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기영 앵커가 웃었다. 아니 웃는 모습을 들켰다. 그것도 시청자들이 보지 않는다고 여긴 화면 뒤에서 웃다가 그만 들켜버렸다.
이를 드러내고 시답잖게 웃어버린 뉴스 진행자의 '헤벌쭉한' 모습이 그대로 화면을 타자 인터넷에는 비난 여론이 들끓은 모양이다. 엄기영 앵커가 방송 중 신속하게 사과했지만 한동안 '엄기영 방송 사고'는 인터넷 검색어의 상위랭킹을 지켰다.
뉴스 진행자의 불필요한 웃음이 비난을 사는 이유는 시청자들의 신뢰에 상처를 입히기 때문이다. 그만큼 정확성과 신뢰성은 사람들이 뉴스 앵커들에게 요구하는 첫째 덕목임에 틀림없다.
신뢰로 먹고사는 BBC 앵커들은 어떨까
내가 요즘 매일같이 즐겨보는 영국의 BBC 뉴스는 '시청자의 신뢰'라는 덕목을 놓고 보면 언론학의 교과서나 다름없다는 평가를 듣는다. 영국인들은 정부가 하는 말은 더러 안 믿을 때가 있지만, BBC 앵커가 하는 말만큼은 진실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다면 세계에서 가장 신뢰받는 뉴스를 전하는 BBC 앵커들의 표정은 어떨까.
엄숙하거나 진지하거나 적어도 반듯반듯할 것이라고 믿는 사람이 대부분이겠지만 적어도 내 경험만 놓고 보면 '아니올시다'다. 그들은 때로 잘 웃고 삐딱하게 앉아 볼펜 장난을 치기도 하고 스튜디오 출연자와 낄낄거리기도 한다.
물론 BBC를 대표하는 'BBC1'의 뉴스 진행자들이 모두 이런 건 아니다. <개그콘서트>를 통해 유명해졌던 '언저리 뉴스'도 아닐진대, 황금시간대 메인 뉴스를 이런 허랑방탕한 태도로 진행했다가는 아무리 점잖은 영국 네티즌들이라도 가만있을 리가 없다.
하지만 24시간 내내 뉴스만 진행하는 'BBC 뉴스 24'로 채널을 돌리면 분위기는 약간 달라진다. 이 24시간 뉴스채널에는 10여명의 남녀 앵커들이 시간대를 달리해 바통 터치를 해가며 등장한다. 한번 등장한 앵커는 최소한 서너 시간씩 진행자석에 앉아 떠나지를 않는다. 9시 뉴스를 진행했던 앵커가 10시에도 나타나고 11시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이러다 보니 고작 해야 50분짜리 <뉴스데스크>를 진행할 때처럼 눈에 잔뜩 힘을 주고 진행했다가는 무슨 일이 날지 모를 판이다. 어찌 보면 이런 24시간 뉴스 전달 체제에서 앵커가 다소 '헐렁하게' 진행할 수밖에 없는 것도 당연하다.
이봐요, 우리집 넥타이라도 갖다줄까요?
그 중에서도 주로 10시부터 12시 사이에 'BBC 뉴스24'에 채널을 고정한 채 뉴스를 보는 내게 가장 익숙한 앵커 중 한 명은 크리스 이킨이다. 허연 백발의 중견 진행자들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영국의 방송문화에서 크리스는 그나마 젊은 축에 속한다.
한국에서 앵커를 뽑으려면 뉴스 전달능력은 물론이고 인물을 보지 않을 수 없다. '시청자에게 호감과 신뢰를 주는 인상' 운운하면서 그럴 듯하게 포장하지만, 결국은 어디 내놓아도 빠지지 않는 인물이라야 앵커 자리를 꿰찰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런데 본인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크리스 이킨을 잘 생겼다고 평가하기에는 아무래도 아니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게다가 나를 더욱 화나게 한 것은 그가 사나흘에 한 번씩 똑같은 넥타이를 아무렇지 않게 매고 나왔다는 사실이다.
'도대체 방송 앵커라는 사람이 어떻게 저런 후줄근한 넥타이를 매고 나오나'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런던과 서울의 패션 유행 차이라고 생각해버리니 차라리 속이 편하기는 했다.
또 민영방송인 '채널4' 뉴스의 얼굴로 평가받는 존 스노우가 색동옷의 원색 무늬가 선명한 넥타이를 하루도 빼놓지 않고 매는 걸 봤을 때도 화가 나기도 했지만 개인의 취향이라고 생각하니까 그냥 견딜 만 했다.
크리스 이킨 같은 'BBC 뉴스 24'의 앵커들이 지난주에 맸던 그 넥타이를 매고 천연덕스럽게 다시 나타나면 우리 집 장롱에 걸려있는 넥타이라도 들고 뛰어가고 싶은 충동이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만큼 BBC 앵커들은 남녀불문하고 옷매무새나 머리 모양 같은 겉치장에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분위기다.
책상 내리치고 썰렁한 농담까지
크리스가 진행하는 심야시간대 뉴스에는 반드시 다음날 아침 발행될 영국 일간지들의 주요 헤드라인을 소개하는 코너가 있다. 주로 <가디언>이나 <더 선>, <데일리 텔레그라프> 같은 주요 신문의 고참 기자나 편집자들을 스튜디오에 불러놓고 다음날 신문들이 보도할 주요 뉴스를 간단한 논평과 함께 소개해주는 코너다.
그런데 한국의 방송에서도 단골메뉴인 이 '미리 보는 조간 브리핑' 코너에 등장하는 게스트들부터가 천차만별이다. 명함에 그럴 듯한 직함이 있는 현역 언론인뿐 아니라 전직 언론인, 아니면 그냥 방송인, 작가 심지어 얼마 전에는 영국 축구협회 관계자가 출연해 뉴스 해설을 하는 장면을 본 적도 있다.
이러다 보니 진행자나 출연자나 딱딱한 대본을 놓고 대화를 나누는 일은 찾아보기 힘들다.
앵커석에 앉은 크리스 이킨이 조간신문에 실린 사진을 가리키며 '찰스 황태자가 입은 옷이 별로 비싸보이지는 않는다'고 실없는 농담을 던지면 출연자가 '나도 비슷한 옷 하나 있다'고 맞받아치는 식이다. 심지어 중립적이어야 할 출연자가 <더 선>의 다음날 아침 기사를 소개하다 말고 '이런 식으로 보도하는 것 정말 싫다'며 불쾌한 표정을 짓는 모습을 본 적도 있다.
뉴스 진행자석에는 10여 종류의 다음날 아침 신문이 난장판처럼 펼쳐져 있고 크리스 이킨은 이 신문들을 하나하나 손으로 들어 카메라 앞에 들이대면서 뉴스를 진행한다.
뿐만 아니라 때로는 카메라 앞에 들이댄 신문기사 여기저기를 볼펜으로 가리켜가며 출연자와 대화를 주고받다 보니 나 같은 시청자 눈에는 도무지 경황없어 보이지만, BBC에서 크리스 이킨의 이런 '자연스런' 진행 패턴을 바꿔보려는 움직임은 없다.
출연자는 중립적이어야 하는 거 아니었나
얼마 전 'BBC 뉴스 24'의 앵커석에 새로 앉은 맷 프라이는 워싱턴 특파원 출신이다. 불과 몇 주 전까지만 해도 백악관 사진이 어깨 너머로 걸려있는 워싱턴의 BBC 스튜디오에서 미국 소식을 전하던 그가 앵커석에 앉았을 때 내겐 '영국보다 훨씬 단정한 미국식 진행솜씨를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웬 걸? 맷 프라이는 한 술 더 떴다. 'BBC 뉴스 24'는 15분마다 그날의 주요뉴스를 요약해 시청자들에게 반복해서 전달해 준다. 기자들의 리포트가 담긴 뉴스를 7~8꼭지 내보내고 나서 "오늘의 주요 뉴스입니다"라는 앵커 멘트와 함께 주요 뉴스 편집 화면이 나가는 식이다.
그런데 맷 프라이는 "오늘의 주요 뉴스입니다" 대목에서 아예 책상을 손바닥으로 '툭' 내리치면서 의자를 앞으로 당겨 앉았다. 물론 연출된 장면이 아니라 시청자의 주의를 환기하기 위해 그냥 자연스럽게 나온 동작이었다.
전국뉴스가 끝나고 지방 뉴스로 가면 앵커들은 더욱 '풀어진다'. 준비한 뉴스가 모두 끝나고 "시청자 여러분 감사합니다" 같은 마무리 멘트를 날리면서 오른손을 번쩍 들어 인사하는 진행자가 있는가 하면, 나른한 오후에는 "내일 '이 시각' '이 스튜디오' '바로 이 소파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같은 썰렁한 농담으로 한국식 뉴스 진행에 익숙한 나 같은 시청자들을 정말이지 남극으로 안내하기도 한다.
스튜디오 한편에 '짝다리'로 서있는 기상 캐스터에게 마이크를 넘기면서 "내일은 우리 애랑 놀러갈 수 있는 거냐"고 천연덕스럽게 묻는 장면은 자주 봐서 이젠 그리 위태로워 보이지도 않는다.
처음엔 화도 났다, 보다보니 괜찮더라
영국의 방송 뉴스를 보다보면, 준비된 자료화면 없이 출연자를 전화로 연결한 뒤 인터뷰 내용을 듣고 있는 앵커들을 카메라가 그대로 비추고 있을 때가 있다.
이럴 때 보면 남자 앵커는 책상 위의 자료를 계속 뒤적거리거나 딴전을 피우고 있고, 여자 앵커는 아예 턱을 괸 채 손가락 사이에 끼운 볼펜을 까닥까닥하면서 전화 인터뷰 내용을 듣고 있다.
뉴스 진행자들의 자유분방한 자세는 이뿐만이 아니다.
관록과 경험을 중요시하는 영국 사회답게 백발이 성성한 프로그램 진행자들이 여기저기서 아직도 건재하게 방송활동을 하고 있지만, 이들이 프로그램 도중에 돋보기안경을 썼다 벗었다 했다고 해서 제작진이고 시청자고간에 그걸 문제 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솔직히 말하면 영국 TV가 보여주는 이런 촌스럽고 무질서한 뉴스 진행방식 때문에 적지 않게 화가 치밀었던 것도 사실이다. 매년 시청료 명목으로 내는 돈이 30만원 가까이 되는 마당에, 그것도 뉴스 진행자들이 이렇게 시청자들을 무시해도 되는 거냐고 혼자서 씩씩거려본 적도 적지 않다.
안쓰러운 엄기영... 한국 앵커는 '인형'?
그런데 이상하게도 점점 시간이 흐르면서 옆집 아저씨 같은 모습으로 진행자석에 앉은 앵커의 모습이 그렇게 어색하지 않고 검버섯 같은 걸 굳이 감추지 않고 돋보기를 썼다 벗었다 하는 BBC 프로그램 진행자가 불편해 보이지 않기 시작했다.
그러는가 싶더니 이제는 한 시간 가까이 벌서듯이 눈에 힘주고 진행하는 엄기영 앵커가 좀 안 돼 보이기 시작했다. 14년 관록의 엄기영 앵커가 그럴진대 다른 사람은 어땠을까.
시청자들이 뉴스 진행자석의 앵커들에게 늘 인형 같은 모습을 요구하지만 않는다면 장미일 앵커가 어처구니없이 웃음을 터뜨리고 '나 어떻게 해'를 애타게 되뇌지 않아도 됐을지 모른다. 또 김소원 앵커가 캄보디아 참사를 전하면서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일부러 눈에 힘을 줘가며 이를 악물어야 할 이유도 없을지 모른다.
물론 엄기영 앵커의 웃음이 '아프간 피랍 사태 보도'라는 엄중한 뉴스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빚어졌기 때문에 더욱 오해를 산 것은 분명하다. 나 역시 이번 해프닝이 '앵커의 웃음'과 관련한 논란거리라기보다는 화면 편집상의 실수, 즉 방송 사고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이번 일을 계기로 뉴스 앵커는 웃을 때도 이를 반쯤만 드러낸 상태에서 태엽 감아놓은 인형처럼 웃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지나치게 한국적인 현상은 아닌지 되짚어볼 필요는 있어 보인다.
장화 신고 수해 현장에 선 BBC 앵커... 한국에서라면
사실 목에 깁스도 하지 않고 눈에 힘도 주지 않은 < BBC 뉴스 24 >의 앵커들이 가장 돋보이는 장면은 스튜디오에서보다 사건 현장에서다. 그들은 큰 사건사고가 나면 시도 때도 없이 현장에서 뉴스를 진행한다.
얼마 전 영국의 중부지방에서 엄청난 물난리가 났을 때다. 7시 뉴스 시그널이 끝나자 메인 앵커 크리스 이킨은 허벅지까지 물에 잠기는 수해 현장에서 무선 마이크를 들고 나타났다. 임시 스튜디오도 없었고 조명도 없었다.
평상시에도 외모를 치장하는 데는 크게 신경을 안 쓰던 크리스 이킨의 모습은 구청이나 동사무소 구호 요원이라고 하면 딱 어울릴 듯 했다. 허벅지까지 올라오는 초대형 장화를 신고 구정물 속에서 나타난 크리스 이킨의 모습은 내가 보기엔 우스꽝스러웠다. 엄기영 앵커가 그런 모습으로 수해 현장에 등장했으면 시청자들에게 어떻게 비쳤을까.
그러나 그건 이미 '어떻게 비쳤을까'의 문제가 아니었다. 생사를 오가는 물난리 현장에서 그보다 더 적합한 복장은 없었으므로. 그리고 현장의 분위기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데 그 우스꽝스런 장화보다 더 적합한 패션은 없었으므로.
그리고 그날 'BBC뉴스 24'에는 촌스런 넥타이로 자꾸 날 화나게 하던 몇 달 전의 크리스 이킨은 없고 따끈한 보리차라도 한 잔 끓여다 주고 싶은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BBC 앵커 크리스 이킨이 물난리 현장을 동분서주하며 뉴스를 전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