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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욕하면서 보는 드라마'라는 말이 등장했다. 즐겨보기는 하지만 공감하지 못해 욕을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상하게 볼 수밖에 없는 드라마. 사실 그것도 하나의 관심이라면 관심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요즘 들어서는 이른바 '시청률은 높지만 욕을 먹으며, 아무런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는 드라마'들이 있다.

대부분 이러한 드라마들은 식상한 소재가 등장하고, 작위적인 전개, 억지스러운 설정 등으로 무리하게 드라마를 끌어가다 보니 시청자들은 익숙한 맛에 드라마를 보지만 결코 공감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또한 드라마의 주요 시청자층이 중장년층이 대부분이고,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인기도와는 별개로 시청률은 높은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젊은 시청자들이 채널 선택권에서 밀려나고, 인터넷 '다시보기'를 이용하기 시작하면서 더욱더 이러한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

▲ 불륜드라마 공식을 그대로 적용하면서 비상식적인 내용의 강도를 높이고 있다.
ⓒ IMBC
대표적인 드라마를 살펴보면 MBC의 <나쁜 여자 착한 여자> <내 곁에 있어>와 KBS의 <행복한 여자> 등이 대표적인 예다. 주로 아침드라마, 일일드라마, 주말드라마 등이 이러한 예에 해당한다.

아침드라마의 경우 '불륜'이라는 소재를 단골소재로 애용해 주부시청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아왔고, 일일드라마나 주말드라마도 언제부턴가 가족들의 따뜻한 정을 이야기하는 내용은 사라지고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이야기들로 채워지기 시작해 시청자들로부터 비난을 들어야만 했다. 하지만 여전히 새로운 것보다는 익숙함을 선호하는 중장년층들이 있어 시청률에서는 언제나 변함없는 사랑을 받고 있다. 우선 이들 드라마를 살펴보면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과거 인기 소재 무한 반복

첫 번째 공통점으로 과거 TV인기드라마의 소재가 한데 뭉쳐져 있다는 점이다. 파격적인 소재와 설정, 전개는 없다. 앞으로의 내용 전개를 미리 짐작하고 먼저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로 우리에게 친숙한 소재들이다.

그래서 그 친숙함은 이제 식상함으로 바뀌었을 정도다. <나쁜 여자 착한 여자>의 경우 '불륜'을 소재로 불륜드라마의 공식을 철저하게 따르며 선악구도와 비상식적인 캐릭터, 내용 등으로 무장하고 있다. 가령 6년간 몰래 바람을 피워 온 건우(이재룡)와 서경(성현아)은 당당하게 자신의 배우자에게 이혼을 요구하고, 급기야 서경은 자신이 착각했다며 전 남편 태현(전민호)에게 돌아간다.

더 나아가 태현을 사랑하는 소영(유서진)은 스토커를 방불케 하는 연기를 펼치며, 일명 '미친 여자'라는 애칭까지 얻으며 시청자들로부터 이해를 받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시청률은 20%를 웃돌며 인기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 모녀의 사랑이 애절함을 자아내지만 출생의 비밀은 워낙 진부한 소재다.
ⓒ IMBC
적어도 대박은 아니지만 일정한 시청률을 유지하고 있다는 자체가 신기하다. 매회 작위적인 설정과 내용으로 비난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내 곁에 있어>도 마찬가지다. 선희를 둘러싸고 출생의 비밀, 결혼 전 다른 사람과 결혼한 과거를 숨기고 결혼생활을 하는 모습, '인간도 명품이 있다'라는 말을 서슴없이 내뱉는 선희의 엄마 등. 현실에서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들로 점철되어 있다고 해도 과장은 아니다.

<행복한 여자>는 주말드라마에서 시청률 1위를 기록하면서 고공행진을 하고 있지만 정작 드라마 속 주인공인 지연(윤정희)과 태섭(김석훈)의 사랑에 아무도 공감하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부모님 세대의 불륜과 이혼으로 호적상 남매지간이라는 설정 때문이다. 그래서 아버지가 시아버지가 될 위기에 처해 있다.

언뜻 들으면 <하늘이시여>를 떠올릴 수 있다. 이렇듯 불륜, 출생의 비밀 등 과거 TV드라마에서 인기를 얻었던 소재들은 여전히 무한 반복하며 인기 드라마 공식에 한 치도 어긋나지 않고 그대로 적용하고 있다.

익숙함을 이용한 자극적인 설정

그래서 이들 드라마는 우리가 작가가 되어 앞으로의 이야기를 전개시켜나갈 수 있을 만큼 익숙하다는 것.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식상함을 타파하고자 좀 더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내용을 담는다는 것이다.

즉 시청자들의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그 강도가 날로 강해진다는 점이다. 그래서 대부분 드라마에서 출생의 비밀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행복한 여자>를 보면 출생의 비밀이 비극이 되어 주인공들이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고 있는데 그전에 지연의 남편인 준호(정겨운)의 불륜이야기가 펼쳐졌고, 불륜을 저지른 것은 준호임에도 준호의 엄마(사미자)는 지연이의 뺨을 때리기까지 한다.

▲ <행복한 여자>는 지연의 별명이 '불행한 여자'로 그만큼 억지스러운 설정이 많다.
ⓒ KBS
또한 그러한 설정은 종국에 출생의 비밀로 이어져 제목은 행복한 여자인데, 지연은 '불행한 여자'라는 별명을 얻어야만 했다. 즉 제작진은 시청자들의 눈높이를 고려해 좀 더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내용들을 삽입해 익숙함을 최대치로 끌어올리려 한다.

그리고 시청자들은 비록 내용에 공감하지 못하지만 그러면서도 익숙함에 의해 드라마를 보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례로 <행복한 여자>의 전작인 <소문난 칠공주>가 대표적이다. 네 명의 딸이 등장하고 딸 각각의 인생을 보여주는데, 그 안에는 불륜, 출생의 비밀, 시집살이 등 이전에 즐겨 쓰던 소재들을 총망라했던 작품이다.

하지만 그러한 단골소재 백과사전이었던 <소문난 칠공주>는 40%의 시청률을 올리기까지 했었다. 이처럼 제작진들은 시청자들이 갈수록 눈이 높아지고 있는 상황에서 새로운 소재 발굴보다 익숙함을 최대한 이용해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소재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사실 창작이라는 것은 언제나 어렵고 고통이 따르는 법이다. 그래서 새로운 소재 발굴은 한국 드라마의 여건상 힘든 것이 사실이지만 시청률에만 목을 매며 인기드라마 공식을 재차 반복하고 강도를 더해가는 방식은 결국 한국 드라마의 질을 떨어뜨리는 일이다.

이러한 제작진의 불순한 의도는 대부분 맞아떨어지면서 방송사에 효자, 효녀 노릇을 하고 있다. 그래서 잊을 만하면 그러한 소재들이 다시금 등장해 시청자들이 다양한 드라마를 볼 수 있는 권리를 박탈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문제를 제작진에게만 돌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분명 우리도 비난하지만 끊임없이 그러한 드라마를 즐겨 보고 있기 때문이다.

오죽했으면 '욕하면서 보는 드라마'라는 말이 나왔겠는가? 즉 시청자 스스로 좀 더 다양한 드라마를 보면서 희로애락을 느끼고 싶다면 한국 드라마의 고질적인 문제를 가진 드라마를 외면해야 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래야만 제작진들도 이제는 이러한 드라마가 더는 시청자들에게 호응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만들지 않을 것이다.

생각해보자. 한국 대부분 부부가 바람을 핀다면 가정을 유지하는 집은 별로 없을 듯싶다. 또한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출생의 비밀을 가졌다면 근친상간은 보편화가 되어 지금쯤 사회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아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물론 불륜과 출생의 비밀을 가진 사람들도 많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다. 그만큼 이들 드라마는 현실성이 결여되어 있다. 무조건 극적인 상황을 유발해 억지스러운 눈물과 감동을 주고자 하는 것은 지나친 허구에 의존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만큼 한국 드라마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색다른 소재 발굴과 현실성을 고려한 드라마들이 많이 등장해야 하며 시청률 지상주의를 버리고 실험적인 시도가 선행되어야 한다. 또한 몇 번의 실패에 낙담하지 말고 꾸준한 시도가 이루어져 달콤한 성공의 열매를 따먹을 수 있을 때 진정으로 시청자들이 원하는 드라마로 웃음과 눈물, 감동을 안겨줄 수 있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데일리안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불륜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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