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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쌀쌀한 꽃샘추위를 뚫고 서울에서 이곳 산골 마을로 오시는 날. 나는 꿈을 꾸었었다. 형제들은 내 꿈을 다 흘려들었을 것이다. 터무니없는 짓이라고. 그러나. 꿈은 이루어졌다.
20년 전. 한겨울에 나들이를 나섰다가 눈밭에서 쓰러지신 후 방안에 들어앉아 해 주는 밥만 받아 자시던 어머니가 손수 자식 밥상을 차린 것이다. 밀가루를 반죽하시고 밀대로 밀고 한점 한점 뜯어 넣으시고 이것저것 양념들을 얹어 이전 솜씨를 유감없이 발휘하여 수제비를 끓이셨다. 어머니에게 신바람과 수다의 밥상이 내게는 눈물의 드라마로 비쳤다.
어제 오후에 감자 몇 개를 삶아 새참으로 드렸더니 “그 감자 톰방톰방 썰어 넣고 수제비 긇이믄 좋것다”고 하시기에 이때로구나 싶었다. “그럽시다. 수제비 긇여 먹읍시다. 어머니가 해 주세요.” 했더니 눈을 크게 뜨신 어머니가 “그래 복까?”하셔서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휴대용 가스렌지를 꺼내 마루에 놓고 우리밀 통밀가루를 꺼내왔다. 먼저 어머니가 손을 씻게 대야에 물을 떠다 드린 다음 감자와 멸치, 양파, 미역 등을 가져왔다. 서울 누님에게 전화를 해서 육수 만드는 절차를 확인한 다음 차례대로 어머니 앞에 놔 드렸다.
어머니가 반죽한 밀가루를 위생 랩으로 싸서 한 시간쯤 삭혔다가 꺼냈다. 밀가루 반죽이 쫀득쫀득 해졌다. 휴대용 가스렌지에 불을 붙이고 멸치 대가리랑 미역을 넣었다.
어머니가 “호박이파리 따다 비비 넣으면 맛있다”고 해서 호박잎을 따 드렸더니 곱게 껍질을 벗기셨는데 대공은 톡톡 잘라 따로 장만하셨다. 그러고는 내가 말릴 겨를도 없이 펄펄 끓고 있는 육수냄비에 넣어버리시는 것이었다.
육수물을 따뤄 내고 그다음에 감자를 넣고 푹푹 끓인 다음에 수제비를 떠 넣으면서 넣어야 할 호박잎을 제일 먼저 넣어버리신 것이다.
나는 기겁을 하고 얼른 다 건져냈다. 그러면서 설명을 하니 헤~ 웃는 얼굴로 쳐다만 보시더니 이제는 반죽 한 밀가루를 밀대로 밀기 시작했다. 수제비를 뜯으면서 40년 50년을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하시더니 수제비와 얽힌 일화들을 소개 하셨다.
“미룽지처럼 얄푸락하게 밀믄 입에 넣고 씹을 새도 없이 목구멍에서 잡아 땡기는지 그냥 미끄름 타득끼 넘어가삐는기라.”
“보리타작 하기 전에 그때는 먹을끼 있어야지. 수제비 떠서 신 김치 넣고 푸욱 긇이믄 내금이 온 동네에 퍼져서 지나가던 사람도 ‘항그럭 주소’ 하고 오고 그라는 기라.”
육수물을 걸러서 넣은 냄비에 감자 익는 냄새가 나자 “감자가 다 물크져서 국물이 잠방잠방 할 때까지 불을 더 때라”고 하셨다. 한참 후 됐다 싶었는지 수제비를 떠 넣기 시작했다.
“아야. 저서라. 안 뭉치고로 살살 저서라. 뭉치삐믄 떡이 되는기라. 이걸 둥그렇게 맹글라서 밀가루 떡 해 먹어도 새참이 단디 되는기라.”
냄비가 뻑뻑해져서 수제비 그만 넣었으면 했는데 남겨 두기 어중간하다고 어머니는 반죽을 다 떼어 넣으셨다. 몽고 간장을 가져다 드렸더니 이거는 ‘맛대가리’ 없는 거라고 집 간장 가져오라고 했다. “조선간장요?” 했더니 그렇다고 했다.
몇 번 간을 보시더니 “먹자”고 하셨다. 우리는 큰 대접에 수제비를 퍼서 먹었다. 남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국물하나 없이 냄비를 싹 비웠다. 어머니는 “그 많은 걸 다 먹었디 일어서지도 못하것다”고 하셨다. 나도 그랬다.
그러나 수제비 세 그릇 채운 내 배만 부른 건 아니었다. 우리집 주방장으로 등극하신 어머니 도우미 노릇을 하게 된 보람이 수제비를 먹기 전부터 내 배를 불렸다.
청국장 만들기, 아궁이 불 때기, 텃밭 물 뿌리기, 마늘까기, 산 뽕잎 따기, 가죽 자반 만들기, 매실 껍질 까기, 바느질하기, 마루 걸레질 하기 등의 정점에서 해낸 어머니 밥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