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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레반 무장단체 에게 피랍된 23명 한국인 인질이 억류된 지 많은 시간이 흘렀다. 그 와중에 고(故) 배형규 목사는 안타깝게도 목숨을 잃었고, 남아있는 22명의 어린 인질들의 안전도 보장 할 수 없는 곳에서 불안감에 떨고 있다.

이러한 비극적인 사태가 일어난 누군가에 책임을 묻는 것은 지금 인질들이 억류되어 있는 현시점에서 되짚어 본다는 것은 꽤나 잔인한 일일지도 모르나, 지금 현재 인터넷상의 여론은 이러한 책임공방에 있어 꽤나 기묘하게 흐르고 있다는 것이 특이하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죄 없는 외국의 민간인을 억류하여 아프간 현 정부와 포로협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이유로 한명을 살해한 만행을 저지른 무장단체 탈레반에 대한 1차적인 문제와 대한민국의 파병정책, 그리고 여행제한이 아닌 여행금지의 조치가 미리 취해지지 못한 외교부 등이 비난에 도마에 처음 올라야 함은 어쩌면 너무나도 자명하다.

하지만 현재 피랍되어있는 인질들이 봉사활동을 가장한 기독교 선교활동을 했다는 정황이 보인다는 이유와, 아무리 그것이 종교적 신념이라 할지라도 한국 사회전체에 미친 염려와 걱정을 감안한다면 그들의 행위가 처음부터 문제를 가지고 있지 않았는가 하는 점이 바로 책임공방의 그것이다.

결국 한민족복지재단과 피랍자의 가족들은 인질들의 안전이 완전히 확보되지 않은 불안한 상태에서도 23일 박은조 이사장의 입을 통해 대국민 사과문을 낭독했고,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역시 22일 성명을 통해 위험 지역에서 활동을 자제해야 한다며, 더 나아가 "한국교회는 선교지에서 대규모 인원 동원 집회나 이벤트식 행사를 중지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보수적 집단인 한국기독교총연합회 역시 지난 26일 성명서를 통해 앞으로 위험지역에 대한 해외봉사활동을 자제해 줄 것을 한국교회에 요구하기도 했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한국 기독교에 대한 비난여론은 아직 가시지 않고 여전히 드세며 오히려 더 나아가 기독교 전체에 대한 비난으로 확산되고 있는 추세다. 과연 둘 사이에 무슨 오해가 있기에 탈레반 피랍사태가 때 아닌 기독교 비난사태로 확대되고 있는 것일까?

과도한 선교활동. 과연 누구의 뜻인가?

▲ 영화 <패션오브크라이스트>에 등장하는 십자가.
ⓒ 20세기 폭스 코리아
과거의 선교는 기독교의 교리와 신의 의미를 모르고 살아가는 자들에게 앎의 뜻을 전하는 형이상학적 인식론의 그것이었다면, 현대 기독교에서 말하는 선교의 진정한 의미는 하버드 신학교수 하비콕스(H.Cox)가 자신의 저서《세속 도시》에서도 말한 것과 같이 형이하학적 실천주의 종교적 선행이다.

다시 말해, 이웃을 사랑하라는 대원칙에 의거하여 그들에게 배품의 뜻을 전하는 것이 현대 기독교 선교에 목적이지만, 현재 한국교회는 과거의 선교의미에 너무 집착하는 모습이 보인다는 것이다.

이것은 현대 한국교회에서 선교의 궁극적인 목적이 외려 자신들의 세력 불리기에 모습으로 비쳐질 여지가 크며, 반대로 인도주의적 선교활동 마저도 그 뜻을 퇴색하게 만들어 버리게 될 가능성을 양산해 버린다. 이러한 모습은 기독교를 믿지 않는 일반인이 보기에 거부감이 들기 충분하며, 특히나 마치 피라미드식 교회선교에도 비난이 가해 질 수밖에 없다.

현재 한국교회가 기독교 전체 역사상 유례없이 경이로울 만큼의 놀라운 성장을 이룬 뒷면에는 사실 실천의 선교보다는 이러한 주입식 선교가 어느 정도 기여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힘들다. 또한 이러한 주입식 선교의 선례가 과거 유럽 강대국들이 해왔던 식민지 정책의 일환이었다는 점과 다른 종교와 전통을 가지고 있는 국가에 대한 문화적 폭력과 충돌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지한다면, 한국의 기독교 선교 활동은 이제 변화를 맞이할 때가 온 것이 아닐까.

모르긴 몰라도 신은 분명 인간들의 투쟁과 분쟁을 원치 않을 것이며, 더욱이 평생을 선행을 위해 살아온 성실한 목자가 타국에서 어이없게 목숨을 잃는 일 따위는 결코 바라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와 권력, 그리고 여지없는 성과주의

진정한 의미에 기독교적 교리는 분명 인간이 인식하지 못한 저 높은 곳에 있음과 아울러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하라는 성경구절이 그것을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기독교는 권력집단으로서의 자신을 변화시키지 아니하고, 정체되어 지키려는 모습이 강하게 보인다는 것이 현 한국 기독교 비난의 또 다른 요소로 작용한다.

교회가 직접 나서 사학법 개정 같은 정부정책을 규탄하는 대규모 집회에 모습을 드러냄은 물론, 교회 스스로의 권력경쟁 역시 심심치 않게 보도되는 현시점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기독교인이 아닌 일반인이 보기에는 그러한 모습이 과연 ‘신에 대한 믿음’인지, ‘개인의 권력에 대한 믿음’인지 오해할 여지가 다분하기 때문이다. 기독교가 만인을 안고 가야하는 포용적 종교라면, 이러한 점까지 그들 스스로 경계하고 주의해야할 필요성은 충분하다.

▲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가 사학법 개정을 반대하며 지난 2006년 1월 19일에 벌렸던 퍼포먼스.
ⓒ 오마이뉴스 권우성
또한 현대에 사람들이 기독교를 비롯하여 종교에서 바라고자 하는 점은 마음의 안식과 아울러 이웃에 대한 자발적 희생의 표본이지, 어떤 거대한 성과를 이룩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한국 교회는 놓치고 있다. 미국에 이어 세계 두 번째로 해외에 가장 많은 선교활동을 하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라는 그들 성과와 세계 10위권에 드는 가장 큰 교회 몇 개를 대한민국이 보유하고 있다고 해서 박수쳐줄 비 종교인은 과연 또 얼마나 될 것인가.

인류역사상 굵직굵직한 비극에는 반드시 종교가 제대로 그 힘을 발휘하지 못했을 때 발현되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이번 사태 역시 한국교회 그들 스스로 속박해놓은 종교의 선지자적 거대한 성과라는 압박 때문에 이러한 비극이 발현되지는 않은 것일까 그들 스스로 한번쯤은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종교의 거대한 신념과 성과 때문에 발현되었던 개인의 비극적인 희생은, 과거 겪었던 여러 차례에 역사로도 충분하다.

오직 무사히 돌아오라. 그래도 안고가자.

철없는 내 아이가 위험한 물가에 가서 놀까봐 여러 차례 언질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아이가 어떠한 이유로 그곳에 가서 놀다가 물에 빠졌다고 생각해보자. 지금 이 상황에서 부모가 해야 할 일과 생각나는 것은 오직 하나, 아이를 무사히 살리는 일밖에는 없다. 그 아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왜 갔는지에 대한 물음과 부모의 눈물 섞인 타박은 그 후에 이야기 이다.

분명 한국 교회는 앞서 언급했듯 여러 가지 문제를 가지고 있고 지금 아프간 피랍사태에 맞물려 그동안 쌓여있던 여러 가지가 한 번에 폭발한 감이 없지 않아 존재하지만, 한국 기독교가 아닌 22인의 피랍자 개개인들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비난하는 행위와 여론, 그리고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비난의 글들은 현 시점에서 결코 도움이 되질 않는다.

다시 말해, 한국 교회와 기독교에 대한 불만 그것은 그저 그것으로 인식하되, 이것이 피랍사태와 연관 지어 발현되어서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비록 그들이 대한민국의 여론에 반하는 모습으로 우리들에게 걱정을 끼쳤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보다 그들이 무사히 돌아오길 바라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가장 중요한 여론이며, 그리고 그들이 무사히 돌아왔을 때 서로 대화하고 고쳐가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되겠다.

#한국 교회#기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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