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문화원을 나서서 바로 차이나타운을 알리는 중국 특유의 형식 문을 '페루'라고 한단다. 중국에서는 이렇게 생긴 문을 마을의 입구를 표시하는 상징물로 세운다고 한다. 마치 우리나라의 마을 앞에 세운 큰 돌 '선돌'과 같은 것인 셈이다.
이 페루를 중국정부에서 직접 돈을 들여서 제작해주는 일은 전세계적으로 인천밖에 없단다. 이런 페루를 지나서 100여년 전에 조성된 중국인 거리를 걸어보았다. 100여년 전의 건물들이 아직도 그대로 명맥을 유지해가고 있는 것들도 있었지만 퇴락하여 이용을 하지 않고 있는 것들도 있었다.
중국 음식의 대표적인 상품이 되어버린 자장면의 본고장답게 맨 먼저 자장면을 만들어 팔았다는 '태화관'은 아직도 건물은 고색창연한 모습으로 남아 있었지만, 지금은 이용을 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인천에서는 이곳을 잘 정비하여서 자장면박물관으로 만들어서 자장면을 직접 뽑아보는 체험까지 할 수 있는 명물로 재탄생시키겠다는 알찬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태화관을 보고 자유공원으로 올라가는 길가에는 옛날 중국 영사관의 자리를 이제는 중국인 학교로 만들어서 이용하고 있는데, 그 벽면에 74장면의 삼국지 중요 장면을 그려서 조성한 명품 벽화의 거리가 조성되어 있었다. '삼국지거리'라는 이름이 붙은 이 거리를 자유 공원에서부터 차례로 보고 내려오노라면 삼국지의 전체적인 줄거리를 더듬어 볼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자유공원은 본래 응봉산이라는 해발 60여m의 산을 여러 나라가 조계를 형성하면서 산봉우리를 좀 깎아내리고 나무를 심어서 국내 최초의 공원을 만들었다다. 이름하여 만국공원이라 불렀는데, 일본이 나라를 점령을 하면서 '서공원'이라 불리다가 해방이 되어서 만국공원이라는 이름을 되찾았지만, 6.25전쟁 때에 인천상륙작전을 기념하여 자유공원으로 부르게 되었단다.
맥아더 동상을 잠시 보고, 나서 내려가자고 했지만 일부는 바로 내려가고 있어서 우리도 일찍 내려가려고 나섰는데, 제물포 구락부 건물이 보여서 들어섰다.
인천이 자랑하는 국내 최초의 명물 중의 하나가 이 자유공원과 함께 자리한 '제물포구락부'라는 사교의 장이었다. 어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술집인 셈이다. 조계에 모여 사는 각국의 사절이나 기업인들과 제국호텔에서 숙식을 하면서 우리나라에서 돈벌이를 하려는 사람들이 모여서 사업을 논의하고 서로 협력할 것과 다툴 것을 여기서 풀어내는 사교의 장이었단다. 지금은 비교적 잘 정비가 되어서 정말 사교 클럽에 온 기분을 느낄 수 있을 만큼 재현을 해두고 있어서 한동안 느긋하게 소파에 몸을 묻고 그날의 부자들이나 기업인들의 기분을 느껴 불 수 있었다.
한 단계를 더 내려서니 옛 시장 관사 건물을 볼 수 있었다. 이 건물 옛 일본인들이 지은 시장 관사였다는데 지금까지 시장 관사로 이용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 건물은 건물보다는 일본식 정원이 특히 아름다워서 이 부분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특히 인기가 있다고 한다. 지금은 이 관사를 역사유물전시관으로 만들어서 전시를 하고 있었으나, 공사가 진행 중이라서 견학을 할 기회를 갖지 못하여 아쉬웠다.
돌아 내려오니 중국과 일본의 조계를 가르던 계단이 곧게 뻗어 있고, 그 계단의 맨 윗자리에 공자의 석상이 위엄 있게 서 있었다.
일본 조계쪽으로 내려가면서 남아있는 건물들을 보니 일본의 은행 건물이 세 개가 아직도 그 모습 그대로 건전하게 보존이 되어 있었고, 내부 수리만으로 이용이 된다고 하니 무서운 인종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일본은 전쟁에서 져서 우리나라를 내어 놓을 것이라는 생각은 조금치도 않고 있었기 때문에 건물 하나라도 정성을 다하여 지었고 이렇게 아직도 그 모습을 지니고 남아 있을 수 있게 한 것이리라 생각하니 가슴이 섬뜩한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녹원환경뉴스, 디지털특파원, 개인블로그 등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