소주 반 병을 시켜도 결코 박하게 굴지 않고 따끈한 국물과 야채 등을 곁들여주던. 안주보다는 가게에 술이 떨어질까를 고민하던 시절의 흑백 초상화. 그리고 그 곳을 지키는…. 그때 문득 최 기자가 질문을 던진다.
"사장님, 가게 이름의 PD가 무슨 뜻이지요?"
빙긋 웃는 사장님. 백 번 정도 오면 알려준단다. 그래도 궁금한지 재차 묻는 최 기자.
"People Democracy 맞지요?"
"글쎄요…. 하하."
이런, 최 기자는 그렇게 믿고 싶단다. 왠지 느낌이 그렇단다. 그래 맞는지도 모른다. 꿈을 가졌던 386세대. 그가 선택한 밥벌이의 방식은 꿈에 부푼 그러나 배고픈 후배들의 배를 채워주는…. 아니 어쩌면 아닐지도 모른다. 그저 우연히 나이대가 맞아 떨어졌을 뿐, 그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살아온 이의 가게에서 떠올리는 망연한 상상일지도.
하긴 거리를 내닫던 투사가 아니면 또 어떨까. 맛나고 풍성한 음식으로 삶에 지친 이들을 위로해 줄 수 있다면 그가 바로 건강한 이 사회의 일원이지 않을까. 채운 잔은 비워야 한다고 그날도 끝까지 간 우리들. 누구에게랄 것도 없는 중얼거림을 남기고 일어섰다.
"PD라…. 예전 같으면 잡혀 갔을지도 몰라.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