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귀국했다. 아침 비행기인 데다 어제 공항에서 테러와 관련된 것이 아닌가 하는 물건이 발견되었다는 뉴스 때문에 공항 검색이 심하지 않을까 싶어 서둘러 나섰다. 평소보다 검색이 좀 심하기는 했지만 생각보다 밀리지는 않았다. 갑작스런 귀국이라 애틀란타를 경유하는 비행기표를 인터넷에서 겨우 구했다.
미국 국내선을 한 번 이용하는 것이라 그런지 어수선하기 그지없다. 카운터에 앉아 있는 사람이 나이 지긋한 아줌마였는데 아주 친절하게 해주는 바람에 오래 기다린 불편함이 싹 가신다. 그동안 입었던 옷이며 갖고 있던 책이며 등속을 이민가방 두 개로 채워서 가지고 가는 데 무게가 상당하다. 알아서 할 거니까 걱정하지 말라지만 어디 부모 마음이 그런가? 몇 번이고 당부했다.
아이는 아빠가 미국 와서 자기랑 살면서 없던 잔소리가 생겼다고 눈을 흘긴다. 길게 늘어섰던 줄이 어느 새 줄더니 들어 갈 시간이다. 이 녀석 원래 눈물이 많지만 어느 새 눈물이 흐른다. 꼭 안아주었다.
검색대로 향하는 아이를 두고 돌아서는데 웬지 마음이 좀 허전하다. 앞으로 한달이지만 혼자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허전한 마음이 밀려오는 것을 어쩔 수 없다. 아이가 고등학교에 들어갈 때까지 중학교 3학년 때 학원에 다니는 아이를 밤늦게 데리러 가는 일, 경실련에서 일할 때 매주 두 번인가? 탁아소에 다닐 때 데리러 다닌 일 외에 시간을 함께 보낸 일이 그러고 보면 거의 없다.
아이가 자라면서 늘 입에 달고 있던 말이 동생 낳아달라는 졸랐던 것과 자기가 인터넷에 푹 빠져 있거나 친구들 일이라면 열일 제치고 쫓아나가는 게 다 부모가 자기에게 그만큼 시간을 주지 않았던 때문이란다. 초등학교 시절에 집에 가면 당연히 엄마 아빠가 없을 줄 알면서도 혹시나 엄마가 혹시나 아빠가 자기를 맞아 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늘 갖고 있었다고 한다. 물론 언제나 우리는 그 기대를 배반했다.
지난 1년은 그런 시간을 되짚어 보는 시간이었다. 아침에 깨워서 학교에 보내고 오후면 데리러 가고 저녁에는 함께 앉아 요리도 하고 식사도 하는 시간을 한국에서의 내 생활에 비추어 보면 상상키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초반에는 나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더니 뒤로 갈수록 친구들이 많아지고 밖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그 친구들 모두를 여기저기 데려다 주는 일도 내 일이었다. 데려다 주고 전화 오면 다시 가서 데려오고, 가까운 거리야 걸어 다니지만….
가만히 보면 맨 남자와 관련한 이야기지만, 나름 무지하게 심각하다. 언제나 자기가 좋아하는 남자 아이들은 다른 여자친구가 있는 것 때문에 속상해 하더니 여기서도 그렇다. 어쩌다 보니 본격적인 연애 상담에 들어가기도 했다. 상대의 감정을 고려하지 않거나 서로 느낌을 공유하려는 노력이 없는 것이 문제다, 어쩌다 등등.
결국 마지막에 아이를 좋아하는 남자아이도 생겼고, 아이 혼자서 좋아하던 남자 아이도 자기에게 관심을 가진 것이 확실하다는 느낌을 스스로 갖게 되면서 아이는 더 밝아지고 활발해졌다. 떠나기 전날 10여명의 친구들이 조지워싱턴 브리지 아래 허드슨 강변에서 바비큐 파티를 해주었다. 짐을 챙길 여유도 없을 정도로 아이는 밤늦게 들어 왔다.
아이는 이곳을 떠나기 싫어했지만 내가 돌아가야 하니 별 방법은 없다. 긴 시간 아이하고 마주 앉아 미국에 남아 공부할 것인지, 한국에 돌아갈 것인지를 두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쨌든 아이가 한국에 돌아가기로 결정했지만 어떤 결정을 했는가 보다, 한국에서는 그럴 시간적 여유도 없이 지나왔지만, 어떤 결정이 자신에게 좋을 지를 두고 아빠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는 게 더 좋은 일이지 않았을까 싶다.
지난 1년, 아이에게는 맛볼 수 없었던 해방감이 주어졌던 시간이었다. 한국에 있었다면 밤10시, 12시까지 학교에 매여서 책상 앞에만 앉아 있어야 했을 텐데, 오후 3시면 끝나는 수업을 마치면 학교에서 하는 풍물 연습을 하거나 배우고 싶었던 재즈댄스를 배우거나 보더스나 스타벅스에 가서 친구들 하고 내내 수다를 떨었다.
주말이나 휴일이면 친구들하고 뉴욕으로 나가서 박물관을 가거나 타임스퀘어를 돌아다니기도 하고, 쇼핑몰에 가서 구경하거나 카페에 앉아 밤늦도록 이야기 하다가 들어오고 집에 앉으면 마음껏 인터넷을 항해했다. 가끔은 동네 공원에 모여서 남자 아이들과 어울려 운동을 하거나 수다를 떠는 일도 많았다.
그런 얘가 한국에 돌아가면 어떻게 수업을 쫒아갈까 싶어서 가져 온 수학 정석 책을 들여다 보도록 하기 위해 용돈으로 구슬려 보기도 했지만 뭐 관심 밖이었다. 수학이야 여기서는 자기가 제일 잘하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한국에서 수학은 정진이가 잘하는 과목은 아니었다. 영어를 제외하고는 웬만한 과목은 한국에서 배우던 것 보다 어려운 것이 아니어서 수업이 자기에게 부담이 되는 일도 없고 하니까 학업에 대한 부담도 상대적으로 적은 1년이었다.
공부하고는 멀었던 1년이었지만 아이한테는 좋은 경험이 되었을 것이라고 믿는다. 아이에게뿐 아니라 지난 1년은 내게도 소중한 시간이었다. 나는 나대로 밖으로 돌고, 아이는 아이대로 입시공부 한다며 학교에 매여 있었으면 자칫 멀어질 수도 있었던 아이와 더 가까워질 수 있는 시간이었으니까. 어쩌면 거의 아무 생각 없었다고 해야 할 '가족'에 대한 생각을 아이를 먼저 보내며 되짚어 보게 된다. 함께 시간을 보내고 함께 이야기 나누지 못하면 아무리 가족이라도 남과 다를 바 없다는 아주 간단한 사실을 새삼 되새겨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