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 지난 3월 14일 미국 뉴욕에서 열린 이민자의 날 집회 장면.
ⓒ 하승창

미국의 231번째 독립기념일 전야제로 불꽃놀이가 한창이던 지난 3일 댈러스시 인근 파머스 브랜치시에는 정적이 감돌았다. 축제에 참석하기는커녕 주민들 중에는 휴일을 맞아 이사를 가려고 짐을 싸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이른바 '용광로(melting pot)'라는 다인종 국가 미국에서 다른 사람들과 섞이지 못하는 히스패닉계 불법체류자들이다.

파머스 브랜치시는 5월 22일 지방자치단체로서는 처음으로 자체적인 불법체류자 단속 조례안을 통과시켰다. 이 조례안의 골자는 불법체류자들과 임대 계약을 맺는 아파트에 벌금을 물리는 것이다. 또 임대 희망자들은 자신의 합법적인 신분 사항을 증명해야 새 계약을 할 수 있다. '이민자의 나라' 미국의 생일에 파머스 브랜치시의 아파트 주민들이 짐을 싼 이유다.

잠재적 범죄자·탈세자 취급받는 이민자

현행 연방 이민법과 배치된다는 이유로 파머스 브랜치시 조례안의 본격적인 시행은 미뤄졌지만, 미국 곳곳에서는 이와 비슷한 반이민 법안이 봇물을 이루고 있다. 미국 역사를 살펴보면 반이민 정서는 주기적으로 이어져왔다.

1980~90년대 경제호황으로 잠시 고개를 숙인 반이민 정서는 9·11 이후 외국인에 대한 배타적 태도와 멕시코 불법월경자 문제 등과 겹치면서 다시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 최근 부시 대통령이 의욕적으로 추진하던 새 이민법이 상원에서 부결된 것은 이런 정서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사실상 미국의 경제를 떠받치고 있는 1200만 불법체류자들을 구제하기 위한 새 이민법이 지난달 28일 결국 상원을 통과하지 못했다.

부시 대통령이 이 법 제정을 적극 추진하고 공화·민주 양당 지도부가 5월 16일 전격 합의하면서 미국 내 이민자들에게 서광이 비치는 듯 했다. 하지만 100명의 상원 의원 중 60명 이상이 찬성해 무난히 통과되리라던 당초 예상과 달리, 찬성이 46표에 그쳐(반대 53표) 법안 통과는 무산됐다.

법안의 골자는 현재 미국에 있는 불법체류자들의 존재를 인정하고 이들에게 합법적인 체류 자격을 부여하되, 향후 불법체류자 증가를 막기 위해 국경 경비와 불법체류자 고용 단속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는 법을 어긴 불법체류자들을 사면하는 조치로, 법치국가 미국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반대한 공화당 보수 성향 의원들의 벽을 넘지 못했다. 공화당 의원들은 법치주의를 들먹였지만 실질적으로는 불법체류자를 포함한 외국 이민자들을 잠재적인 범죄자·탈세자, 복지기금 무료 수혜자 등으로 인식하는 미국 지도자들의 정서가 반영된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 6월 28일 해리 리드 상원원내대표(앞쪽)와 패티 머레이 의원이 워싱턴 국회의사당 기자회견장에 도착하고 있다. 상원은 이민법개혁안이 투표에서 46-53으로 부결되자 이 법안을 더 이상 고려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 EPA=연합뉴스

경쟁하듯 반이민법 제정... '신생아 자동 시민권'도 위태

연방 정부 차원의 반이민 정서에 부응해 각 주에서도 반이민법 만들기에 경쟁하듯 나서고 있다. <워싱턴포스트>가 미 전국 주의회 협의회(NCSL) 자료를 근거로 보도한 바에 따르면, 지난 4월까지 1년 동안 각 주의회에서 추진된 이민 관련 법안이나 결의안은 1169건에 이른다. 이는 평년의 2배 가까이 되는 수치로 대부분 불법체류자 단속 등 반이민 법안이라고 이 신문은 전했다.

이들 법안에는 불법체류자들의 고용 차단, 복지 혜택 축소, 단속 강화, 의료 혜택 제한, 비즈니스 불허, 운전면허증 발급 제한 등의 조치가 포함돼 있다.

실제로 오클라호마주는 불법체류자 고용주에게 막대한 벌금을 물리도록 했으며, 연방 이민국 소관이던 불법체류자 단속을 자치 경찰이 담당할 수 있게 했다. 오클라호마주의 사례는 반이민 단체들에게 본보기로 환영받으며 네브래스카주와 아이다호주에서 비슷한 법률을 추진하는 밑거름이 됐다.

메릴랜드주에서는 불법체류자 학생들도 주거주민 혜택을 받아 학비를 저렴하게 낼 수 있도록 하는 법안이 기각됐다. 또 버지나아주는 불법체류자를 돕는 자선단체에 대한 정부 지원을 중단하는 법률을 검토하고 있다.

불법체류자를 겨냥한 이들 법안 외에도 모든 외국 이민자들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반이민 주장도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지금까지는 미국에서 태어나기만 하면 자동적으로 미국 시민이 됐다. 하지만 2005년 연방 하원에 발의된 '시민권 개혁 법안'에는 미국에서 태어났더라도 미국 시민이 될 수 있는지 여부는 부모의 신분에 따라 차등적으로 결정되도록 규정돼 있었다. 비록 이 법안은 회기 만료로 기각됐지만, 이런 주장은 미국 정치권에 끊임없이 등장하고 있다.

미국 각 주의회가 2007년 회기 동안 마련한 이민 관련 법안

내용

법안 수

관련 주 숫자

복지혜택

149

39

각종 신분증

48

22

운전면허증

69

31

교육

105

30

고용

199

41

건강·의료

92

23

인신매매

63

28

법 집행

129

30

법률서비스

20

10

인허가

83

28

선거

46

22

기타

53

24

포괄적 내용

9

5

결의안

104

27

합계

1169

 

ⓒ 전국 주의회 협의회(NCSL)

미국을 관통하는 반이민 정서의 역사

'버지니아 총기난사 사건'이 일어났을 때 미국은 한국의 조문단 파견을 거부했다. 미국 정부는 "조승희는 어릴 때 이민 온 사람으로 이민자의 나라인 미국 시민과 다름없기 때문에 한국과는 관련 없는 일"이라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하지만 이민자로 구성됐다는 미국에선 이민자를 적대시하는 정서가 주기적으로 나타났다. 1840년대 가톨릭교도인 아일랜드 이민자가 대거 미국에 들어오자 미국인들은 "교황이 개신교 국가인 미국을 접수할 것"이라며 이들을 배척했다. 이들은 '미국인의 당'을 결성하고 대선에 도전하는 등 반이민 정서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기도 했다.

미국은 19세기 말 서부 개발을 위해 대륙 횡단 철도를 놓으며 중국인 노동력을 십분 활용했다. 하지만 미국은 1882년 '중국인 배제 법률'을 만들어 중국인의 사회적 권리를 제한하는 이중성을 보였다.

20세기에 들어서는 독일 이민자들에게 1차 세계대전의 책임을 묻고 영어 대신 독일어를 고집한다는 등의 트집을 잡아 이들을 박대했다. 같은 유럽계 백인임에도 미국에서 열등 민족으로 취급받던 이탈리아·폴란드인 이민자의 애환은 영화 <대부>에 잘 나타나 있다.

1970년대에는 베트남 몰락과 쿠바 개방으로 미국에 몰려든 아시아계와 라틴아메리카계 이민자들이 이전에 차별받던 이민자의 후손들에게 다시 차별받았다.

미국은 자국의 지속적인 경제 성장을 위해 1993년 멕시코와 북아메리카 자유무역협정(NAFTA)을 맺었다. 멕시코의 싼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한 미국의 의도대로 멕시코인들이 대거 미국으로 유입됐다.

하지만 최근 미국의 반 이민 정서는 주로 멕시코계인 히스패닉을 겨냥하고 있다. 미국 본토가 공격받은 9·11 사건은 이런 반이민 정서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미국인들은 중요 공식 행사 때마다 '아메리카 더 뷰티풀'이라는 비공식 국가를 부른다. 이 노래는 미국을 '신이 준 나라'로 규정할 뿐 인디언에게서 빼앗은 땅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좋은 기후로 인구가 계속 증가하고 있는 캘리포니아, 텍사스, 플로리다주 등 이른바 선벨트 지역이 옛날 멕시코에게 강탈한 땅이라고도 하지 않는다.

중국 대륙만한 국토를 지녔으면서도 인구는 3분의 1도 되지 않는 이 '이민자의 나라'는 이기적이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나라다.

▲ 중국인 이민자들을 수용·억류했던 샌프란시스코의 '앤젤 아일랜드' 이민 관리소가 있던 곳. 1940년 이민 관리소가 화재로 전소됐고 남은 건물은 이민자들이 수용됐던 막사다. 지난해 6월 당시 공사 중이었다.
ⓒ 윤새라

태그:#미 이민법, #반이민 정서, #9·11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