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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천산 오르는 등산로 옆, 휴게소마냥 서 있는 강천사의 모습.
ⓒ 서부원
전라남도와 전라북도 사이 '작은 금강산'이라는 강천산이 품 좋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초보 등산객에게는 그다지 가파르지도, 또 지루하지도 않은 천혜의 등산로를 제공하고, 그저 더위를 피할 목적으로 온 관광객에게는 맑고 시원한 계곡물로 보답해 주는, 널리 알려진 관광지입니다.

산과 계곡이 유명해서인지, 산 이름의 '강(剛)'은 금강산(金剛山)에서 따 왔고, 시원한 계곡물을 상징하듯 '천(泉)' 자를 붙여 놓았습니다. 그렇듯 '산 좋고 물 맑은' 곳에 번듯한 절 하나쯤 서 있기 마련입니다. 산행이 시작될 만한 평평한 산책로의 끝에 어김없이 강천사가 아늑하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매표소에서 시원한 물소리 뿜어내는 계곡을 따라 강천사에 이르는 길은 즐겁고 편안합니다. 찾는 이들을 위한 지방자치단체의 투자와 배려가 있어 더욱 그렇습니다. 길을 걷다 쉬어갈 만한 곳마다 놓인 벤치도, 맨발로 걸을 수 있도록 길에 뿌려놓은 고운 모래도, 소소하게는 화장실 '간격'을 알려주는 팻말에 이르기까지 자상함이 곳곳에 배어 있습니다.

▲ 강천사는 '계곡'이라는 이름이 뒤에 따라 붙지 않으면 무척 어색한 절입니다.
ⓒ 서부원
▲ 등산로를 따라 인공으로 조성한 폭포와 벤치가 여럿있다.
ⓒ 서부원
또 그 길을 따라 서 있는 진초록의 나무들은 하늘을 가려줍니다. 숲이 울창한 까닭에 길도, 계곡물 빛도 모두 초록색을 띠고 있습니다. 새소리, 벌레소리가 들려올 법하건만, 우레 같은 물소리에 묻혀버리고, 찌는 듯한 무더위가 '보고 듣는' 것만으로도 너끈히 식혀지는 신비로운 경험을 하게 됩니다.

가는 길목마다 족히 이십 미터는 돼 보이는 폭포 여럿을 만나게 됩니다. 아무리 가파른 산세를 타고 났다고 해도 이렇듯 많은 폭포를 이룰 수는 없는 법, 나중에 알고 보니 자연 암벽을 이용해 만든 인공 폭포라고 합니다. 바람이라도 불라치면 등산로에까지 시원한 물보라를 끼얹어주는, 또 하나의 볼거리이자 배려입니다.

▲ 한두 번이라도 산행을 해본 사람(특히 여성)이라면 화장실의 소중함을 안다. 화장실 '간격'을 적어놓은 팻말이 등산로 곳곳에 서 있는데, 지자체의 배려를 알 수 있다.
ⓒ 서부원
▲ 바스러진 옛 석등 뒤로 새뜻한 새 것이 세워져 있다. 강천사의 어제와 오늘을 보여주고 있다.
ⓒ 서부원
이윽고 강천사에 다다라 계곡물과 함께 한 시원한 산책을 마쳤습니다. 절은 어린 아이의 키 높이로 쌓은 허튼 흙담을 경계로 산책로와 갈라 서 있습니다. 담 넘어 훔쳐보듯 절 경내를 들여다 보면, 석등과 탑 등 몇몇 석물들과 일자로 멋없이 늘어선 새뜻한 건물 몇 채가 고작입니다.

전하는 말로는 한때 승려 천 명을 거느릴 정도로 대단한 거찰이었다고 합니다. 멀리로는 임진왜란, 가까이로는 6·25 전쟁의 큰 난리를 겪으면서 사세가 기울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석축부터 건물까지 절 안의 모든 것이 새뜻한 것은 그런 까닭입니다.

그래도 절의 험난한 여정을 함께 바로 곁에서 지켜봤을 옛것들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온몸이 상처투성이인 채 오롯이 버티고 선 5층 석탑과 원형을 알 수 없이 바스러져 있는 석등과 괘불대가 경내 한쪽에 비켜 서 있습니다.

▲ 스러진 괘불대 위에 누군가의 간절한 바람을 담은 수많은 '아기 돌탑'이 정성스레 쌓여있다.
ⓒ 서부원
가만히 생각해 보면 버려진 듯 볼품없는 이런 것들에 훨씬 더 정이 갑니다. 세월의 풍상에다 난리통의 상처까지 품은 예스러운 석물들에서 느끼는 맛은 남다른 데가 있습니다. 새뜻한 것, 화려한 것, 반듯한 것, 뭐 이런 것들은 빛으로, 모양으로 시선을 끌긴 하지만, 그저 그렇다 싶을 뿐이지 특별한 느낌을 주지 못합니다.

그런 탓인지 그들과는 아무런 '대화'를 나눌 수도 없고, 굳이 카메라에 담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습니다. 눈으로 한 번 휙 스쳐 지나치고 말 뿐입니다. 차라리 아무런 보살핌도 받지 못한 채 이끼가 덕지덕지 낀 부서진 기와 파편과 탑, 석등의 부스러기들을 한 번 더 쳐다보게 됩니다.

▲ 강천사에 유일하게 '멀쩡하게' 남은 옛 것, 강천사 5층 석탑. 그나마 6·25 전쟁 당시 맞은 총탄의 흔적이 이곳저곳에 또렷이 남아있다.
ⓒ 서부원
예전에 없던 것도 생겼습니다. 절의 한가운데 하얀 돌 난간을 두른 '망배단'이 그것입니다. 신라 말 도선 스님이 관음불을 알현한 자리에 세웠다는 강천사의 창건 설화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관음불의 현신이라는, 산 중턱에 곧추선 바위를 올려다보며 절할 수 있도록 했는데, 불교에 습합된 토속신앙의 냄새가 물씬 나는 곳입니다.

약수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인 후 절 안을 둘러보려니 비구니 스님 한 분이 눈인사를 건넵니다. 주말과 주중을 가리지 않고 밀려드는 관광객들의 소란스러움 정도는 웃으며 넘길 수 있다는 듯 편안한 인상입니다. 차분하고 소담한 절의 분위기를 그대로 닮았습니다.

▲ 절의 창건설화를 안고 있는 관음불의 현신(뒤에 보이는 선 바위)과 경내 망배단의 모습
ⓒ 서부원
사실 수많은 관광객 중 강천사를 보기 위해 오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전남 담양 금성산성을 넘어 강천산을 종주하기 위해 오는 등산객이거나, 입구의 계곡에서 물놀이를 즐기기 위한 피서객이 대부분입니다. 그러하기에 강천사는 등산객을 위한 쉬어가는 휴게소쯤으로 여기기 십상입니다.

그러나 알려진 문화재나 화려한 볼거리는 없지만 오며 가며 우연히 들른 사람들의 발길을 붙드는 것은, 명색이 천 년 고찰로서 고즈넉함과 예스러움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덜 붐비는 평일, 이른 아침이나 느지막한 오후에 찾는다면 이 소담한 절의 분위기에 더욱 매료될 겁니다.

덧붙이는 글 | 비 갠 수요일(11일), 전북 순창 강천사엘 다녀왔습니다. 제 홈페이지(http://by0211.x-y.net)에도 실었습니다.


태그:#전북 순창, #강천사, #강천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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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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