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주요 대학들은 "내신 1등급(상위 4%)에서 4등급(상위 40%)까지 모두 만점을 주겠다"고 발표하였다. 절반에 가까운 학생의 내신 성적을 모두 만점 처리하겠다는 이야기이니, 사실상 이들 대학의 입시에서 내신의 반영비율은 0%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이에 대해 교육부는 "2008학년도 입시안의 근본 취지에 대한 부정"이라 규정하며 "해당 대학에 대한 재정 지원 중단도 검토하겠다"는 초강수까지 두었다.
이러한 논란에 대해 <조선일보>는 "아예 교육부 장관이 대학 입학처장을 겸하라"며 '대학의 자율권'을 주장하고 나섰고, <한겨레>는 "대학인가? 마피아인가?"라는 제목의 사설을 통해 '내신 중심의 입시안'을 옹호하였다. 결국 "내신반영비율을 단계적으로 확대한다"는 합의로 사태는 마무리되었다.
현행 입시제도는 내신(고등학교별 시험), 수능(국가 단위 일제고사), 논술 및 면접(대학별 고사)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교육부는 2008학년도 입시안을 제시하면서 각 대학이 내신 성적을 최대한 반영하도록 요구하였지만, 어떤 요소를 어느 비율로 반영할지는 각 대학에 맡겨 놓은 상태이다. 따라서 어떤 때에는 논술이 부각되다가 어떤 때에는 수능 혹은 내신이 부각되면서 학생들은 늘 혼란을 겪게 되는 것이다.
기득권층의 요구에 적극 부응하는 대학
그렇다면 최근 각 대학이 내신의 반영비율을 최대한 낮추려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한 마디로 "자기네 입맛에 맞는 학생(경쟁력 있는 엘리트)을 자기네 방식(대학 본고사)대로 뽑아가겠다"는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 볼 때 고등학교 내신은 만족스러운 자료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선 고등학교 교사들이 매긴 성적을 신뢰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서울과 지방 사이에, 특목고와 일반고 사이에 학력 격차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각 대학은 끊임없이 삼불(三不 - 고교등급제, 대학본고사, 기여입학제 금지) 정책의 폐기, 본고사 부활을 주장하는 것이다. 본고사가 부활되기 어려우면 논술 고사를 어렵게 내서 본고사 효과를 보려고 한다. 이마저도 어려우면 차라리 수능의 반영 비율을 높여 전국 모든 학생들을 동일한 시험으로 평가해 서열을 매기겠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내신의 반영비율을 0%로 만들고 싶은 것이다. 결국 대학의 입장은 '사교육-해외 유학-특목고-명문대'를 통해 자신의 부와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려는 기득권층의 요구를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 반해 '내신 중심의 입시안'을 옹호하는 측은 고등학교까지의 공교육의 결과인 내신이 대학입시에서 가장 중심을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만약 수능이나 논술의 비중이 커지면 학생들은 당연히 학교 공부를 외면한 채 학원으로 몰리게 되니 사교육비가 증가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특목고나 부유층 학생들에게만 유리한 결과가 생긴다는 것이다. 지역 간, 학교 간 학력 격차가 생기는 문제는 고교 평준화 완성을 통해 해결해야 하는 문제라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와 같은 대학서열화체제가 유지되는 이상 내신이든 수능이든 논술이든 어떤 것도 근본적인 대안이 될 수 없다. 내신 중심의 입시안은 현재와 같은 과도한 사교육 부담, 특목고와 일반고, 서울과 지방 사이의 불평등을 해소할 수 있는 단기적인 대안이 될 수는 있다. 하지만 이는 학교 밖의 경쟁을 학교 안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우리 학생들에게 더욱 가혹한 부담을 지워줄 수 있다.
게다가 '내신 중심 입시안'의 전제는 '내신등급제'이다. 즉 '90점 이상은 수', '80점 이상은 우'와 같은 과거의 절대평가와 달리 '상위 4%까지는 1등급', '상위 11%까지는 2등급'과 같은 상대평가 체제인 것이다. 이 제도 속에서는 학생들이 서로 협동하고 열심히 공부해서 모두 100점을 받더라도 모두 '9등급'을 받게 된다. 즉 아름다운 학교 공동체 문화 형성을 도저히 기대할 수 없는 제도이다. 내가 1등급을 받기 위해서는 누군가를 2등급으로 밀어내야 하는 제도이다.
그 결과 '친구의 노트를 훔치는' 등의 비인간적인 경쟁체제, 3년 동안 모두 60여 과목의 등급이 매겨지는 가혹한 부담을 우리 아이들에게 강요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방식으로 자본주의 경쟁의 논리는 학교 교실을 통해 학생들에게 체계적으로 내면화된다.
그렇기에 상당수의 학생들은 차라리 내신보다 수능을 선호한다. 하지만 수능이 대입의 중심이 되는 순간 전국의 모든 고등학교에서는 교과서 대신 EBS 수능 문제집이 교재로 쓰이고 학생들은 학원으로 몰리게 된다. 우리 교육을 획일화하는 주범은 바로 전국단위 일제고사인 수능인 셈이다.
그렇다고 하여 논술이 대안인가? 논술은 주입식 교육의 틀을 벗어나 창의력과 논리력을 기를 수 있는 대안처럼 보인다. 하지만 논술이 대학 본고사의 방식으로 활용되고 있다는 점이 문제다. 대학이 논술을 치르려 하는 것은 학생들의 창의력 신장에 그 목적이 있다기보다 내신이나 수능보다 더 촘촘한 서열을 매기고자 하는 데에 목적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논술 고사는 정상적인 고등학교 교육과정의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난이도를 지닐 수밖에 없다. 따라서 논술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고액의 사교육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 결과 고액의 사교육 혜택을 받을 수 있는 부유층 자녀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결과가 나올 수밖에 없다.
대학평준화가 근본적인 대안이다
해방 이후 총 16차례 입시제도가 바뀌었고 예비고사, 본고사, 학력고사, 수능, 내신, 면접, 논술 온갖 제도가 도입되었지만, 단 한 번도 입시 문제가 해결된 적은 없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전국의 모든 학생들이 서울대라는 좁은 문을 통과하기 위해 무한 경쟁을 해야만 하는 구조, 전국의 모든 대학이 서울대를 정점으로 한 줄로 서 있는 대학서열화체제가 해소되지 않는 이상 어떠한 입시 방법이 들어오더라도 학생들의 고통은, 학부모의 사교육 부담은 해소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대안은 오직 하나, 고교평준화 체제를 내실화하고 대학서열화체제를 없애 대학을 평준화하는 것이다. 평준화란 흔히 오해하듯 '뺑뺑이'도 '교육 획일화'도 아니다. 평준화의 기본 취지는 서울 아이들이든 지방 아이들이든, 영재이든 장애 아동이든 모두에게 '질 높은 공교육을 균등하게 제공하는 것'이다.
하지만 입시명문고로 전락한 특목고 학생의 비율이 전체 학생의 1.5%를 차지하고 현실 속에서 고등학교 평준화 체제는 이미 무너지기 시작했다. 또 여전히 수많은 지역의 고등학교는 비평준화 체제로 남아 있다. 우리 교육의 문제점은 평준화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평준화의 미완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형식적인 고교 평준화 체제에서 이제는 실질적인 고교 평준화 체제로 나아가야 한다.
나아가 평준화 체제는 고등교육 단계까지 확대되어야 한다. 대학서열화야말로 초중등교육을 입시교육으로 내몰고 우리 사회의 고질적인 학벌 구조를 지탱하는 원인이다. 공립대든 사립대든, 수도권 대학이든 지방 대학이든 교육의 여건과 수준이 차이가 나지 않도록 정부 차원의 행정적, 재정 지원을 강화하는 것, 그리고 전국의 모든 대학이 신입생을 별도로 뽑는 것이 아니라 '대학입학자격고사'를 통과한 학생이라면 누구나 자기가 원하는 대학과 학과에 입학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통해 대학평준화를 시행해야 할 때다. 그리고 학벌에 따라 취업의 기회가 박탈된다든지 임금에 차이가 생겨나는 일이 없도록 공직자 할당제, 학력학벌차별금지법 등의 제도적 조치를 마련해야 한다.
한나라당, 조중동 등 수구세력은 아예 대학에 학생 선발의 자율권을 모조리 맡기고 3불정책을 폐지하라고 한다. 이는 소수 기득권층에게만 상위권 대학 입학의 기회를 열어놓고 노동자 민중 자녀들의 교육권을 봉쇄하겠다는 것이다. 사교육을 더욱 부추기고 학생들을 더욱 가혹한 입시 지옥으로 몰아넣겠다는 것이다.
교육운동단체에서는 3불정책을 법제화하고 내신 중심의 입시를 시행하라고 한다. 그러나 3불정책이 법제화된다고 하여, 내신 중심의 입시가 시행된다고 하여 가혹한 입시 지옥은 사라지지 않는다. 노동자 민중의 허리를 휘게 만드는 사교육 부담 역시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과거로 돌아가고자 하는 이들을 향해 현재를 유지하자고 하는 것은 결코 진보가 아니다.
3불정책을 둘러싼 논란을 넘어, 내신반영비율을 둘러싼 논란을 넘어, 이제는 문제의 근원을 짚어야 할 때이다. 입시 폐지, 대학평준화를 향한 대장정을 시작해야 할 때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작은책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이형빈 기자는 이화여고 교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