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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르에스살람 항구의 모습.
다르에스살람 항구의 모습. ⓒ 김성호
킬리만자로 등정을 마치고 내려온 나는 사파리 회사에서 잡아준 모시 시내의 한 허름한 숙소에 투숙했다. 다음날 아침 일찍 나는 '다르 익스프레스'라는 버스를 타고 모시에서 다르에스살람으로 향했다. 킬리만자로 등산의 여파로 몸은 여전히 뻐근하다.

킬리만자로 등반을 위한 전초기지 역할을 하는 모시는 작은 관광도시답게 그리 번잡하지 않았다. 아루샤와 마찬가지로 인도인들이 식당과 호텔 등을 많이 운영하고 있었다. 이슬람 사원 건너편에 있는 시내 주유소에서 승객을 태운 버스는 시계탑이 세워진 로터리를 지나 다르에스살람으로 가는 시 외곽으로 빠져나갔다. 7시간 정도 버스를 타고 가야 한다.

간혹 비가 오다그쳤다 오락가락 하는 날씨였다. 버스는 사메(Same) 지역 등에서 몇 차례 멈춘 뒤 승객을 태웠으나 오래 머물지 않고 승객이 없으면 바로 출발했다. 나는 버스 안에서 피곤으로 졸다 깨다를 반복하면서 지루한 시간을 보냈다. 3시 30분 정도 달린 뒤에야 버스는 휴게소에 섰다. 아프리카에서는 보기 드물게 식당도 있고 화장실도 딸려 있는 휴게소다운 휴게소였다.

휴게소에서 10분간 정차한 뒤 다시 버스는 출발했다. 여자 승무원이 중간에 승객들에게 콜라와 환타 등 음료수를 나눠주었으나 나는 차타기 전 모시에서 산 비스킷과 초콜릿 등으로 점심을 때워야 했다.

도로와 평행선을 달리는 녹슨 아프리카 철길

모시에서 다르에스살람까지는 끝없는 사바나 지대를 달린다. 버스의 차창을 통해 펼쳐지는 2개의 재미난 풍경. 하나는 푸른 사이잘삼의 밭이고, 다른 하나는 도로와 평행선을 달리는 철길이다.

알로에 같은 사이잘삼(Sisal)이 줄을 맞춰 한 줄로 파랗게 자라고 있는 농장을 많이 보게 된다. 밧줄을 만드는 재료로 쓰이는 사이잘삼은 지난 1960년대 탄자니아 최고의 환금작물 중 하나였다. 식민지 시대 때 유럽인들에 의해 멕시코로부터 도입된 사이잘삼은 인도 이주노동자와 아프리카 노동자에 의해 플랜테이션으로 대규모 집단농장에서 재배되어 수출되었다. 지금도 탄자니아 곳곳에서 바나나와 커피나무 등과 함께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작물이다.

철길도 모시에서부터 도로와 평행선을 타고 달린다. 큰 산이 없으니 도로와 철길이 중간에서 멀어질 이유가 없다. 도로와 철길은 탄자니아 제2의 항구도시인 탕가(Tanga)로 빠져나가는 코로그웨(Kologwe) 지역까지 동행을 하다가, 버스는 오른쪽으로 빠져 내륙을 통해 다르에스살람으로 간다. 버스가 철길을 건너야하는 건널목도 4~5군데 되었다.

녹슨 철길에 풀이 무성하고 건널목에 아무런 차단장치나 역무원이 없는 것으로 보아 운행이 중단된 철길임을 알 수 있다. 기적소리가 끊긴 우간다의 빅토리아 호수 열차처럼. 아루샤에서 모시를 거쳐 탕가로 가는 노선은 지난 1911년 식민지 시대 독일에 의해 건설된 철도이다. 폭 1.434m의 협궤로 단선이다. 현재 탄자니아에서 열차가 운행 중인 노선은 다르에스살람에서 므완자(Mwanza, 또는 음완자)와 키고마를 연결하는 중앙선과 잠비아를 연결하는 타자라 노선뿐이다.

다르에스살람 항구의 잔지바르로 가는 여객선 나루터.
다르에스살람 항구의 잔지바르로 가는 여객선 나루터. ⓒ 김성호
버스가 다르에스살람에 다가오자 비가 멈추고 화창한 날씨가 내리 쬐었다. 케냐 나이로비나 우간다 캄팔라처럼 서늘하지 않고 후덥지근하면서 축축한, 고온다습한 전형적인 열대 해안기후가 나타났다. 같은 아프리카이지만 이런 차이를 빚는 것은 고도의 차이 때문이다.

아루샤의 해발고도는 3658m이었는데, 다르에스살람은 58m에 불과하다. 내가 지금까지 거쳐 온 다른 국가의 수도와 비교해도 한눈에 알 수 있다. 에티오피아 아디스아바바는 고도가 2355m이었으며, 케냐의 나이로비는 1820m, 우간다의 캄팔라 1312m, 르완다의 키갈리는1497m이었다. 아프리카 고원 도시에서 배낭을 메고 급경사의 스키슬로프를 타고 저지대 도시로 급강하한 셈이다.

버스는 시내에서 8km나 떨어진 외곽에 있는 우붕고(Ubungo) 터미널에서 승객들을 모두 내리게 했다. 우붕고 터미널은 단거리 대중교통수단인 '달라달라' 뿐 아니라 먼 거리 도시와 국제노선을 달리는 대형 버스 정류장이었다.

택시를 타고 시내 중심가에 있는 항구 근처의 여행객 숙소인 키보디야 호텔에 방을 잡았다. 잔지바르 섬으로 떠나는 여객선 항구 가까운 곳에 정해야 했기 때문이다. 키보디야 호텔은 해안가와 가깝고, 근처에 중앙선 철도역도 있고 시계탑 로터리와 가까워 시내를 걸어 다니기에도 편리했다.

나는 잔지바르로 가는 여객선 표를 예매하기 위해 숙소에서 나와 인도양 해안가 쪽으로 걸어갔다. 다르에스살람에서 하루 머문 뒤 다음날 잔지바르로 갈 예정이기 때문이다. 숙소에서 나오자 바로 다르에스살람에서 키고마와 므완자로 가는 중앙선 철도역이 보였다. 그 옆으로는 복잡한 달라달라 정류장이 있었다. 철도역을 지나 해안가의 커다란 도로인 소코이네 드라이브를 따라 조금 올라가자 잔지바르 여객선 사무소가 나왔다.

다르에스살람은 말 그대로 '평화로운 항구'

국립박물관에 있는 11~14세기 인도양을 둘러싼 동아프리카 무역 상황 그림.
국립박물관에 있는 11~14세기 인도양을 둘러싼 동아프리카 무역 상황 그림. ⓒ 김성호
아프리카 여행 중에 처음으로 바다를 본다. 항구에 들어오고 나가는 배를 보니 말 그대로 아랍어로 ‘평화로운 안식처’라는 뜻의 ‘다르에스살람(Dar Es Salaam)’에 온 것이 실감났다. 에티오피아 아디스아바바에서 케냐의 나이로비를 거쳐 우간다의 캄팔라, 르완다의 키갈리, 탄자니아의 아루샤 등은 황량한 사막이거나 열대 우림, 또는 사바나 초원이었다.

바닷가 근처여서 그런지 나이로비처럼 그렇게 혼잡하다거나 위험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혼자서 바닷가 도로를 따라 여객선 표를 예매하러 가는데 별다른 위험은 없었다. 지금은 탄자니아의 사실상 수도이면서 최대 항구도시인 다르에스살람은 애초 조그만 어촌 마을에 불과했다.

지난 1880년대 유럽 선교사의 아프리카 대륙 선교기지로 활기를 되찾은 다르에스살람은 독일 식민지 총독 청사가 자리 잡고 철도가 놓이면서 탄자니아 중심도시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케냐의 나이로비가 영국 식민지 총독 청사 이전과 철도 건설 중간 기착지로 성장한 것과 같은 성장과정을 밟았다고 할 수 있다.

당시 독일이 총독부를 바가모요(Bagamoyo)에서 이곳으로 옮긴 데는 다우(Dhow)선 항구인 '바가모요'보다 증기선 항구인 '다르에스살람'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독일 식민지에 이어 1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의 식민지로 바뀐 탄자니아는 1961년 독립한 이후에도 다르에스살람을 수도로 그대로 이어받았다.

지난 1974년 중부지역의 도도마(Dodoma)로 행정수도를 옮겼으나 여전히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는 다르에스살람이다. 국회만 도도마로 이전했고, 나머지 대통령 집무실 등 행정부처와 사법부는 여전히 이곳에 그대로 머물러 있다.

다르에스살람을 비롯한 아프리카 동부해안은 지중해의 유럽과 아랍, 페르시아 뿐 아니라 중국과도 교류를 하는 등 무역의 중심지로서 세계와 소통하고 있었다. 현재 케냐의 말린디와 몸바사, 탄자니아의 바가모요와 킬와 , 모잠비크의 소팔라 등의 해안도시가 대표적인 곳. 이들 도시는 이미 11세기 때 아랍인들에 의해 이슬람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고, 15세기 초 중국의 정화 제독이 이끄는 함대는 말린디까지 도착했다.

국립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15~16세기 킬와시대의 대문.
국립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15~16세기 킬와시대의 대문. ⓒ 김성호
모로코의 이슬람 여행가인 이븐 바투타는 지난 1331년 케냐의 몸바사에 머문 뒤 다르에스살람을 지나 킬와(Kilwa)까지 항해했다. 수단과 소말리아의 세일락, 모가디슈를 거쳐 내려온 바투타가 당시 킬와에 대해 묘사한 부분이다.

"큰 해안 도시로서 주민들의 대부분은 진짜 검은 흑인들이다. 쿨와(Kulwa.현재의 킬와)는 매우 훌륭한 도시로서 건물들도 대단히 단아하다. 모두 목조건물로서 지붕은 수초로 이었다. 주민들은 흑인 이교도들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만큼 모두가 성전자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들은 신앙심이 돈독하고 청렴하며 샤피이야파에 속한다. 내가 쿨와시에 갔을 때 그곳 술탄은 아부 무자파르 하산이었다."

바투가 말하는 '주민'은 이슬람교도인 아랍인을 말하는 것으로, 1862년 아랍의 오만 출신 잔지바르 술탄이 노예와 상아 무역을 위해 동부 해안지대를 통치하기 수 백 년 전에 이미 아랍인들이 정착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프리카 동부 해안에 스와힐리 문화가 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아프리카 반투족 여자와 아랍인들 사이에서 태어난 후손들이 스와힐리족이고 이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반투계어와 아랍어의 혼합인 스와힐리어이고, 아프리카 문화와 이슬람 문화가 섞인 것이 스와힐리 문화이다. 스와힐리(Swahili)라는 뜻 자체가 아랍어로 '해안'이라는 의미이다. 현재 다르에스살람은 케냐의 몸바사와 모잠비크의 마푸토와 함께 동아프리카 3대 항구이다.

오랫동안 바다를 통해 세계와 교류하고, 오만의 지배, 독일과 영국의 식민지 경험, 영국식민지였던 인도 노동자들의 진출로 다르에스살람은 역사만큼이나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살고 있다. 다민족 다문화의 선두도시가 바로 다르에스살람이다.

내가 그동안 거쳐 온 아프리카 도시들은 나름대로 독특한 특징을 갖고 있었다. 에티오피아의 아디스아바바는 도로도 건물도 정돈되지 않은 전형적인 낙후 도시였다면, 케냐 나이로비는 거대한 현대적 도시이면서 혼잡하고 위험한 도시의 이중적 이미지가 뚜렷했고, 우간다의 캄팔라와 르완다의 키갈리는 작지만 평화로운 언덕위의 도시였으며, 이곳 다르에스살람은 동서양의 문화가 어우러진 해안가 식민지 도시의 잔영이 어린 곳이었다.

아프리카 항구도시의 주말 오후

다르에스살람과 므완자, 키고마를 오가는 중앙선 철도역.
다르에스살람과 므완자, 키고마를 오가는 중앙선 철도역. ⓒ 김성호
항구에서 잔지바르 행 표를 예매한 나는 걸어서 다시 숙소로 돌아오다 현지 식당에 들어갔다. 오후 4시쯤의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서였다. 후덥지근한 오후인데도 마침 토요일 주말이어서인지 선술집 같은 식당에는 현지인들로 꽉 차 있었다. 맥주를 마시거나 가벼운 놀이를 하면서 쉬는 사람이 많았다.

식당은 손님 연령대에 따라 3개의 장소로 나눠져 있었다. 길가의 바깥에는 햇볕가리개와 식탁, 의자가 배치되어 가벼운 맥주를 마시는 공간이었고, 지붕이 덮인 가운데 공간은 포켓볼놀이를 하는 장소였고, 제일 안쪽은 음식을 먹는 식당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길가의 식탁에는 50대 이상의 나이든 사람들이 2~3명씩 앉아 맥주를 마시면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약간 어두운 조명에 술 마시는 바와 포켓볼 당구대가 설치된 가운데 공간에서는 멋을 낸 20대의 젊은 여자 2명이 비슷한 또래의 남자 2명과 포켓볼을 치고 있었다.

여자들은 스트레이트파마에 갈색으로 머리를 물들이고, 큰 귀걸이에 가죽 바지를 입었다. 아프리카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자유분방하고 파격적인 옷차림이다. 포켓볼을 치다가 잘 맞지 않으면 두 손을 쥐기도 하고 한 손을 높이 들었다가 아래로 내리치는 몸동작도 유난히 크다. 다른 여자는 한 손에 맥주를 들고 또 다른 손에는 당구공을 치는 막대인 큐를 들고 있다.

제일 안쪽의 식당은 3,40대의 연령층이 주로 모여 텔레비전을 보면서 웃기도 하고 대화를 나누면서 따분한 주말 오후를 즐기는 분위기였다. 조용히 신문을 읽는 사람들도 많았다. 한 식탁에는 4명의 사람들이 둘러 앉아 텔레비전을 보면서 ‘세렝게티 라거’ 상표의 맥주를 마시며 토요일 오후의 기나긴 시간을 달래고 있었다.

귀퉁이의 약간 어두운 식탁에는 3명의 남자가 앉아 유난히 큰 소리로 이야기를 나누며 박장대소를 하기도 했다. 둥근 얼굴과 대머리처럼 깍은 삭발머리, 과묵한 사람 3명이다. 말하는 것으로 보아 격의 없는 친한 친구사이였다.

얼굴이 둥근 사람이 가운데 앉아 큰 소리로 이야기를 주도하고 있었다. 둥근 얼굴은 삭발머리가 식탁 위에 있던 신문을 보려고 하자 뺏어서 옆의 빈 의자로 던진다. 혼자 신문을 보지 말고 대화를 하자는 것이다.

둥근 얼굴은 30대 중반의 여자 종업원이 지나가자 손가락으로 그녀의 옆구리를 쿡 찌른다. 그런데 여자는 둥근 얼굴이 아니라 건너편의 과묵한 남자에게 눈짓을 보낸다. 과묵한 남자는 둥근 얼굴과 삭발머리의 이야기에 가끔 미소로만 화답을 해주고 있었다.

눈짓을 보내던 여자 종업원이 의자를 가져와 둥근 얼굴과 과묵한 남자의 사이에 앉는다. 둥근 얼굴은 신이 나서 큰 소리로 얘기하면서 은근슬쩍 여자 종업원의 허벅지에 손을 올려놓는데, 여자도 이를 뿌리치지 않는다.

또 다른 30대 초반의 여자 종업원이 음식을 나르다 삭발머리의 머리 부분을 귀엽다는 듯 두세 차례 쓰다듬다 손바닥으로 대머리를 내리친다. 애정의 표현이니, 삭발머리가 싫어할 리가 없다. 잠시 뒤 다시 삭발머리 옆을 지나던 그 여자 종업원은 이번에는 아예 그의 어깨를 툭 건드리며 노골적으로 '작업'을 건다. 삭발머리는 무덤덤하다.

둥근 얼굴과 30대 중반의 여자는 맥주를 한 병 씩 더 시키더니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크게 웃는다. 토요일 오후 항구 도시의 뒷골목에 있는 식당에 비치는 일상의 한 단면이다. 자유로운 항구도시의 분위기가 느껴졌다.

탄자니아 사람들이 신문을 많이 읽는 이유

다르에스살람 시내 신문가판대에 놓여 있는 스와힐리어 신문들.
다르에스살람 시내 신문가판대에 놓여 있는 스와힐리어 신문들. ⓒ 브라이언 맥모로우
식당을 나와 근처를 돌아다니는데 신문을 파는 가판대가 많이 눈에 띄었다. 탄자니아는 신문을 파는 가게와 신문을 읽는 사람들이 다른 아프리카에 비해 유난히 많았다. 조금 전 나온 식당에도 신문을 읽으면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많았고, 모시에서 다르에스살람으로 오는 버스 안에서도 신문을 들고 탄 승객들이 적지 않았고, 버스 정류장에서도 신문을 파는 소년들이 유난히 많았다.

신문들은 거의 대부분 스와힐리어였다. 시내 신문가판대에 있는 15개의 신문 중 영자 신문 하나를 빼고는 14개 모두가 스와힐리어 신문이었다. 신문 중에는 '딤바(Dimba. 성인식이 거행되는 장소)'나 '마지라(Majira.시계)', '하바리 은제마(Habari Njema. 좋은 뉴스)' 등의 스와힐리어 이름이 있었다.

신문 파는 소년과 신문 읽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바로 쉽게 읽고 쓸 수 있는 언어 때문이다. 탄자니아는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과는 달리 영어나 프랑스어, 포르투갈어 등 식민 종주국의 언어 대신 전통 아프리카어에 뿌리를 둔 스와힐리어(Swahili)를 공용어로 사용하고 있다.

스와힐리어를 공용어로서 선택한 것은 탄자니아 초대 대통령인 줄리어스 니에레레였다. 대부분의 아프리카 국가가 독립 후 식민지 지배국가의 언어를 공용어로 채택한 데 반해 유일하게 니에레레 대통령만이 아프리카에 뿌리를 둔 스와힐리어를 탄자니아의 공용어이자 국어로 채택한 것이다.

스와힐리어는 아프리카 반투(Bantu)어에 뿌리를 두고 일부 아랍어를 빌려온 것. 아프리카와 아랍인이 교류하던 동아프리카 해안에서 주로 사용하던 스와힐리어는 탄자니아와 케냐, 우간다, 르완다, 부룬디, 모잠비크, 콩고민주공화국과 마다가스카르 섬까지 민중들 사이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식민지 시대 영어나 프랑스어가 지배층의 언어였다면 스와힐리어는 아프리카 민중의 언어였다. 그러나 1960년 독립을 이룬 대부분의 나라가 여러 가지 이유로 민중의 언어인 스와힐리어 대신 식민지 종주국의 언어를 공용어로 채택했다.

니에레레는 '아프리카의 세종대왕'이라고 비유할 수 있다. 세종대왕이 다른 나라에서 빌려온 어려운 지배층의 글자인 한자 대신 민초들이 쉽게 배울 수 있는 민중의 글자인 한글을 만든 것과 니에레레가 민중들이 쓰던 스와힐리어를 공용어로 채택한 정신에는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탄자니아에서도 식민지 시대에는 영어는 '엘리트의 언어', 스와힐리어는 '하층민'의 언어로 낮게 취급되었다. 조선 시대 '한자'와 '언문(한글)'의 위상과 다르지 않았다.

니에레레의 영향으로 스와힐리어는 탄자니아 뿐 아니라 인접 국가인 케냐와 우간다 등이 영어와 함께 이중 공용어로 채택하면서 아프리카에서 점차 사용 범위를 넓혀가고 있다. 탄자니아 사람들은 스와힐리어를 대부분 유창하게 구사하고 있다. 문자해독율이 성인의 경우 80% 이상으로 아프리카 국가 중 거의 최고 수준이다.

셰익스피어 희곡을 직접 번역한 니에레레 대통령

탄자니아 지폐에 실려 있는 줄리어스 니에레레 초대 대통령 모습.
탄자니아 지폐에 실려 있는 줄리어스 니에레레 초대 대통령 모습. ⓒ 김성호
교사 출신답게 니에레레는 재임초기 국가예산의 무려 14%를 교육에 집중 투자해 초등학교를 무상의무교육으로 했다. 식민 지배를 받은 가난한 아프리카 국가가 살기 위해서는 교육 밖에 없다는 '교육입국'의 정신을 실천했다. 응고롱고로 보호구역의 마사이족 어린이들도 모두 스와힐리어와 영어 공부를 하고 있을 정도로 탄자니아는 교육열이 높은 곳이다.

부족장의 아들로 태어나 우간다의 마케레레 대학에서 교육학을 공부하고 영국의 에든버러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한 니에레레(1922~1999)는 스와힐리어의 보급을 위해 자신이 직접 영어로 된 영국의 극작가 셰익스피어의 희곡 '줄리어스 시저(Julius Caesar)'와 '베니스의 상인'을 번역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독실한 가톨릭신자답게 '성경'도 스와힐리어로 번역했다.

니에레레는 국가 통일에 있어 언어의 중요성을 인식했던 인물이었다. 129개 부족으로 이뤄진 탄자니아가 독립이후 한 번도 심각한 부족갈등이나 내전, 쿠데타 등이 없었던 데는 국가의 통일수단으로 스와힐리어를 채택한 것도 하나의 영향을 미쳤음에 틀림없다.

다르에스살람의 시내 신문가판대에 신문이 많다는 것은 글을 읽을 수 있는 국민이 그만큼 많다는 것을 말한다. 신문구독율과 문자해독율은 비례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지난 1988년 <한겨레신문>을 시작으로 우리나라 종이신문들이 어려운 '한자혼용 세로쓰기'라는 오래된 편집방식을 버리고, 사실상 '한글전용 가로쓰기'로 바꾼 것은 한글이 일상생활에서 민중의 언어이자 국민의 언어로 완전히 뿌리내렸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이제 어려운 한자 때문에 신문을 읽지 못하는 대한민국 국민은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디지털 정보화시대에 한글은 최고의 글자로 평가받고 있다. 컴퓨터 시대에 소리글자인 한글의 과학성과 우수성 이전에 나는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 이유에 놀랄 따름이다. '우리말이 중국의 한자와 달라 제 뜻을 펴지 못하는 일반 백성을 위해 쉬운 한글을 만든다'고 하지 않았는가. 역대 우리의 제왕적 권력자 중에서 민중의 소통을 위해 민중의 주체적 시각에서 바라본 왕들이 몇 명이나 될까.

언어는 민주주의 기본 도구

국립박물관의 노예무역 전시관.
국립박물관의 노예무역 전시관. ⓒ 탄자니아 국립박물관
언어는 의사소통의 기본일 뿐 아니라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데 있어 중요한 정치적 도구이다. 권력자와 민중이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할 때 권력에 대한 민중의 감시와 견제는 애초부터 불가능하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민주주의 기본 전제는 허울로 전락한다.

스와힐리어 전문가인 양철준 박사는 "식민종주국의 언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는 아프리카 국가에서는 중앙 정치에서는 영어나 프랑스어, 포르투갈어로, 자기 부족의 선거구에 와서는 부족어로 선거운동을 하는 경우가 많다"며 "정치의 기본인 소통에서 권력자와 국민사이에 괴리가 있으니 정치인에 대한 비판과 견제가 사실상 불가능하게 된다"고 말했다.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니 정치인이 거짓말을 하는지 공약을 제대로 지키는지를 알 수 없게 되고, 정치인들은 국민을 속이고 부패하게 마련이다.

니에레레는 재임 중에 언어의 통일 뿐 아니라 부족주의 타파를 통한 국민통합과 국가의 정체성 확립, 모잠비크와 짐바브웨 등 다른 아프리카국가의 독립 지원, 우간다의 독재다 이디 아민 축출에 발 벗고 나섰다.

더욱 놀라운 것은 자신이 추진했던 집단 농업방식 등 일부 사회주의 경제정책이 실패하자 1985년 공개적으로 잘못을 시인하고 대통령 자리에서 스스로 물러났다. 아프리카 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건국의 아버지가 자진해 권력에서 물러난 사례는 거의 없는 일이었다. 퇴임 뒤에는 부룬디 내전 해결 등 아프리카의 평화 중재자로 헌신했다.

인자한 얼굴의 이웃 아저씨 같은 인상의 니에레레는 탄자니아의 지폐 얼굴과 박물관, 다르에스살람의 '줄리어스 니에레레 국제공항'과 '니에레레 문화센터' 등 탄자니아 어디에서든 만나게 된다.

현지인들은 니에레레에 대해 그냥 '음왈리무(Mwalimu)'라고 부르는데, 스와힐리어로 '선생님'이란 뜻이다. 대학 졸업 후 학생들을 가리키는 교사로 재직한데다 대통령 재임 시 손수 외국 문학작품을 번역하는 등 교육에 관심을 기울였고, 평화노선을 지킨데 대한 존경의 표시이다.

독립투사이자 국가의 정체성과 국민통합을 이룬 건국의 아버지로 존경받는 니에레레는 베트남 국민들에게 여전히 '바크 호(호 아저씨)'라고 불리며 사랑받는 호치민을 떠올리게 한다.

아프리카에는 탄자니아의 니에레레나 시인 대통령으로 유명한 세네갈의 레오폴드 셍고르 등 독립투사이면서 국가의 기틀을 세운 훌륭한 대통령들이 많다. 우간다의 이디 아민이나 중앙아프리카공화국의 장 베델 보카사 황제 등 우스꽝스런 대통령만 있는 것이 아니다.

동물의 왕국에서 이동통신회사의 천국으로

다르에스살람 시내의 나무가 우거진 국립박문관 앞 거리.
다르에스살람 시내의 나무가 우거진 국립박문관 앞 거리. ⓒ 김성호
해안가의 식당과 신문가판대, 전자제품 가게 입구에는 'Tigo(티고)'라는 글자가 많이 보였다. 무슨 광고인가 궁금해졌다. 가게마다 너무 많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탄자니아 뿐 아니라 동부 아프리카를 여행하다보면 'Vodacom(보다콤)'이라는 광고간판을 자주 보게 되는데, 핸드폰과 이동통신회사 이름이다. 아프리카에서 가장 많이 보는 길거리광고는 이동통신회사와 콘돔제품이다.

전자제품 가게에 들어가 젊은 남자 직원에게 "입구에 있는 '티고'는 무슨 광고냐"고 묻자 "보다콤과 경쟁하는 다른 이동통신회사"라고 말한다. 아프리카에서도 점차 핸드폰 사용이 늘어나면서 업체 간의 광고 경쟁도 치열해 지고 있는 것이다. 인터넷카페도 아프리카 도시 곳곳에 설치되어 있었다. 특히 르완다는 1시간에 요금이 500 르완다프랑(900원)이었는데, 남아공을 제외한 다른 아프리카 국가보다 인터넷 속도가 훨씬 빨랐다.

탄자니아처럼 넓은 초원의 아프리카에서는 무선이동통신이 많은 전화선을 깔아야 하는 유선전화보다 비용절감 등에서 훨씬 효율적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탄자니아는 도시나 지방 가릴 것 없이 모두 스와힐리어를 사용해 언어 소통의 어려움이 거의 없을 테니 핸드폰 사용인구도 빠른 속도로 늘어날 것이다. 보다콤과 티고 회사가 경쟁할만하다. 아프리카는 동물의 왕국에서 이동통신회사의 천국으로 바뀌고 있었다.

숙소로 돌아와 텔레비전을 켜니 여행 채널에서 킬리만자로 등반 프로그램을 방영하고 있었다. 킬리만자로 등정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다른 채널로 돌리니 인도어로 방송하는 프로였고, 중국의 중앙방송(CCTV)도 방영되고 있었다. 아프리카에서 중국의 위성방송을 보는 것은 처음이다.

다르에스살람은 인도인들이 환전소와 숙박시설, 음식점 등을 많이 운영하고 있었고, 탄자니아가 1960년대 사회주의 체제를 채택했던 당시 중국과의 우호관계를 반영하듯 중국인들도 많이 진출해 있었다. 중국은 '사회주의 우방'인 탄자니아를 위해 타자라 열차 뿐 아니라 섬유공장 등을 지어주는 등 많은 지원을 했었다.
#아프리카#탄자니아#다르에스살람#줄리어스 니에레레#스와힐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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