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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 영변 핵 시설.
ⓒ 연합뉴스

북한 영변의 핵시설이 마침내 가동을 멈췄다. 2002년 10월 방북했던 제임스 켈리 당시 미 국무차관보가 고농축우라늄(HEU) 의혹을 제기하면서 시작된 갈등으로 북한이 국제원자력기구(IAEA) 요원들을 추방하고 핵시설을 다시 가동한지 약 4년반만이다.

기다리던 '가동 중단' 소식은 미국을 통해 처음 확인됐다. 미 국무부의 숀 매코맥 대변인은 14일(현지시간) "북한으로부터 영변 핵시설의 가동을 중단했다는 통보를 받았다"고 밝혔다. 현지 언론들에 따르면 그는 "우리는 이같은 진전을 환영하며, 북한에 도착한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의해 가동중단에 대한 검증과 감시가 이뤄지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김명길 유엔 주재 북한대표부 차석대사도 이날 영변 원자로 폐쇄를 미국 측에 통보한 사실을 확인하고 "다음 조치는 불능화 단계가 될 것"이라고 말한 것으로 <미국의 소리(VOA)> 방송이 전했다.

북한이 지난 6일 외무성 대변인이 공언한대로 중유 5만t 가운데 첫 선적분이 도착한 시점에 맞춰 영변 핵시설의 스위치를 내린 것이다. 중유 1차 인도분 6200t을 싣고 울산항을 떠났던 제9한창호는 예정대로 14일 오전 북한 선봉항에 도착했다. 국제원자력기구(IAEA) 대표단은 이날 오후 평양에 도착, 곧바로 영변으로 향했다.

이로써 '2·13 합의'에 규정된 초기단계 조치의 이행은 중대한 고비를 넘겼다. 14일 북한에 들어간 국제원자력기구(IAEA) 요원들이 핵시설 '폐쇄(shutdown)'를 확인하고 봉인하는 절차가 남아있긴 하지만, 지금 분위기로 봐선 큰 어려움 없이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봉인 작업은 2주 정도 걸릴 예정이며, 중유 5만t의 수송이 완료되는 시점도 비슷하다.

방코델타아시아(BDA)에 동결됐던 북한 자금의 송금 문제라는 뜻밖의 '복병'을 만나 3개월 정도 시간을 허비하긴 했지만, 6자회담 틀에서의 북핵문제 해결이 다시 궤도에 올려진 것이다. 이제 관심은 '초기단계 이후'의 과정이 어떻게 진행될 지에 모아지고 있다.

핵시설 '불능화' 연내 실현되나

6자회담 수석대표들은 오는 18일 중국 베이징에서 4개월만에 회의를 재개, '초기단계 이후' 각국이 취할 조치의 구체적 방법과 일정에 대해 논의를 시작한다. 이틀 일정으로 열리는 이번 회의는 초기단계 조치 이행의 '완료'를 전제로 해서 각국이 다음 단계의 구상을 처음으로 꺼내놓는 자리가 될 것으로 보인다.

'초기단계 이후'의 과정은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체제'가 논의와 실천의 두 축을 이룰 것으로 보인다. 송민순 외교통상부장관은 이를 '한 수레의 두 바퀴'라고 표현했다. 어느 한 쪽만이 앞서갈 수 없으며, 하나의 진전이 다른 하나를 견인하는 관계라는 것이다.

핵시설 '폐쇄' 이후 북한이 취할 비핵화 관련 조치와 나머지 6자회담 참가 5개국이 실천해야 할 상응조치에 대해서는 '2·13 합의'에 비교적 명확히 규정되어 있다. 북한은 모든 핵시설의 '불능화(disabling)' 조치를 취하고, 모든 핵프로그램에 대해 완전 신고해야 한다. 그러면 나머지 5개국은 중유 95만t 상당의 경제ㆍ에너지ㆍ인도 지원을 하는 것으로 돼있다.

'불능화'가 기술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뚜렷한 정의는 없다. IAEA의 기술용어가 아니라 다분히 정치적 개념이기 때문이다. 6자회담 한국 수석대표인 천영우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은 김계관 북한 외무성 부상이 "동물로 치면 '거세' 같은 것 아니냐"고 말했다고 소개한 바 있다.

즉 없으면 시설 전체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는 기계 또는 부품을 제거하는 조치라는데 북한도 동의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어떤 기계나 부품을 제거하느냐 라는 각론에 들어가면 입장이 상충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정부 고위당국자는 "우선 이번 6자 수석대표회의에서 불능화의 개념에 대한 공통의 이해를 갖는 것이 필요하고, 이를 기술적으로 어떻게 실현할 지는 각국의 전문가들이 참여해서 논의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6자회담 미국측 수석대표인 크리스토퍼 힐 국무차관보는 올해 안에 '불능화'가 이뤄질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감을 거듭 표시하고 있다. 평양을 다녀온 그의 전망인 만큼 나름의 근거를 갖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이 12일 폭스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북한은 핵무기 프로그램을 제거키로 전략적인 선택을 내렸다고 말하고 있다"고 밝힌 것도 이런 맥락이다.

핵프로그램 신고- 플루토늄 양과 HEU가 초점

'불능화'와 함께 비핵화 실현의 중요한 중간단계가 북한의 핵프로그램 신고이다. '2·13 합의'에 핵 프로그램 신고는 2단계를 거치도록 돼있다. 초기단계에서 신고할 핵프로그램의 목록을 6자회담 참가국들과 협의하고, 이어 불능화 완료 시점까지 신고를 마친다는 것이다.

북한이 과연 현존하는 '모든' 핵프로그램을 '솔직하게' 신고하느냐가 관심의 초점이다. '모든'에는 북한이 그동안 영변 흑연감속로의 폐연료봉에서 추출한 플루토늄과 미국이 제기한 고농축우라늄(HEU) 계획도 당연히 포함된다.

모든 신고가 '솔직하게' 이뤄지면 북한이 가진 '핵능력'이 명확히 드러나게 된다. 그러나 일부라도 감추려고 한다면 문제는 복잡해진다. 특히 신고한 플루토늄의 양이나 HEU 계획 진전도가 미국의 판단과 차이가 나면 '검증' 문제가 제기될 것이고, 그 대상과 방법을 놓고 다시 치열한 줄다리기가 벌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북한의 이러한 '비핵화' 조치에 대한 나머지 참가국들의 '상응 조치'도 중유 95만t 상당의 에너지-경제 지원과 함께 '적대관계 해소'라는 두 축으로 이뤄져 있다. 특히 북한은 미국에 대해 테러지원국 지정 해제와 대적성국 교역법 적용 종료를 강하게 요구할 것이란 관측이 많다.

'2·13 합의'에 테러지원국 지정 해제와 대적성국 교역법 적용 종료 문제에 대해서는 미국이 초기단계 조치 기간 중 '과정을 개시하고 진전시켜 나간다'라고만 돼 있다. 해제ㆍ종료의 목표 시점이 분명하게 정해져 있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북한은 '불능화'와 '핵프로그램 신고'의 상응 조치로 이 문제의 가시적 성과를 요구할 가능성이 높다. 이는 비핵화 진전의 또 다른 '복병'이 될 가능성이 크다.

한반도 평화체제 논의는 4자 틀... '북ㆍ미 군사회담' 제의가 변수

송민순 장관이 수레의 한쪽 바퀴라고 표현한 한반도 평화체제 논의도 북한의 핵시설 폐쇄 조치 완료와 함께 본격적인 틀이 짜여질 것으로 보인다. '9·19 공동성명'과 '2·13 합의'는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체제에 관한 협상을 '직접 관련당사국이 적절한 별도 포럼에서' 가질 것이라고 거듭 확인하고 있다.

여기서 '직접 관련당사국'은 한국전쟁에 참전한 남북한과 미국, 중국 등 4개국을 의미한다는 게 일반적 인식이다. 4개국은 이미 90년대 말에 스위스 제네바 등에서 '4자회담' 형식으로 한반도 평화체제에 관한 논의를 진행했었다. 물론 성사되기까지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북한도 당시 '4자회담'의 틀을 인정한 것이다.

이런 북한의 입장이 그 사이에 변했을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북한은 13일 돌연 '판문점대표부 대표' 명의의 담화를 발표, 한반도 평화와 안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북-미 군사회담'을 열자고 제의했으나, 그 의도는 아직 명확하지 않다.

다만 담화의 형식 등을 보면 지금의 논의 흐름을 뒤집거나 4자 논의 틀을 부정하는 입장표명은 아니라는 관측이 우세하다. 현재의 북ㆍ중 관계 현실에 비춰볼 때 북한이 다시 중국을 배제하려고 무리수를 쓴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며, '남한 배제' 카드도 실현성이 없다는 것을 모를 리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한반도 평화체제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앞서 '군사문제는 북ㆍ미간에 해결해야 할 문제'라는 '원론'을 다시 짚는 차원의 담화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미국도 이 담화에 대해 "차기 6자회담에서 만약 북한이 이 문제에 대해 구체적인 아이디어를 갖고 있다면 6자회담 틀 안에서든, 개별적인 접촉에서든 구체적으로 논의할 수 있는 기회가 있을 것"(톰 케이시 국무부 대변인)이라며 가급적 6자회담 틀 안으로 수렴하려는 자세를 보였다.

한반도 평화체제 포럼은 초기단계 조치 완료 이후 다시 '4자회담' 형식으로 구성될 가능성이 높다. 오히려 이젠 일본과 러시아가 이 논의 틀에 보내고 있는 경계심에 대해 신경 써야 할 상황이다. 이는 러시아가 의장국을 맡고 6자가 모두 참여하는 '동북아 평화ㆍ안보체제 실무그룹'과의 조화에 의해 해결될 수 있다.

알렉산더 버시바우 주한미대사와 힐 차관보는 최근 한반도 평화체제 협상이 연내에 개시되길 희망하는 입장을 잇달아 밝혔다. 협상이 순조롭게 진행된다면 '남북한과 미국 세 정상간 한국전쟁 종전선언', '종전협정 또는 평화협정 서명을 위한 4개국 정상회담', '2차 남북 정상회담' 등 굵직굵직한 이벤트들이 기다리고 있다.

특히 올해 한국대선과 내년 미국대선 등의 정치일정과 맞물려 동북아 질서의 근본적 변화를 알리는 이런 '빅 이벤트'들이 얼마나 속도감 있게 현실화될 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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