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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 문명을 거부하고 18세기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아미쉬 마을.
ⓒ 강희정
▲ 아미쉬 마을의 운송 수단인 버기(Buggy)의 모습으로 시속 5-6마일의 속도를 가진다고 한다.
ⓒ 강희정
아미쉬 교도들은 종교적 박해를 피해 유럽에서 러시아를 거쳐 북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해 온 사람들이다. 이들은 현대 물질문명을 거부하여 전기나 전화 등을 사용하지 않고 자동차 대신 마차를 이용하거나 걸어다니며, 공립학교 교육을 거부하고 유행과는 전혀 거리가 먼 옷차림으로 자신들만의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간다. 이들의 독특한 삶의 방식은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아미쉬 교도들의 역사는 박해와 이주의 역사이다. 이들의 선조들은 종교개혁 때부터 국가 교회와 전쟁을 반대하고 병역을 거부한다는 이유로 박해를 당하였다. 유럽에서 심한 박해를 받던 중 에카테리나 여제의 초대로 러시아로 갔다. 이들은 건조한 기후 조건을 가지고 있던 우크라이나의 스텝지대를 밀 곡창 지대로 바꾸어 놓았다. 그런데 에카테리나 여제가 죽고 나서 그들에게 허용되던 군 복무 면제와 신앙의 자유가 위협을 받게 되자 다시 미국의 펜실베니아 지역으로 건너오게 된다.

당시에 미국의 펜실베니아 지역은, 퀘이커 교도였던 윌리엄 펜이 영국 왕 찰스 2세로부터 아버지의 빚 대신 받았던 땅으로서 펜은 그 지역에 종교의 자유를 선포하여 아미쉬와 같은 종교적 소수자들의 새로운 정착지로 안성마춤이었다. 아미쉬 교도들은 미국의 펜실베이니아 주의 랭카스터에 처음 정착하였으나 이후 오하이오 주, 인디애나 주, 캔자스 주와 캐나다의 온타리오 주 등으로 이주하였다.

현재 아미쉬 교도들은 오하이오 주의 홈즈 카운티에 가장 많이 살고 있다고 한다. 지난 4월 첫 주에 아이들의 봄방학 기간을 이용하여 홈즈 카운티에 있는 밀러스버그, 왈넛 크릭, 벌린 등의 도시들을 돌아보았다.


▲ 왈럿 크릭에 있는 한 상가에서 일을 하고 있는 아미쉬 소녀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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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홀트(Behalt) 관람을 도와 주던 아미쉬 가이드가 사진 촬영을 위해 포즈를 취해 주었다.
ⓒ 강희정
밀러스버그에 도착했던 날이 마침 일요일이었는데 모든 상점과 기관들이 문을 닫고 있어 저녁 식사를 할만한 식당을 찾기에 어려움을 겪었다. 다음날 아침에는 아미쉬들의 삶의 모습을 보다 가까이에서 보기 위하여 도로를 따라가며 밀러스버그와 왈넛 크릭 주변의 아미쉬 마을들을 둘러보았다. 차로에 마차가 다니는 바람에 종종 차 속도를 늦추고 뒤따라 가야만 하기도 했다.

아미쉬들은 미국에 이주해 온 지가 수백년이 지났어도 스위스식 독일어를 쓰고 있다. 이들은 아미쉬가 아닌 사람들을 '영국인'(English)이라고 부른다. 이들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은 언어만이 아니라 복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아미쉬 성인 남자들은 콧수염을 깎는 대신 턱수염을 길게 기르고 모자를 쓰며 검은색 옷을 입는다. 여자들은 소박한 색깔의 블라우스와 발목 길이의 치마를 입고 머리를 감싸는 두건(커버링)을 쓴다. 이들은 한눈에 '다른 사람들'로 보인다.

아미쉬 가운데 일부가 관광업이나 가구나 퀼트 제조업에 종사하기도 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농업을 생업으로 삼고 있다. 마을에서 서너 마리의 말에 쟁기를 걸고 땅을 갈고 있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다. 풍차라든가 외부에 있는 화장실 등 미국의 농촌에서조차 흔히 볼 수 없는 풍경들이 나타났다. 간혹 전봇대와 전깃줄이 보이는 집들이 있었는데 아미쉬 교도들이 아닌 사람들 중에 관광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마을 인근에 들어와 살기 때문이라고 했다.

▲ 집집마다 물을 끌어 올리는 풍차가 보이고 빨래줄에 많은 옷들이 널려 있었다. 아미쉬 여인들의 고단함이 느껴진다.
ⓒ 강희정
▲ 서너 마리의 말을 부리면서 쟁기질로 밭을 갈고 있는 아미쉬 농부들의 모습
ⓒ 강희정
마을에 들어서면서 머리에 커버링을 하고 앞치마를 두른 아미쉬 여자들이 손수 빨래를 하여 집 밖에 걸린 줄에 널고 있는 모습을 곳곳에서 만났다. 아미쉬 여인들의 일상의 시작을 엿보는 듯했다. 미국의 웬만한 지역에서는 세탁한 빨래를 밖에 내다 거는 것이 허용되지 않고 있어 이러한 모습은 독특하고 낯선 풍경이 아닐 수 없다.

평균 잡아 일곱 명의 아이들을 낳는 아미쉬 여인들이 가족들의 빨래를 손으로 일일이 빨아 널고 있는 모습에서 이들의 육체노동의 강도가 만만치 않으리라는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현대 문명의 이기를 거부하는 삶은 그 대가로 과다한 노동을 요구한다. 쉴 새 없이 계속되는 육체노동은 아미쉬 교도들이 삶에서 가장 큰 스트레스를 받는 부분이라는 것은 인터뷰를 통해 새로 알게 된 사실이다.

마을을 돌아다 보는 동안에 이들이 독립적으로 운영하는 '원룸 스쿨' 두 곳을 보게 되었다. 대부분 아미쉬 교도들은 일반 학교가 아니라 자신들이 세운 학교에 자녀를 보낸다. 외부인들의 출입이 허락되지 않아서 밖에서 들여다 보는 정도로 그쳤지만 정부 지원이 없어서 그런지 학교 시설들이 낡아 보여 넉넉하지 않은 재정으로 운영되고 있는 것을 짐작하게 했다.

▲ 원룸스쿨로 알려진 아미쉬 학교의 모습. 낡고 수리가 되지 않은 모습에서 정부 지원을 받지 않는 학교라 재정이 넉넉지 않음을 추측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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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짝 들여다 본 아미쉬 학교의 화장실 모습. 우리네 전통적인 화장실과 닮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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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 하나로 이루어진 학교에서 교사 한두 사람이 20~30여명의 아이들에게 읽기, 쓰기, 셈하기, 영어 등을 가르치고 있다고 한다. 12학년까지가 의무교육 과정으로 되어 있는 미국에서 아미쉬 어린이들은 8학년까지 교육을 마치고 삶의 터전으로 투입된다. 한때는 국가 교육을 거부하는 행태가 불법으로 간주되었으나 미국 정부는 1972년 5월 15일 이들 교육 과정의 특수성을 인정하고 합법화하였다.

아미쉬 교도들이 많이 살고 있는 홈즈 카운티의 중심 도시는 벌린(Berlin)이다. 독일어 발음으로 하면 독일의 수도 베를린인 셈이다. 이곳에는 아미쉬와 메노나이트들의 역사를 후세에 전하기 위해 만든 아미쉬 메노나이트 헤리티지 센터가 있다. 이 센터의 핵심은 아미쉬와 메노나이트들이 박해를 당한 역사를 그림으로 기록해 놓은 곳인 '비홀트'(Behalt, '기억하라'는 뜻)라는 이름의 역사 공간이다. 하인쯔 가우겔(Heinz Gaugel)이라는 화가가 아미쉬와 메노나이트 교도들의 역사를 벽그림으로 재현해 놓은 곳이다.

마침 '비홀트'에 관람하러 온 사람이 없었던 탓에 자원 봉사자인 아미쉬 가이드의 설명을 혼자서 들으며 30분으로 제한되어 있는 안내 시간을 넘기고 한 시간가량 관람할 수 있었다. 벽그림은 예수의 부활과 초대 교회의 성립부터 시작되며, 콘스탄티누스 황제 이래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종교가 되면서 국가 교회와 전쟁을 반대한다는 이유로 잔혹한 고문 속에 죽임을 당한 사람들의 처참한 역사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 홈즈 카운티 벌린 시에 있는 아미쉬 메노나이트 헤리티지 센터. 아미쉬와 메노나이트의 역사를 그림으로 재현해 놓은 'Behalt'를 관람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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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ehalt'는 아미쉬 메노나이트들이 박해를 당한 역사를 재현해 놓은 곳으로 후세와 일반인들에게 종교적 신념을 위해 이들이 치른 댓가를 '기억하라'는 메시지를 던져주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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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쉬 교도들은 지난 450여년의 역사 속에서 국가 권력에 복종하여 전쟁에 나가 사람들을 살육하는 일에 참여하는 대신 감옥에 가거나 죽음을 당하기까지 한 평화주의자들이다. 이들의 전쟁 거부 움직임은 세계 1차 세계대전 때까지 계속되었으나 징병을 거부한 아미쉬 청년들의 죽음이 사회적으로 크게 반향을 일으켜 2차 세계대전 때부터 아미쉬 교도들과 양심적 병역 거부자들에게 대체 복무의 길이 열렸다고 한다.

종교적 신념을 지키기 위해 고문과 죽임당함을 마다 하지 않았던 아미쉬 교도들의 역사는 '사람은 무엇으로 살아가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 한 가지 답을 던져주는 듯하다. 또한 아미쉬 교도들이 자신들의 순수한 종교적 열정을 지키고자 한 대가로 치른 희생의 역사는 진리와 자유라는 것이 값싸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가르쳐 주고 있다. 이들은 우리로 하여금 역사의 제단에 바쳐진 수많은 무고한 생명들의 희생을 잊지 않고 '기억하라'고 외치고 있다.

아미쉬 교도들은 누구인가

아미쉬 교도들은 '재세례파(Anabaptist)'라고 하는 기독교 개혁 세력에서 비롯되었으며 메노나이트와 후터리안 등과 뿌리를 같이한다. 근세 초에 유럽에서는 가톨릭의 타락과 횡포에 반발하여 루터, 칼뱅, 쯔빙글리 등이 종교 개혁을 단행하여 개신교가 만들어졌다. '재세례파'들은 쯔빙글리의 제자들이었으나 훗날 쯔빙글리가 처음에 표방했던 개혁 사상에서 후퇴하자 1525년에 그로부터 떨어져 나와 형성된 '제3의 기독교도'들이다.

종교 개혁 당시부터 이들은 국가 교회를 반대한다는 이유에서 가톨릭과 개신교도 양측으로부터 심한 박해를 받았다. 이들은 당시에 유행하던 유아세례를 반대하고 무효화하였으며, 성인이 되어 자신의 순수한 신앙의 결단으로 세례를 다시 받을 것을 주장하여 '재세례파'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가톨릭의 사제였던 메노 사이몬즈(Menno Simons)가 개종하여 '재세례파'들을 이끄는 지도자가 되어 이들은 이후 '메노나이트'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1693년, 스위스 메노나이트였던 야콥 암만(Jacob Amman)은, 규율을 어긴 사람들에 대한 징계 문제와 관련하여 메노나이트가 순수성을 잃어가고 있다고 비판하며 따로 떨어져 나와 새로운 공동체를 이루었다. 이들은 암만의 이름을 따서 '아미쉬'라고 불리게 되었다. / 강희정 기자

덧붙이는 글 | 삼가 고 배형규 목사님의 명복을 빕니다. 미주뉴스앤조이(www.newsnjoy.us)에도 실립니다.


#아미쉬교도#아미쉬마을#비홀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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