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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측의 일방적인 '삼성기사 삭제' 건으로 1년 넘게 끌어온 <시사저널> 사태가 막을 내렸다. 기자들 22명 전원은 일괄 사표를 제출하고 새 매체 창간으로 가닥을 잡았다. 이에 '시사기자단'은 아직 제호와 정확한 창간 날짜가 정해지지는 않았지만 하반기 새 매체 창간을 목표로 전력투구하고 있다. 지난주부터 시작된 모금운동은 4일 오후 현재 9000여 만원의 후원금과 정기구독 약정으로 이어졌다. <오마이뉴스>는 시사기자단의 새 매체 창간을 독려하는 릴레이 편지를 연재한다. <편집자주>
▲ 편집권 문제로 사측과 갈등을 빚다 모두 사표를 낸 시사저널 전직 기자들이 2일 저녁 서울 목동 방송회관에서 '참언론실천시사기자단'을 출범시키며 새매체 창간을 선포했다. 이날 자리를 함께한 참석자들이 새매체 성공을 기원하며 큰절을 올리고 있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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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시대의 상처"라는 말이 있다. 작가는 시대의 아픔에 누구보다 노출된 상처여야 한다는 어느 프랑스 작가의 고백이다.

유신시대의 어둠 속 신문 문화면의 한 구석에서 만났던 이 엄숙한 명제는 고문정치의 공포 아래 숨죽였던 나에게는 또 하나의 고통스런 채찍이었다. 온 국민이 유신의 찬가만을 부르도록 강요된 상황에서 글 쓰는 사람은 시대의 고통을 온 몸으로 받아야 한다는 지적은, 그래서 언론인도 무엇보다 시대의 상처여야 한다는 각성은 아팠다.

그러나 그것은 정치적 폭권의 시대에만 해당되는 말은 아니다. 지난 1년여 동안 벌어진 <시사저널> 사태는 언론의 정도를 걷기를 선택하는 언론인들은 언제 어디서나 시대의 상처가 될 수밖에 없다는 숙명적 사실을 다시 한 번 일깨운다.

이 잡지의 기자들이 재벌기업에 관한 기사의 처리를 둘러싼 긴 투쟁 끝에 집단 사표를 내기에 이른 현실을 마주하면서 시대적 상황의 변화가 언론 현장에 과연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 새삼 반추하게 된다.

우선 18년 전 이 잡지의 창간에 동참했던 나로서는 흔한 말로 만감이 교차한다. 1989년 여름 <시사저널> 편집국은 정치적 민주화가 싹트기 시작하는 새로운 상황에서 정의롭고 독립적인 시사주간지를 우리 손으로 만들어낼 수 있다는 가능성에 흥분하고 있었다.

준재벌급 자본이 경영의 근거를 마련하고 기성언론인들이 편집국의 간부를 형성한 가운데 자본과 정치권력으로부터 이토록 자유로운 잡지가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당대를 지배했던 시대정신의 힘이었다.

자본과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웠던 <시사저널>

자유로운 공기는 자유로운 언론과 자유로운 언론인을 배양했다. 언론의 정도를 고수하겠다는 편집국 안의 열정은 다소 과장하면 신흥종교를 닮은 듯한 열기를 내뿜었다.

거기에 기성언론이 앓았던 두려움이나 부패가 끼어들 여지는 없었다. 이러한 순진한 열정이 새로운 정치권력이나 이미 공룡화한 한국사회의 자본, 그리고 기득권의 이데올로기와 끊임없이 충돌을 빚은 것은 당연했지만 그 과정에서 이 잡지 나름의 순수한 문화가 힘차게 뿌리내렸다.

▲ '삼성 관련기사 삭제' 이후 편집권 독립을 위해 싸워왔던 시사저널 기자들이 26일 전원 사표를 제출하며 사측과 결별을 선언했다. 서대문 시사저널 본사 앞에서 정희상 노조위원장이 사태의 경과를 밝히고 있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어쨌든 이제 투기의 광풍이 수그러들 줄 모르는 물질주의의 시대에 <시사저널> 기자들이 선 자리는 어느덧 고도(孤島)로 변한 것처럼 보인다. 그들이 대변하는 가치는 변방으로 밀려나고 고립되었다.

그들이 1년 넘게 고통스런 투쟁을 벌이는 동안 거대언론들이 이를 외면했던 것만이 문제는 아니다. 어쩌면 더욱 중요한 사실은 물질주의가 키워온, 사회적 정의에 대한 불감증의 만연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바로 이 사실 위에 거리로 나간 기자들을 주목할 이유는 더 커진다. 시장의 이름 아래 인간의 얼굴이 잊혀지고 경쟁의 명분 아래 숱한 패배자들의 고통이 정당화될 때 사회가 건강한 생명력을 되찾기 위해 절실히 필요로 하는 것은 바로 인간다운 사회를 향해 원칙과 근본을 끈질기게 상기시키려는 어리석을 정도의 단순함이다.

비판 언론의 이름으로 숨겨진 이익들이 거침없이 여론을 왜곡시키는 냉소적인 언론 풍토에서 대의를 위해 소승적 이익을 던져버리는 우직함은 그 어느 때보다도 소중해졌다.

기자들이 '참언론실천시사기자단'을 결성하고 새로운 매체를 창간하기 위해 나섰다고 한다. 그들은 소액주주와 정기독자들로부터 투자를 받아 오는 9월 새 매체를 창간한다는 구체적인 청사진까지 마련했다.

잡지는 잡지를 만드는 사람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다면, 그래서 <시사저널>의 기자들이 있는 곳에 <시사저널>의 정통성이 함께 한다면, 그리고 이 기자들이 언론의 현장을 떠나는 것은 한국 언론과 사회의 상실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면, 이들을 언론 현장에 다시 보내는 과제는 당연히 우리 모두의 관심사가 되어야 한다.

언론은 국민의 관심을 먹고 자라는 나무

나는 몇 해 전 태국 차오파야 강에서 환경교육을 위해 개조한 바지선의 벽에 이런 구절이 쓰여 있는 걸 읽은 적이 있다.

"결국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것만 보존하게 된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이해하는 것만 사랑한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경험하는 것만 이해한다."

우리는 거대 이익에 봉사하지 않는 언론을 원하는가? 우리는 자신에게 돌아갈 불이익을 기꺼이 감수하면서 사회가 앓고 있는 질병들을 끈질기게 고발하는 순수한 목소리를 듣고 싶은 것인가? 그렇다면 당면 과제는 <시사저널> 기자들이 겪고 있는 사태의 진상과 그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그럴 때에만 이해가 사랑으로, 사랑이 보존으로 연쇄반응을 일으킬 수 있게 되리라.

그러므로 그 출발은 관심이다. 진부한 표현의 틀을 빌리자면 참 언론은 국민의 참 관심을 먹고 자라는 나무다. 이 시점에서 자유언론의 전선은 <시사저널>사태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다면 그 기자들은 당연히 국민적 관심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생명력 있는 언론을 키우기 위한 작지만 중요한 첫 단서가 거기에 있다. 사실 생명은 연계가 그 본질이다.

보다 일반화한다면 단절에서 연계로 나아가는 것이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는 우리 사회를 살리는 길이다.

▲ 박순철 위원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영화 <희생>이 생각난다. 그 첫 머리에 죽은 나무에 3년 동안 물을 주었던 중세 수도승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 단순함은 마침내 죽은 나무마저 살려낸다. 우리가 나무를 사랑한다면, 그래서 우리의 마음 속에 나무가 살아난다면, 나무는 진실로 살아나는 것이 아닌가?

시인 천상병의 시에서처럼 "그것은 죽은 나무가 아니다"라고 외칠 수 있는 게 아닌가? 그렇다면 결론도 단순하다. 참언론은 결코 죽지 않는다. 이를 지키려는 사람들이 관심과 물을 부어주는 한.

덧붙이는 글 | 박순철 기자는 <시사저널> 전 편집국장이자 동아투위 위원입니다.


#시사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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