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일, 한나라당이 야심 차게 발표했던 새 대북정책이 첫발도 떼기 전에 뒤뚱거리고 있다.
8일, 박근혜 전 대표 캠프의 김재원 대변인은 "박 전 대표가 당의 새 대북정책은 상호주의를 포기하고 북핵 문제를 분리해 여러 지원 방안을 강구하고 있다는 점 등에서 걱정스러운 방안이라고 지적했다"고 전했다.
그는 "상호주의, 핵 폐기 선행을 전제로 한 대북지원, 6자회담 체제하 대북문제 해결 등은 가장 합리적이고 필요한 원칙"이라며 "당론을 만들기 위해 의견을 모아가는 과정이기 때문에 크게 문제를 제기하기는 어려운 입장이지만, 박 전 대표가 견지해온 기존 대북·통일정책은 변함이 없다"고 말했다.
새 대북정책의 이름은 '한반도 평화비전-적극적인 대북개방·소통 정책'인데 당내에서부터 '소통'이 제대로 안되고 있는 셈이다.
박 전 대표 쪽은 새 대북정책에 대해 처음에는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태도를 바꾼 것은 '한반도 평화비전'에 대한 당 안팎 보수층의 반발을 의식한 탓으로 보인다. 또 '한반도 평화비전'이 경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이명박 전 서울시장 쪽의 대북정책과 비슷한 것이 아니냐는 일부 지적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점을 떠나 한나라당의 새 대북정책은 근본적으로 많은 한계를 안고 있었다.
일단 위상이 확고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대통령 후보가 정해지는 순간 사실상 '당사 관리인'에 불과하게 될 강재섭 지도부가 새 대북정책을 만들었다. 박근혜 전 대표나 이명박 전 시장이나 분명하게 '한반도 평화비전'이 자신들의 대북 정책과 일치한다고 선언하지도 않았다.
8월 19일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승리하는 사람이 확정되는 순간 가장 핵심적인 대선 정책 가운데 하나인 대북 정책도 다시 제시될 수밖에 없다.
현재로서는 이명박 전 서울시장이 후보가 된다면 '한반도 평화비전'의 뼈대는 유지될 것으로 보이지만, 박근혜 전 대표가 승리한다면 새 대북정책은 상당히 바뀔 가능성이 많다.
<조선일보>는 지난 6일 기사에서 "새 대북정책은 8·15 남북정상회담이라는 초특급 북풍에 대비한 2개월 만기 보험상품"이라고 규정했는데 이제는 2개월 뒤에는 언제 부도날지 모르는 약속어음이 되고 말았다.
"미국이 변하니까 한나라당도 변한 것"
한나라당이 새 대북정책을 고민한 것은 지난 2월부터다. '평화통일 특별위원회'라는 태스크포스를 만들어 6개월 고민해 내놓은 것이 '한반도 평화비전'이라는 것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대북 전문가는 "한나라당의 대북 정책 변화를 모색한 때가 북미 관계가 갑자기 개선되기 시작한 때와 비슷하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분석했다.
북한이 지난해 10월 9일 핵실험을 했을 때 북미 관계는 최악이었지만 올 1월 16일 베를린에서 6자회담 북한 수석대표인 김계관 외무성 부상과 미국 수석대표인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차관보가 만나면서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베를린 회동에서 방코델타아시아(BDA) 은행 문제의 해결 등 2·13 합의의 주요 내용이 사실상 조율됐다. 그리고 3월에는 김계관 부상이 미국을 방문해 국빈급 대우를 받았다. 북미 양자회담이 6자회담을 이끌어가는 모양새가 됐다.
그는 "미국도 변하는데 한나라당은 그대로냐는 말은 그들에게는 정말 뼈아픈 비판이다, 미국의 대북 정책이 변했는데 계속 어깃장을 놓을 수는 없었을 것"이라며 "따라서 한나라당 정책 변화는 북미 관계 접근이라는 상황 속에서 나온 '대선용'"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만약 북미 관계가 갑자기 악화된다면 한나라당은 다시 반북 대결 전선을 만들어 낼 것"이라고 덧붙였다.
결국 미국이 변하니까 한나라당도 변했다는 말이다. 1994년 제네바 합의 때 정세 변화를 무시하며 대북 강경책으로만 일관하던 김영삼 정부가 국제적으로 왕따당했던 사례를 한나라당도 분명히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현재 다행이라면 조지 부시 미 행정부의 대북 정책이 쉽게 바뀔 것 같지는 않다는 점이다. 1년 전까지만 해도 진보 진영 전문가들은 2008년의 한반도 정세가 가장 위험할 것으로 예상했다.
한나라당이 대선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높은데, 부시 정권의 임기는 2009년 1월 말까지다. 2008년 한미 양국에 대북 강경 정권이 집권하고 있으면 긴장이 훨씬 더 높아질 것으로 예상했는데 부시 행정부의 대북 정책이 바뀌는 바람에 우려가 줄었다.
한나라당 대북 정책의 한계는 남북관계를 한반도와 민족 전체의 운명이라는 관점에서 다루겠다는 '열정'이 별로 없다는 점이다.
한나라당의 새 대북정책은 ▲비핵화, 평화정착을 위해 필요시 남북정상회담 개최 ▲남·북·미·중 4자간 종전선언 수용 검토 ▲한반도의 완전한 긴장완화시 평화협정 체결 ▲김포-순안간 남북 정기항공로 개설 ▲한강-예성강·한강-임진강 뱃길 개설 ▲단계적인 남북 전면 자유 왕래 추진 ▲선 북한 방송·신문 전면 수용 ▲남북한 유·무선 통신 개통 추진 ▲극빈계층 300만명에 연 15만톤 쌀 무상지원 등이다.
내용 자체로는 햇볕정책에 상당히 접근했고 상호주의 폐기로 보인다. 그러나 실제 정책 집행은 상대가 있는 법인데 북한은 예측하기 힘들고 협상하기 어려운 상대다. 남북관계 개선·한반도 평화에 확고한 열정이 없으면 북한과 몇 번 협상하다가 인내심이 고갈되기 십상이다.
과거 발목잡기에 대한 사과 없이...
부시 행정부의 현재와 같은 대북정책이 내년에도 유지되고 한나라당이 집권한 뒤에도 '한반도 평화비전'을 명목상 고수한다고 해도 문제는 여전하다.
새 정권은 반드시 이전 정권과 차별화를 시도할 것이다. 한나라당의 대선 구호인 '잃어버린 10년을 되찾자'는 시각에서 본다면 대북 정책의 차별화야말로 일차적이다.
집권한 한나라당은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대북정책과 차별화하려는 시도를 하면서 동시에 부시 행정부의 바뀐 대북 정책과 어깃장이 나지 않도록 하는 줄타기를 할 가능성이 높다. 사안에 따라 냉탕과 온탕을 왔다갔다 할 것이다. 이전의 사례를 보면 대북 정책에서 온탕과 냉탕을 왔다갔다 하는 것은 차라리 냉탕을 계속 유지하는 것보다 효과가 없었다.
'한반도 평화비전'을 주도한 정형근 의원은 4일 기자회견 때 "(한나라당이) 개방정책으로 '터닝'(전환)한 걸로 봐도 좋다"면서 이전의 한나라당의 대북정책을 두고 나왔던 '수구적'이라는 비판에도 동의했다.
그는 "사실 기존의 수구… 뭐 수구적이죠. 보수적이고, 수동·방어적인 대북정책에서 과감하고 공세적인 정책으로 북한을 개혁 개방으로 이끌자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나라당의 지난 10년간 대북정책은 한마디로 남북 화해·협력에 발목잡기다.
'발목잡기'를 해도 나름대로 철학과 정책에 입각해 발목잡기를 했다면 괜찮을 텐데 그것도 아니었다.
정권 비판 차원에서 "퍼주기" "반미좌익"이라는 딱지 붙이기에만 골몰했다. 북한이 핵개발을 시도한 것은 아무리 늦게 잡아도 1980년대 중반부터인데 햇볕정책 때문에 핵개발을 했다는 해괴한 주장을 했다.
철학과 한반도 미래에 대한 비전이 없으니 국제적 상황의 변화에 따라 그냥 변한다. 한나라당의 새 대북정책이 진정성을 가지고 있다면, 과거 발목 잡기에 대해 분명하게 사과를 했을 법도 한데 그것도 없다.
한나라당이 야심 차게 발표한 '한반도 평화비전'은 이처럼 많은 과제를 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