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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여행이라기보다 목적이 분명한 발걸음이었다. 걸어서 30분이면 섬 한 바퀴를 돌 수 있을 만큼 좁은 땅덩어리에, 섬 한가운데 오똑 올라서면 사방이 아득한 망망대해로 펼쳐지는 이곳에서 얼마 전 세상을 뜨신 '윤한봉 선배'의 49제를 모시고 있는 중이다.
'기원정사' 마라도에 하나뿐인 사찰이다. 어디 절뿐이랴. 섬 면적이 0.3㎢인 곳에 교회, 성당 있을 것은 다 있다. 게다가 '짜장면 시키신 분'을 비롯하여 자장면집도 무려 3개씩이나 있다. 국토 최남단 마라도까지 와서 자장면을 꼭 먹어야 할 까닭이라도 있는 걸까. 아무리 공전의 히트를 한 CF를 본 따 들어섰다손 치더라도 콧구멍만 한 섬 안에 그것도 날 좋을 때만 들어오는 관광객 상대로 자장면집이 3개나 들어서다니 우리나라 사람들, 재미있는 사람들이다.
돌아가신 윤한봉 선배는 종교가 없는 사람이다. 아니 종교가 없다기보다는 어느 특정한 교리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이었다고나 할까. 불교든, 가톨릭이든, 개신교든, 이슬람교든 모든 종교의 꼭짓점엔 공동선이 있다고 믿는 분이었다.
이름하여 '통종교인' 당신이 원하든 원치 않든 사후 당신의 49제를 절에서 모시게 된 것은 생전의 인연이 시킨 일이었다. 미국 망명시절 인연을 맺었던 스님이 마침 국토 최남단 마라도 '기원정사'에 주석하시기 때문이다. 스님은 생전지기인 윤한봉의 극락왕생을 위해 49제를 자청해 모시겠다고 했단다.
기원정사 뜰 앞에는 내 탐심을 불러 일으키는 '문주란'이 활짝 피어 있었다. 꽃이름보다는 여가수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꽃이다. 백합목 수선화과라는데 가냘픈 수선화의 이미지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잎이 넓고, 키가 커 언뜻 보면 선인장이나 알로에와도 닮아 보였다. 문주란꽃이 활짝 핀 것은 처음 보았다. 몇 년 전 제주에 왔을 때 문주란 자생지 토끼섬을 바라보면서도 가보질 못했다. 문주란꽃이 만개했다면 어떻게든지 가봤겠지만 그때는 개화기 전이었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꽃이기에 아마도 육지 반출은 금지됐을 터였다. 절 마당 주변 여기저기 풍성하게 자라나는 문주란을 보면서도 얻어가지 못하는 안타까움. 이럴 땐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하고 싶은 것 하고 보는 막무가내형이 얼마나 부럽던지.
그렇게 보고 싶고, 갖고 싶은 문주란꽃을 실컷 보았다. 거침없이 활짝 펼친 꽃 이파리가 둥글게 둥글게 퍼진 모습, 향기도 환상이었다. 생전의 윤한봉 선배는 촌아낙이 언제 미국 구경해 보겠느냐고 당신이 가자 할 때 가자고 이런저런 이유로 머뭇거리는 나를 반강제로 끌고나갔다.
덕분에 꿈도 꾸지 못했던 미국 구경을 해봤는데 이제는 돌아가셔서까지 섬 구경을 시켜주신다. 그것도 꽃 좋아하는 내 생각해주신 듯 문주란 개화기에 맞춰서… 하얀 이를 마음껏 드러내며 파안대소하던 선배의 모습이 떠올라 순식간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백련초라든가? 선인장꽃이다. 빨간 밤고구마처럼 생긴 백련초 열매를 이용한 한방처방이 기관지 천식에 좋다고 들었지만 명약이 하도 흔해 별 관심이 없던 열매였다. 그런데 이렇게 무더기로 피어있는 모습을 보니 맑고 깨끗함이 청정바다를 닮았다.
제물은 정성껏 준비했는데 집전할 스님이 못 오셨다. 중요한 행사 때문이었다는데 대타로 모실 스님도 마땅치 않았나 보다. 지역이 지역이니 만큼 스님 차출도 쉽진 않았겠지만 제물을 차려놓고는 막막한 심정이었다.
오신 가족들은 종교가 달랐기 때문에 일단 절집 풍습을 귀동냥한 사람으로는 내가 유일했다. 제 모시는 순서와 내용은 오리무중이었지만 기본은 해야될 것 같았다. 예불 순서에 꼭 들어가는 천수경과 반야심경을 염송하고는 그 중간에 극락세계를 관장하시는 아미타불을 108번 염송했다.
다행히 영가전에서 모시는 제례순서를 익히고 있는 보살이 계셔서 문제는 없었지만 참으로 난감한 국면이었다. 어쨌든 3제를 무사히 모시고 나니 선배를 위해 무언가를 해드린 것 같아 뿌듯한 가슴이었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뭣도 모르면서 제 지낸다고 뚝딱뚝딱 부산을 떠는 우리를 보시고 선배가 뭐라고 하셨을까?
"아이구, 저 웬수들… 하하하~~"
잇몸까지 드러내며 파안대소하시는 선배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