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12일 한국군의 레바논 전투병 파병을 반대하는 기자회견이 열렸다. 기자회견에 나선 사람은 80년대 사회주의 혁명 운동을 주도하던 박노해 시인이었다. 그는 "2005년과 2006년 두 차례에 걸쳐서 레바논 남부 국경지대를 구석구석 방문한 경험을 토대로 레바논 시민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의료 재건부대라는 점을 강조하였다"고 한다.
박노해 시인은 이스라엘의 침공으로 참혹하게 파괴된 현장뿐만 아니라 레바논에서 실질적 정부 역할을 하고 있는 무장 정치조직 헤즈볼라 지도부를 만나는 등 실체적 진실에 접근하기 위한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하고 돌아왔다.
시인은, 직접 보고, 듣고, 느낀 이스라엘이 저지른 레바논 침공의 실상을 70, 80년대 운동권들에게 너무나 익숙한 용어인 '팸플릿'으로 만들어 내놓았다. "인터넷은 너무 조급하고, 잡지는 깊지 않고, 책은 때늦은 진리를 말하기도 하기" 때문에 조급하지 않으면서도 깊이 있게 그리고 때에 늦지 않게 소리치기 위하여, <여기에는 아무도 없는 것만 같아요>라는 제목의 팸플릿을 만들었다고 한다.
전쟁의 본질은 이스라엘의 건국으로부터 시작되었지만, 어쨌든 지난 레바논 전쟁은 2006년 6월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간의 다툼에서 시작되었으며, 7월에는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으로까지 확대되었다. 34일간에 걸친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으로 1,500여명의 레바논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같은 전쟁기간에 이스라엘에서는 158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이스라엘은 남부 레바논 주요 도시 뿐만 아니라 국경 근처의 마을과 도로, 항만, 발전소와 같은 시설을 모두 파괴하는데 51억 달러를 사용했다고 한다. 반면에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에 맞선 헤즈볼라는 1억 달러로 맞섰다고 한다.
사람 목숨의 값어치를 숫자로 비교하여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은 '전쟁'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부적절하게 느껴질 만큼 일방적인 침략과 파괴였다는 것이다. 박노해 시인은 '생명의 무게'를 묻는 시를 통해 참혹한 전쟁의 진실을 알리려고 한다.
생명의 무게
이스라엘의 땅속에는
158명이 누워 있다.
향기로운 꽃송이를 덮고서
레바논의 땅속에는
1,500명이 누워 있다.
검게 불탄 폐허를 덮고서
주검 앞에 선 아이들은
눈물로 묻는다.
생명의 무게는 누가 정하나요?
레바논 전쟁의 실체적 진실은?
우리가 언론 보도를 통해 흔히 알고 있는 2006년 레바논 전쟁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6월 25일 팔레스타인 무장단체가 이스라엘의 길라드 샬리트 상병을 납치하자 이스라엘이 그의 석방을 요구하며 팔레스타인 가자지구를 공격해 들어갔다. 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 교도소에 갇혀 있는 하마스 죄수들을 석방해야 이스라엘 병사를 석방하겠다고 했고,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과 하마스에 대하여 더욱 거센 공격을 퍼부었다.
이스라엘의 보복 공격에 맞서 남부 레바논 무장조직 헤즈볼라는 이스라엘에 로켓 공격을 퍼붓는 한편 이스라엘 군인 2명을 포로로 잡았다. 그러자 이스라엘은 레바논에 대해서도 무차별적인 미사일 공격을 감행했다.
박노해 시인이 전하는 2006년 레바논 전쟁의 실체는 이렇다.
레바논 영토를 침범한 무장 이스라엘 병사 2명의 체포는 납치가 아닌 생포였다. 이스라엘은 이번 전쟁 이전에도 수시로 레바논 영토를 침범해 왔다. 이스라엘의 속셈은 따로 있었다는 것이다.
"레바논 영토 내 점령지에 분리장벽을 설치해 자신들의 영토로 고착시키겠다는 계산과 함께, 무엇보다 'BTC 송유관'의 통과 경로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겠다는 저의가 깔려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 본문 중에서
BTC 송유관은 풍부한 매장량 때문에 제2의 중동으로 불리는'카스피'해 유전에서 시리아와 레바논을 거쳐서 이스라엘까지 연장하려고 하는 미국이 주도하는 송유관 공사를 말한다. 박노해 시인에 따르면 결국 레바논 전쟁 본질에는 이슬람 시아파인 이란과 헤즈볼라, 팔레스타인의 하마스로 이어지는 반미 저항벨트를 분쇄하겠다는 미국의 저의가 깔려있다는 것이다. 결국 이번 전쟁 역시 석유에너지 자원 확보라는 검은 탐욕이 그 중심에 있다는 것.
미국과 이스라엘 그리고 두 나라에 동조하는 UN이 레바논의 무장테러조직이라고 낙인찍고 있는 헤즈볼라의 실체는 무엇인가? 박노해 시인이 전하는 헤즈볼라의 실체는 이렇다.
"레바논 남부를 통치하는 사실상의 정부요, 민중의 지지와 존경을 받으며 35명의 국회의원과 2명의 장관을 가진 기적 같은 무장정치조직 헤즈볼라."
"레바논 현장에서 본 헤즈볼라는 평시에는 이웃집 아저씨, 삼촌, 이장님, 공무원, 의사, 학교선생님이었다. 무엇보다도 자발적으로 주민들의 어려운 일과 문제 해결에 앞장 서는 자원봉사자였다. 그들이 총을 든 전사가 되는 것은 적의 침략을 받았을 때뿐이다." - 본문 중에서
미국과 이스라엘이 말하는 상시 무장조직으로서의 헤즈볼라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평상시 다정한 이웃이 적의 침공에 맞서서 헤즈볼라 전사가 되고, 헤즈볼라 전사는 주민과 마을을 지키기 위해 싸우다 죽어 순교자가 된다는 것이다.
무장테러조직 헤즈볼라의 실체
미국이 주도하는 서방세계가 무장테러조직이라고 낙인찍고 있는 헤즈볼라는 최근 여론조사에서 레바논 주민 70%이상이 지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또 레바논 국민 다수가 헤즈볼라의 지지 기반이 되고 있는 이슬람 시아파 주민이라고 한다.
이웃집 아저씨와 삼촌, 이장님, 선생님으로 구성된 헤즈볼라 전사들은 전쟁 중에도 마을을 지키기 위한 불리한 교전수칙을 지킨다고 한다. 그들은 마을 건물에 숨어서 전투를 하지 않는다고 한다. 주민들의 집이 파괴될까봐 몸을 숨길 곳도 없는 광야로 나가 불리한 지형을 통해 자신들을 노출시키면서 이스라엘군을 유인해 싸운다고 한다.
베카 벨리 평원에 있는 바알벡 병원 전투에서도 헤즈볼라 대원들은 진지로 활용하기에 충분한 병원 건물을 이스라엘군에게 순순히 내주고, 몸을 숨길 수 없는 평원 쪽으로 나가 자신들의 몸을 노출시킨 채 마을에 하나 뿐인 병원과 환자들을 지키면서 불리한 전투를 치렀다고 한다.
또 다른 격전지 중 한 곳이었던 남부 레바논 빈트 주베일 전투 중에 헤즈볼라 전사가 급히 휘갈겨 쓴 쪽지 한 장은, 읽은 주민들을 울음바다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책을 읽는 나의 눈시울도 적셨다.
"전투 중에 목이 마르고 배가 고파서 물과 빵을 허락 없이 먹었습니다. 제가 전사하면 이 쪽지를 들고 헤즈볼라를 찾아가면 보상해 줄 것입니다. 살람 알레이 쿰 !" - 본문 중에서
밤낮없이 계속된 전투가 여러 날 만에 끝나고 이스라엘군이 패각한 뒤에 피신했던 사람들이 마을로 돌아와서 무너진 집을 정리하다 부엌에서 발견한 쪽지에 적혀 있던 글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사례들은 여론조사결과와 같은 통계 수치가 아니더라도 레바논 민중들에게 헤즈볼라가 어떤 존재인지를 잘 알게 해준다.
그래서 박노해 시인이 만난 12살 소년들은 또 다시 이스라엘이 침공해오면 헤즈볼라 전사가 되어 싸우겠다고 말한다.
"제가 조금만 더 크면 헤즈볼라 전사가 되어 총을 들고 싸워야지요. 내 동생과 친구들의 생명을 구하고 죽는 순교니까요. 죄 없이 죽은 자와 정의를 위해 죽은 자는 하느님 곁에서 빛나지요. 순교는 삶의 영광이에요." - 본문 중에서
아이들은 학교나 모스크에서 배우지 않아도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을 물리치지 않으면 그들은 또 폭격하고 죽일 것이며, 결국 친구도 죽고 자신도 죽을 것이기 때문에 무기 앞에 노예가 되어 살지 않기 위해 헤즈볼라 전사가 되겠다는 것이다.
그 소년들에게도 구급차 기사가 되겠다거나 대학생이 되겠다는 꿈이 따로 있지만, 이웃집 아저씨와 삼촌, 이장님, 선생님이 헤즈볼라 전사가 되어 이스라엘의 침략에 맞섰던 것처럼 자신들의 개인적 꿈에만 매달리지 않겠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레바논 민중들에게는 '헤즈볼라'만이 유일한 희망이기 때문에 그렇다.
군사독재 정권에 맞서서 혁명을 꿈꾸던 그 시절, 운동권 활동가들에게 팸플릿은 매우 절박한 매체였다. 은밀하게 건네는 팸플릿은 대부분 여러 번 복사를 거듭하여 상당한 집중력을 발휘하지 않으면 읽기 어려울 만큼 희미해진 채 전달되기 일쑤였지만 참으로 요긴하게 읽던 기억이 있다.
박노해 시인이 쓴 레바논에서 쓴 팸플릿 <여기에는 아무도 없는 것만 같아요>는 2006년 이스라엘의 침공을 받아 폐허로 변해버린 남부 레바논 학살 현장을 글과 사진으로 생생하게 전해주는 긴급한 메시지다.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바라는 많은 사람들이 이 팸플릿을 돌려 읽으며 우리의 '무관심' 속에 죽어간 어린 영혼들을 떠올리며, 다시금 '생명의 무게'를 성찰해보기를 기대한다.
덧붙이는 글 | <여기에는 아무도 없는 것만 같아요> 박노해 글, 사진 - 느린걸음/ 301쪽, 13,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