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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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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나는 똑똑한 아이였던 적이 없다. 어느 집 애가 똑똑하다고 소문이 나는 근원지는 학교 선생님, 일가친척, 동네 아줌마, 만화방이나 점방 아저씨 아줌마들인데 단 한번도 똑똑한 아이라는 평을 받은 기억이 없다. 생일이 빠른 사촌언니랑 4학년 때부터 계속 한반이 되면서 매사 야물딱진 언니하고 어찌나 비교가 되는지…. 결국 멍청한 아이의 이미지로 굳어져버린 전설 같은 이야기가 내 유년의 상처까지는 아니지만 지금도 종종 씁쓸한 미소를 짓게 한다. 가령 '아, 나는 원래부터 좀 멍청한 인간이지'하는 기분이 훌쩍 들 때라든가…….

그래서인가 한 직장에 근무하는, 대단히 박식하며 철학적 깊이가 느껴지는 혜안으로 세상을 헤아릴 줄 아는 K선배가 주변사람들한테는 어딘지 좀 멍(청)한 사람의 이미지로 굳어져 있는 게 크나큰 위로가 된다. 똑똑한 인간과 멍청한 인간의 차이가 능력이나 재능이나 열정 내지 의욕의 차이는 다행히 아니라는 결론을 끌어낼 수 있어서일 거다. 그 사람이 가진 성향이랄지 세상을 감지하는 주파수랄지 암튼 시선의 끝이 가닿는 데가 현실의 세상인지 안으로 감싸인 비현실의 세상인지가 그를 똑똑해 보이거나 멍청해 보이게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멍청해 보였던 나를 뒤늦게 변호하는 건 오늘 내 손에 들려있던 책, <자유의 감옥>이 환기한 세계의 기시감이 어린 내 모습위로 어른거려서이다. 아니 그보다는 사실 이 책 서문에서 미하엘 엔데가 '우리의 현실과 평행한 또 하나의 현실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쓰려 했다'고 (남들한텐 몰라도 나한테는) 머리를 꽝 울리는 소릴 해놓고 있어서이다. 실로 나는 '현실과 평행한 또 하나의 현실'을 동화와 만화 같은 형태로 바람직하게 만나기 전, 판타지에 아주 깊이 중독된 아이였다.

국민학교 2학년 때, 우리집은 개구리산이라 불리던 동네에서 남문구 굴다리 안동네로 이사를 했는데 나는 어찌된 건지 그 동네 창신국민학교로 전학을 안하고 거제국민학교에 계속 다녔다. 등하굣길을 합하면 무려 두 시간을 혼자 공장골목과 철길과 찻길을 따라 걸어다녀야 했는데, 힘들거나 심심하거나 지루하지 않았고 정말 좋았다. 나는 날마다 마음껏 상상과 공상의 세계를 날아다녔다. 월례고사 90점 밑으로 틀린 개수만큼 맞아야 하는 일도 잊고, 미술준비물을 챙기지 못한 걱정도 잊고, 낱말뜻풀이 숙제를 세 바닥 다 못채운 것도 잊고, 칠판 앞에 서서 문제를 풀어야 하는 그날의 산수시간 같은 것도 까맣게 잊었다. 나는 내가 만들어 낸 갖가지 캐릭터와 동식물, 흉가와 무덤과 해적선과 귀신도깨비와 함께 마법으로 이루어지는 현실을 엮어나가며 그 속에서 완전히 행복했다.

당시 나는 나만의 현실이라는 것이 판타지 세계라는 것을 몰랐지만, 내가 재창조한 현실세계의 은유로 눈앞의 현실을 덮을 수도 있다는 판타지의 원리를 본능적으로 눈치 챘던 듯싶다. 다만 그런 판타지로 눈앞의 현실을 영원히 덮을 수는 없었다는 게 문제였다. 다른 사람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을 감지하기 위해 조율한 주파수와 그 주파수에 잡히는 현실을 살기위해 터득한 방식이 등하교 두 시간에서 공부시간과 쉬는 시간으로 연장되었을 때, 급기야 담임선생님으로부터 '엄마 댕기가시라 해라'는 명령이 떨어지게 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당시 내가 펴낸(?) 몇 편의 만화(공책 한 페이지를 6칸 내지 8칸이 되게 해서 한권에 한 작품을 담았다. 진짜 만화책처럼 애들이 돌려보고 재밌다고 했는데 내가 왜 대성한 만화가가 못되었는지……)는 말 그대로 날아다녔던 내 공상과 상상의 판타지물이었다. 이러니 '어떤 이야기를 할 때 그것에 맞는 특별한 목소리를 내야만 그 말은 진실이 된다'는 미하엘 엔데의 말은 내 경우 형식이 내용을 결정한다는 장르론을 넘어서는 탁견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시간의 속도에 쫒기는 현대인의 삶을 그린 그 유명한 동화 <모모>의 작가이기도 한 미하엘 엔데는 <자유의 감옥>이라는 이 소설집에서 (어린 내가 그랬듯) 그의 주파수로 감지한 여덟 세상을 우리 앞에 펼쳐놓는다. 표제작 <자유의 감옥>을 비롯해 8편의 중단편에서 다루고 있는 세계는 선택 앞에서 갈등하는 인간의 자유의지며, 시공간적으로 현실과 유리된 세상에 대한 사유이다. 그리고 그 사유를 기발하고 자유롭게 풀어놓는 공상과 상상의 유희인 동시에 그 유희를 통해 끌어내는 삶의 근원에 대한 천착과 미로찾기와도 같은 자아 정체성에 대한 질문과 고민과 모색이다.

이 가운데 '미스라임의 동굴'은 판타지소설의 출발점이 어때야 하는지를 자문케 하여 대어를 포획한 기분에 젖게 한 소설이다. 지하묘지 동굴에 사는 그림자들의 이야기라는 설정자체가 독자를 한순간 사로잡는 판타지의 위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이 작품을 쓴 게 엔데가 일흔이 넘어서라고 하는데 '누구나 달고 다니는 그림자는 육신이 죽을 때 따로 떨어져 나와 어딘가로 가지 않을까'라는 상상력에서 소설이 빚어졌다고 하니 그 나이에 어떻게 저런 착상을 했을까 감탄치 않을 수 없다.

소설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주인공 이브리의 동선을 쫓아간다. 이브리는 미스라임 경계 너머를 꿈꾼다는 점에서 동굴에 사는 그림자와는 다른 존재이다. 미스라임 동굴의 가장 큰 규칙은 지하묘지인 동굴만을 유일한 현실세계로 인정하는 것이며, 그 너머에 호기심을 가지거나 상상을 하는 건 어리석고 불온한 생각이다. 사실 그림자들은 '생각'이라는 것을 할 필요가 없다. 그들을 지배하는 보스의 목소리가 그들의 '생각'을 대신해서 지시해 주고 있으니까 그들은 "너는 지금 일어나서 너의 일터로 가길 원하고 있어." "너는 자기를 원하고 있어" "너는 왼쪽으로 걸음을 옮겨 계단을 내려가려고 해" 식으로 내려지는 지시를 따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경계 너머를 꿈꾸는 이브리는 자신의 생각을 대신하는 보스의 목소리를 거부한 끝에 그림 한 장을 완성하고, 그 완성된 그림이 '창문'이라는 것을 '기억'해 낸다. '생각'처럼 무언가를 '기억'해 내는 것 또한 동굴안 그림자들에게는 낯설고 불온한 행동이다. 동굴의 지배자가 그림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존재방식에 대한 일체의 의문을 지우고 경계너머를 기억하게 할 기억을 지우고 노예상태로 하루하루를 살아야 하는 일상의 고통을 지우는 약을 복용하게 해왔기 때문이다.

바깥을 바라보는 시선의 출발점인 창문을 기억해 내면서 동굴의 출구를 찾는 이브리의 탐색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그 길찾기에서 레프요탄이라는 여자의사를 만나게 되는데 이브리는 그녀에게 속아 유리온실의 정비를 맡게 된다. 그곳에서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 붓던 어느 날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브리는 동굴의 설계자인 노인을 만나게 되고 보스인 베히모트와 여의사 레프요탄이 공범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분노한 이브리는 기억과 고통을 잊게 하는 약의 생산장인 유리온실을 때려 부순다. 그리고 그림자들에게 베히모트와 레프요탄이 어떻게 그들을 통치해 왔는지를 알리고 바깥세상으로 탈출하자고 설득한다.

마침내 이브리는 위대한 모세처럼 노예상태이던 그림자들을 이끌고 엑서더스를 감행하는데, 소설이라는 게 그렇듯 도중에 베히모트와 레프요탄 일당과 딱 마주친다. 거기서 베히모트가 늘어놓는 연설이 가관이다. 들어보면 알겠지만 전신에 스멀거리는 가려움을 불러일으키다 못해 아주 우스워지는 지경에 이른다.

"……결정해. 쟤(이브리)는 이상체질로 약이 듣지 않는 거야. 저 혼자 고통을 당하는 게 억울해서 너희 그림자들을 이끌고 탈출하려는 거지. 너희들, 저 별종같이 신세망치는 길로 들어설래? 너희들의 유일한 은신처인 이 세계에 남아 지금의 상처를 치료하며 모두 잘사는 길로 들어설래?"

한국 독자의 귀에는 낯설래야 낯설 수 없는 연설을 들은 뒤 그림자들이 어떻게 했을 것 같은가. 약을 공급받지 못하자 슬금슬금 되살아나는 기억과 스스로의 선택을 강요하는 생각과 그리고 죽은 듯이 빠져드는 잠으로 인해 잊을 수 있었던 고통을 경험한 그림자들의 선택은 뜻밖에도(혹은, 아니나 다를까) 베히모트의 지배에 모든 것을 맡긴 채 동굴에 남는 거다. 그들은 자신들이 당하는 고통에 겁을 먹고서 진실을 위한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는 이브리의 말에 의혹과 증오를 되돌려 보낸다. 그림자들이 보스의 지시를 따르는 마지막 장면을 그대로 옮겨본다.

결정을 내린 그림자들은 각목과 쇠망치를 들고 이브리에게로 향했다. 그들은 모두 고개를 돌린 채 빛이 들어오는 구멍 안으로 이브리를 밀어넣었다. 그의 몸이 구멍을 넘는 순간 터져나오는 날카로운 외침을 모든 그림자가 들었다. 그러나 그것이 황홀해서 내지른 기쁨의 탄성이었는지 최종적인 절망감 때문에 내뱉은 슬픔의 탄식이었는지 그 누구도 알 수 없었다.


책을 덮으면서 궁금하긴 했다. 어차피 기존사회에 청진기를 갖다대고 권력욕과 기득권이 강요하는 규율에 펜을 휘두르려고 했다면 미하엘 엔데는 왜 하필 판타지소설을 고집했을까. 진짜 인생을, 진짜 현실을 비판하고 메스를 가하는 게 부담스러웠던 게 아니라면 '어떤 이야기를 할 때 그것에 맞는 특별한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그에게 있어 판타지의 세상이야말로 진짜 세상이고 진짜 현실이어서는 아니었을까.

판타지란 결국 실제 존재하는 세상과 차원이 다른 공상이나 상상의 산물이 아니라 현재의 시간과 공간으로 존재하는 세계와 각자의 주파수를 통해 감지되거나 잡히는 세계 사이에 놓인 통로 같은 건지도 모른다. 그 통로의 존재를 의식하든 망각하든 혹은 고의로 무시하든 시공간적으로 묶인 한 존재가 비밀스럽게 끌어안고 살아가는 존재의 슬픈 이면 같은 것, 또한 현실의 존재를 향해 끊임없이 손짓하고 마음에 소용돌이를 일으키는 우리의 현실과 평행한 또 하나의 현실이 바로 판타지일수도 있다는 거다.

그나저나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동안의 나는 실제의 현실에 존재하는 나일 것이며 동시에 시공간의 제약에서 한 끗 정도 비껴 앉아 나의 판타지를 보고 있는 나이기도 할 거라는 생각이 드는 게 아무래도 판타지 중독 증상이 아닐까 슬며시 걱정된다. 레프요탄이 유리온실 이야기를 하는 장면에서 연봉이야말로 '지금 여기'에서처럼 다른 곳에 존재할 나를 잊게 하는 묘약일 거라는 말에 이마를 칠 수밖에 없는 현재의 나는 어린시절의 나와 달리 제대로 멍청한 방식으로 살 엄두조차 못내고 있는 형편이긴 하지만 말이다.

자유의 감옥

미하엘 엔데 지음, 이병서 옮김, f(에프)(2016)


#미하엘 엔데#판타지#자유의 감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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