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규의 부대는 어느덧 절반으로 줄어 있었고 화살은 이미 거의 다 떨어진 상태였다. 고려군은 돌격해 들어와 화살을 날리고 칼을 휘두르는 거란 보병과 기병들을 칼과 창으로 간신히 막아내고 있었다. 주위에는 거란군의 시체가 겹겹이 쌓여 거란군의 진군을 막아낼 지경이었건만 거란군의 돌진은 수그러들 줄을 몰랐다. 거란왕을 호위하는 거란의 정예기병인 어장친군(御帳親軍)이 뒤에서 버티고 서서는 고려군의 반격에 겁을 먹고 물러서는 병사들이 있으면 마구 베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사귀중 하귀와 구귀는 각기 거란군의 화살과 창에 맞아 전사했고 유도거는 돌진해 들어오는 거란군과 맞닥트리느라 왼손에 상처를 입은 채 병사들을 독려하고 있었다. 지휘를 해야 할 양규조차도 칼을 휘두르며 직접 적을 맞아 싸우느라 사방을 돌아볼 여유조차 없었다.
"이봐 도거!"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오귀가 소리를 질렀다. 유도거는 오귀쪽을 돌아보지도 않은 채 소리쳤다.
"바쁘니 나중에 말해!"
"지금 말하지 않으면 기회가 없어!"
"……"
"미안하네! 미안해! 미안해!"
유도거는 기계적으로 앞으로 달려오는 거란군에게 칼을 휘두를 뿐 더 이상 오귀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오귀는 미안하다는 말을 계속하며 미친 듯이 도끼를 휘둘렀다.
"으와!"
앞에서 뛰어드는 거란병사의 가슴팍을 찌른 유도거의 칼이 뚝 하고 부러지며 칼자루 밖에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 뒤를 이어 뛰어드는 거란병사의 창날을 보며 유도거는 눈을 감았다.
"비켜라! 비켜!"
가슴팍을 저미는 쇳조각의 감촉을 예상했던 유도거는 뜻밖의 소리에 눈을 번쩍 떴다. 유도거의 앞에는 창을 치켜든 거란병들을 향해 말위에서 미친 듯이 칼을 휘두르는 이랑의 모습이 보였다.
"모두들 이쪽으로 오시오!"
이랑은 유도거의 손을 잡고 말에 태우고서는 박차를 가해 거란군들의 머리 위를 힘차게 뛰어넘었다. 고려의 원군이 당도하자 급박해진 거란군은 어창친군까지 총 동원해 더욱 고려군을 몰아붙였다. 도처에서 피가 튀는 혼전이 계속 되자 이랑은 더 이상 나가지 못한 채 자신의 허리를 잡고 말 뒤에 매달린 유도거와 함께 말 위에서 칼을 휘두를 따름이었다.
"이봐! 유도거! 유도거!"
유도거는 혼전의 와중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서는 고개를 돌렸다. 그와 동시에 그는 등에 끔직한 통증을 느끼며 이랑과 함께 화살에 꿰여 말위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유도거는 화살이 날아온 곳을 믿어지지 않는다는 눈으로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그곳에는 앉아서 노를 든 채 김달치가 처량하게 웃고 있었다. 유도거는 가물거리는 정신을 억지로 붙잡으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이게 무슨 짓이냐?"
김달치는 피투성이가 된 자신의 다리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난 갈수가 없었어!"
"이유가 고작 그런 거야?"
유도거는 겨우 자신에게만 들릴만한 소리로 웅얼거리다가 눈을 감았다.
"이랑과 같이 갈 수가 없었다고!"
소리를 지르는 김달치의 등 뒤를 거란 기병이 지나가며 창으로 찔러 버렸다. 김달치는 그 앉은 자세에서 푹 고개를 숙이고 절명해버렸다.
화살이 유도거의 몸을 관통하여 등에 박히는 바람에 말위에서 떨어져 다리뼈가 부러진 이랑은 그제야 겨우 몸을 일으키고서 화살촉에서 벗어난 후 유도거의 시체를 안고 눈물을 흘렸다. 그런 이랑의 앞으로 거란 기병의 말발굽이 짓쳐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랑의 눈에는 그 순간이 현실이 아닌 것처럼 느리게 흐르기 시작했다.
"난 미워하지 않아…."
이랑은 자신의 눈앞까지 치달은 말발굽을 똑바로 응시했다.
"모든 것이 끝나버려도 모두를 사랑하겠어."
말발굽은 무심하게 유도거를 안은 이랑의 몸을 밟고 지나가 버렸다.
덧붙이는 글 | 8월 6일 연재가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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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두레마을 공방전
2. 남부여의 노래
3. 흥화진의 별
4. 탄금대
5. 사랑, 진주를 찾아서
6. 우금치의 귀신
7. 쿠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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