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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여성민우회, 문화연대, 체육시민연대 등은 지난달 29일 오전 서울 명동 우리은행 본점 앞에서 박명수 전 여자농구팀 감독의 성추행 사건과 관련해 우리은행 측의 공식 사과를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한국여성민우회, 문화연대, 체육시민연대 등은 지난달 29일 오전 서울 명동 우리은행 본점 앞에서 박명수 전 여자농구팀 감독의 성추행 사건과 관련해 우리은행 측의 공식 사과를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 한국여성민우회 제공
"코미디야, 코미디…."

자신을 성추행한 박명수 전 감독(우리은행 한새여자농구단)이 법원으로부터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을 때, 피해자 A씨는 "코미디"라는 말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박 전 감독이 사실상 자유의 몸이 되자, A씨는 지난 3개월간 겪은 고통이 한 편의 시트콤같이 느껴졌다. 주위의 만류에도 박 전 감독을 고소하고, 경찰과 검찰의 조사에서 사건 당일을 떠올리고, 지금까지 정신과 치료 등을 받는 등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일들이 우스웠다.

미국 전지훈련 도중 사건이 있었던 지난 4월 10일, 그는 "무조건 법대로 한다"고 다짐하며 귀국했다. 하지만 그가 믿었던 법은 피해자인 자신이 아닌, 가해자인 박 전 감독 편이었다. 그는 "이럴거면 법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박 전 감독에 대한 선고 내용을 듣고 "답답하고 치사하다, 그리고 겁도 난다"고 말했다. 박 전 감독의 거짓말에 속은 법원이 답답하고, "술이 취해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한 박 전 감독이 치사하고, 그런 박 전 감독을 혹시나 마주치게 될까봐 소름끼친다고 말했다.

박 전 감독에 대한 1심 선고 공판이 열린 지난 6일 저녁, A씨는 기자와 만나 "담당 판사를 만나면 하고 싶은 말이 많다, 생각을 좀 정리하겠다"며 8일 저녁 다시 만나기를 요청했다. 그와의 인터뷰는 8일 저녁 그가 입원한 병원 인근에서 한 시간 동안 진행됐다.

"판사님, 박 전 감독이 거짓말하고 있어요"

A씨는 "판사님의 딸에게 이런 일이 생겼다면, 과연 이런 판결을 내렸겠느냐"며 토로했다. 그는 "판사님을 만나면, 박 전 감독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며 "그 날 정황을 다시 설명하고 싶다"고 말했다.

"사건 당일, 박 전 감독은 만취하지 않았다. 내가 그의 호텔방을 나설 때 그는 분명 내게 '밖에서 감독과 산책하면서 조언을 들었다'고 말하라고 시켰다. 그리고 다음날에도 '다른 선수들에게 말했느냐'고 몇 번 확인했다."

A씨는 또한 "박 전 감독이 국가대표팀을 이끌면서 농구 발전에 기여했다고 하는데, 나라를 대표하는 공인이라면 처벌을 더 엄격하게 해야 하는 것 아니냐"며 "나도 국가대표 선수로서, 농구 발전에 기여하고 싶다"고 항변했다.

재판부는 ▲박 전 감독이 전지훈련 첫날, 평소보다 많은 주량을 마셔 만취한 상태였던 점 ▲국가대표팀 감독을 지내며 농구 발전에 기여한 점 등을 집행유예 판결의 배경으로 밝힌 바 있다.

A씨는 "박 전 감독이 지금까지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선수들을 어떻게 괴롭혔는지 알려주고 싶다"고 강조했다. 그는 "박 전 감독이 풀려나면, 그에게 당한 다른 피해자들이 '말 꺼내서 뭐하나'라는 생각을 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A씨는 "박 전 감독이 반성문까지 쓰면서 미안하다고 했지만, 그 때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며 "그래도 지난 5월 4일 아버지를 만났을 때, 미안하다고 한 마디만 했어도 넘어갔을텐데"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아쉬워하는 이유는 사건 이후 A씨뿐만 아니라 온 가족이 혼란에 휩싸였기 때문. 첫 공판 이후 A씨는 계속해서 박 전 감독이 나오는 악몽을 꾼다. 박 전 감독은 그를 향해 "가만두지 않겠다"는 말을 남겼고, 때문에 A씨는 수면제 없이는 잠을 이루지 못한다.

A씨의 모친 또한 그와 함께 치료를 받았고, 그가 다시 코트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부모와 쉬고 싶다는 A씨 사이에는 갈등이 끊이지 않고 있다.

지난 2월 19일 용인실내체육관에서 열린 여자 프로농구 올스타 경기 작전타임때 중부선발 박명수 감독이 하프라인 슛에 성공한 후 선수들과 기쁨을 나누고 있다.
지난 2월 19일 용인실내체육관에서 열린 여자 프로농구 올스타 경기 작전타임때 중부선발 박명수 감독이 하프라인 슛에 성공한 후 선수들과 기쁨을 나누고 있다. ⓒ 연합뉴스 신영근

성추행 피해자의 후회..."즉시 호텔방 뛰쳐나올걸"

A씨가 겪은 성추행 피해자의 2차 피해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박 전 감독의 엄벌을 요구하는 탄원서를 선수들에게 받으려 하자, 'A씨가 먼저 옷을 벗었다', '단둘이 방에서 있었던 일인데, 알게 뭐냐'는 소문들로 다른 팀 선수들이 선뜻 서명해주지 않았다.

구단의 눈치를 보느라 사건의 전말을 알면서도 탄원서에 동의를 해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만 남긴 동료도 있었다.

A씨는 구단과 한국여자농구연맹(WKBL)에 대해 "박 전 감독을 고소하고, 문제가 커지는데도 어떤 도움도 주지 않았다"며 실망감을 숨기지 않았다.

그는 "박 전 감독이 연맹에서는 제명됐지만 실업팀이나 대학팀 감독으로 복귀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따져 물었다. 또한 구단을 향해 "유죄판결이 나고서야 공식 사과했다"며 "만약 내가 고소하지 않았다면, 구단은 박 전 감독에게 어떤 조치를 취했겠냐"고 말했다.

A씨는 농구계 거물의 치부를 건드린 데 대해 후회하지 않을까?

"후회하지 않는다. 단지 박 전 감독의 호텔방을 뛰쳐나오지 못한 것이 후회될 뿐이다. 감독의 말이라 거역할 수 없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왜 그의 방에 있었나' 싶다. 그냥 뛰쳐나올 걸…."

그는 "이렇게라도 하지 않았으면, 이번 사건도 그냥 넘어갔을 것 아니냐"면서 "지금까지 박 전 감독한테 당한 선수들처럼, 추한 소문의 장본인으로만 남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이런 사건을 그냥 넘겼다면, 박 전 감독은 계속해서 나를 자신의 '노리개'로 삼았을 것"이라며 "막말로, '몸 주고, 게임 주는' 이상한 관계가 됐을지도 모른다"고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A씨는 "이번 일로 다른 여자팀의 남자 감독들이 조금이라도 선수들을 대할 때 조심했으면 좋겠다"며 "이런 문제가 스포츠에 없어지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는 "선수의 실력보다는 감독과의 연줄이 우선인 현실이 부끄럽다"고 말했다.

박명수 전 감독을 마주친다면...

그의 복귀시기를 묻자, A씨는 "해야 하는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A씨와의 인터뷰 한 시간 동안 그의 휴대전화는 쉼없이 울렸다. 동료 선수들이 팀으로 복귀하라고 권유하고 있었다.

그는 지난 6월초 운동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팀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조직생활은 쉽지 않았다. 농구계의 핫이슈가 된 이번 사건은 그의 주변을 계속 맴돌았다. 있지도 않았던 괴소문들이 선수들의 입을 통해 전전하다 끝내 그의 귀로 들어왔다.

그는 "소문이나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유치하지만, 그것을 버텨내기는 쉽지 않았다"며 휴식을 선언했다. 고등학생 당시 발목 부상으로 1년간 농구공을 놓은 뒤 처음으로 장기간(3개월) 코트를 떠난 것이다.

A씨는 "국내 구단생활이 싫어졌다"며 "물론 좋은 사람들도 많이 만났지만, 이제는 아무도 못 믿겠다, 억지로 돌아가서 농구를 즐길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A씨의 가족은 "아이가 단체생활에 질린 것 같다"며 "지난 2005년 11월 프로에 입문한 뒤 학교 다닐 때와는 많이 변했다"고 말했다. 학생 때는 관중석에 앉아있던 가족들에게 손도 흔들고 여유를 보였는데, 프로에 입문한 뒤 농구장에서의 여유는 사라졌다고 전했다.

'군기'가 잔뜩 들어간 셈. 팀 막내라 방청소 등 팀의 뒤치다꺼리를 도맡았고, 전지훈련-해외경기-또 훈련 등을 거치며 쉴 새도 없었다. 경기에서 지는 날이면, 경기장 밖에서 기다리던 가족들과 눈 한 번 마주칠 수 없었단다.

A씨는 "농구 강국인 미국에서 공부하고 싶다"며 "전지훈련 때문에 미국을 다녀왔는데, 체계적으로 가르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고 말했다. 또한 "미국은 프로 선수가 되면, 조직생활에 그다지 얽매이지 않았다"며 "되레 지금 공부할 시간이 주어진 것 같다"고 말했다.

A씨는 한 시간 동안 그의 속내를 거침없이 털어놓았다. 그러다 "박 전 감독을 다시 만난다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마지막 질문에 한동안 답을 하지 못했다. 그는 "아마 내가 피할 것 같다"고 짤막하게 답했다.

한편 A씨와 가족들은 박 전 감독에 대한 민사소송을 제기할 예정이다.
#박명수#성추행#우리은행#피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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